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photo 남강호 조선일보 기자

지난 9월 26일 경기도 수원의 아주대학교 다산관에서 중국정책연구소(소장 김흥규) 설립 기념 국제학술회의가 열렸다. 이날의 토론 주제는 최근 한·중 관계에서 거론되는 민감한 어젠다들이 모두 포함됐고, 세미나 발제에는 양국의 젊은 엘리트 학자들이 대거 참가해 논쟁을 벌였다. 형식은 ‘학술회의’였지만 내용은 양국 외교 브레인들의 ‘전략싸움’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부드러운 말 속에 칼이 숨어 있었다.

첫 논쟁은 ‘한·중(韓中)동맹’ 건. 중국 측 왕이웨이(王義桅) 인민대학 국제문제연구소장이 먼저 ‘한·미(韓美)동맹’을 거론하며 ‘도발’했다. 그는 “한국과 미국이 형성하고 있는 동맹관계는 그 강도 면에서 동북아시아 내 미국과 동맹국들의 관계 중 가장 약한 축(軸)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한·중 관계는 그 전략적 내포 범위를 새로운 영역으로 확장할 여지가 있다”고 말했다. 왕 소장은 “전 세계적으로 미국의 동맹체제는 약화되고 있으며 ‘나무가 쓰러지면 그에 의지해 살던 원숭이들이 흩어질 수밖에 없듯이’, 장차 한국도 미국이 자신의 안보를 보장해줄 수 있는지에 대해 의구심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왕 소장은 또 “올 연말까지 한·중 자유무역협정(FTA)이 체결될 가능성이 높고 그런 배경을 바탕으로 양국이 기존의 동북아 지역 외교형세를 타파하면서 ‘선린우호협력조약’ 체결을 위한 협상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한·중 간 우호조약 체결을 통해 양국 관계를 ‘동맹’으로 격상하고, 한국에 대한 중국의 핵보호조치로 한반도의 핵문제를 영구히 해결하자는 것이다. ‘한·중동맹론’은 옌쉐통(閻學通) 칭화대 당대국제관계연구원장도 주장한 바 있다.

왕 소장은 중국과 북한 간에 1961년 체결된 ‘북·중 우호협력상호원조조약’은 세 차례의 자동 연장을 통해 2021년까지 유효하지만, 한·중 간 선린우호협력조약이 체결되면 북·중 조약으로부터 받는 구속을 상쇄시켜줄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한·중 선린우호협력조약은 통일된 한반도가 ‘중국적 질서’로 복귀하는 안정적인 기초를 다질 수 있다”고 말해 중국 지도부의 속내를 드러냈다.

한국 측에선 이춘복 성균중국연구소 책임연구원이 반론에 나섰다. 이 연구원은 “통일이 되지 않는 한 한·중 간 안보협력의 폭과 깊이는 제한될 수밖에 없다”며 “한·중동맹론은 중국·북한 간, 미국·중국 간 불신을 가중시키고 북한의 반발로 남북관계 대결과 한·미동맹의 균열을 가져올 수 있기 때문에 한국 입장에서 섣불리 추진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김한권 아산정책연구원 중국연구센터 소장은 “한·미동맹과 한·중 관계는 군사안보와 경제라는 두 가지 범주로 명확히 나누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있다”며 “미·중의 이익 충돌 시 한국이 중립을 지키기보다 선택하도록 몰리게 될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한·미 동맹에 준하는 한·중 관계의 양립 시도는 결국 한국의 전략적 부담으로 작용한다”고 반박했다. 김 소장은 또 “미국과 시장경제와 민주주의라는 보편적 가치관을 나누고 있는 한국이 ‘중화사상’을 강조하는 중국과 진정한 의미의 운명공동체 또는 선린우호협력관계를 장기간 유지할 수 있을지도 회의적”이라고 덧붙였다.

두 번째 논쟁은 ‘미국 사드(THAAD·고(高)고도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 문제를 놓고 벌어졌다. 현역 준장(대교)인 중국 군사과학원 왕이셩(王宜勝) 아시아·아프리카 군사연구실 주임은 자신의 발제시간이 되자 당초 배포한 원고에는 없는 내용을 작심한 듯 쏟아냈다.

그는 “미국의 사드 시스템이 한국에 구축된다는 것은 한국이 미국의 대(對)중국 봉쇄 전략에 가장 훌륭한 파트너가 된다는 것”이라며 “이는 중국 안보에 중대한 위협이며, 중국은 반드시 강력한 반격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미국이 입지를 선택한 평택에 사드 기지가 건설되면 탐측거리가 1000~1500㎞에 달해 중국 산동성(山東省)이 범위에 들어간다. 중국은 이처럼 핵심안보이익이 희생당하는 것을 보고만 있을 수 없다”면서 “한국의 사드 기지는 중국 전략적 무기의 공격목표가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그동안 쌓아온 한·중 관계는 물거품이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왕 주임은 청중과의 질문답변 시간에도 다시 사드 문제를 거론하며 “지상 150㎞ 범위에서 탄도미사일을 요격하는 사드는 사거리가 짧은 북한의 미사일을 방어하는 데 무의미하며 결국 중국을 봉쇄하려는 목적”이라고 강조했다. 즉 사드는 북한 위협에 대응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대중국용이라는 주장이었다.

이에 한국 국방부에서 나온 전문가는 국가안보 당위론으로 왕 주임의 주장을 반박했다. 그는 “북한이 핵무기를 소형화·정밀화하고 미사일 사거리를 다양화하는 현실은 한국의 안보에 가장 큰 위협”이라며 “국가라면 사드든 무엇이든 북한의 위협을 감소시키는 미사일 방어체계를 갖추는 것이 당연하다”고 강조했다. 정부 연구기관에서 나온 다른 전문가는 “사드가 중국 봉쇄용일 뿐 한국에 도움이 안 된다는 왕 주임의 발언은 ‘팩트(fact·사실)’가 잘못된 것”이라며 “사드는 장거리든 중·단거리든 종말(終末·떨어지는) 단계에서 150㎞ 고도까지 미사일을 요격하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한국을 향하는 북한 미사일 방어에 도움이 된다”고 반박했다. 그는 “사드가 설치되더라도 북한 미사일을 다 방어할 수는 없다”며 “미국이 중국·러시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드를 한국에 배치하려는 것은 주한미군과 그 가족을 보호하려는 것이 가장 큰 목적”이라고 덧붙였다.

이날 아주대 세미나는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웃는 얼굴로 논쟁을 벌였지만, 그 말 속에는 미래 한·중 관계의 갈등요소가 대거 포함돼 있었다. 중국이 한국 학자들의 반발을 무릅쓰고 ‘한·중동맹론’과 ‘사드의 한국 배치 반대’를 노골적으로 들고나온 것은 최근 중국 외교전략의 변화를 보여준다. 그 변화란 중국이 더 이상 실력을 감추고 조용히 힘을 기르는 ‘도광양회(韜光養晦)’ 전략에 머무르지 않고 국제사회에 적극적으로 중국의 목소리를 내는 ‘주동작위(主動作爲)’ 외교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지난 7월 브라질에서 열린 브릭스(BRICS) 정상회의 기자회견 때 시진핑 주석이 사용한 ‘중국방안(中國方案)’이란 용어가 바로 새 외교전략의 집약이다. 중국 외교부 사이트에 ‘Chinese Solutions’으로 번역돼 있는 이 용어는 중국이 더 이상 미국 주도의 국제질서에 순응만 하진 않을 것이며 ‘중국식 해법’을 제시해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미·일 주도의 아시아개발은행(ADB)에 대응하는 중국의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의 설립, 미국의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대항하는 역내 포괄적 경제동반자협정(RCEP) 추진, 미국의 아시아 회귀와 미·일동맹 강화에 맞서는 ‘아시아인에 의한 아시아의 안보’ 제창(CICA 회의), 동중국해에서의 방공식별구역(ADIZ) 선포, 남중국해에서의 해양관할권 확대를 추진하는 것은 모두 이러한 공세적 외교전략의 사례들이다. 중국은 또 북(北)쪽의 러시아, 서(西)쪽의 파키스탄, 남(南)쪽의 아세안에 이어, 동(東)쪽으로 ‘한·중동맹’을 통해 주변국 외교전략의 포진(布陣)을 완성하려 한다. 중국이 한국에 연내 FTA 체결을 요구하면서 다른 한편으론 사드의 한국 배치에 반대하여 미국의 영향력 확대를 차단하려는 것도 이런 배경에서다.

시진핑 주석이 한국에 와서 ‘친구’ ‘친척’을 거론하며 ‘매력 공세’를 펼친 것은 결코 한국이 대단해서가 아니다. 동북아에서 ‘중국적 질서’를 구현하려면 먼저 한국을 영향권에 두지 않으면 안 되기 때문이다. 중국이 ‘친성혜용(親誠惠容·친절하고 성실하고 시혜하고 너그럽다)’ 같은 좋은 용어로 대외정책을 포장하는 것도 ‘중국적 질서’ 구현 전략의 일환이다. 중국이 한국에 ‘포용과 압박’의 이중전략을 구사하면서 한국의 입지도 점점 좁아지고 있다. 사드·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 같은 중대한 국가전략에서 한국이 독자적으로 결정하기는커녕 미국과 중국에 의해 양팔이 잡아당겨지는 형국으로 바뀌고 있다. 게다가 북핵과 일본 우경화까지 목을 죄어온다.

중국은 한국의 경제발전뿐만 아니라 남북통일에도 매우 중요하다. 따라서 한·중관계를 지속적으로 발전시켜 나가는 데 힘을 기울여야 한다. 그렇지만 미래의 한·중관계가 중국이 원하는 대로 끌려가기만 해서는 결코 두 나라에 이익이 되지 않는다. ‘한·중동맹론’만 해도 중국이 간절히 원하는 것이지만, 한반도 통일에 기여하기보다 오히려 북한을 자극해 통일을 어렵게 할 수도 있다. 또 한·미동맹을 통해 한국인이 누려온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인권과 언론자유 같은 보편적 가치가 ‘한·중동맹’ 체제에서도 보장될 것이란 확신을 주지 못한다. 최근 홍콩 민주화 시위에 대한 중국 중앙정부의 태도가 이를 시사한다.

중국이 미덥지 못하다고 해서 한국이 언제까지나 미국의 바짓가랑이만 붙들고 늘어지는 나약한 국가로 남아서도 안 된다. 그런 정신자세로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한국은 자기 결정권을 갖지 못하고 몸이 찢어질 수밖에 없다. 이런 위기 상황을 돌파하려면 한국은 미국과 중국의 손을 뿌리칠 수 있어야 한다. 경제규모 세계 15위의 국가가 100년 전처럼 또다시 자기 운명을 강대국의 손에 맡길 수는 없지 않은가. 신각수 전 주일대사는 한국의 진로와 관련, “‘중견국가’로서 한국의 전략적 가치를 높이고 중층적 지역협력체의 확산에 선도적 역할을 하며, 한반도 문제에서 주도적 역할 확보에 힘써야 한다”고 지적했다. 주인의식을 가지고 적극적인 외교를 구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 국민 모두 집안싸움을 그치고 밖으로 눈을 돌려 미래를 열어나가야 한다.

지해범 조선일보 동북아시아연구소장 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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