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대전쟁 그림’ 와세다대학 소장
‘조선대전쟁 그림’ 와세다대학 소장

고바야시 기요치카(小林淸親)라는 풍속화가가 1882년에 그린 ‘조선대전쟁 그림(朝鮮大戰爭之圖)’이라는 우키요에(浮世繪)가 있다. 그림 오른쪽에는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 공사를 비롯한 일본 외교관의 모습이 보인다. 그림 왼쪽에는 ‘조선왕성’ ‘인천부’ ‘제물포’의 지명이 보이고, 그 아래에는 갓을 쓴 조선 병사들과 흰 옷을 입은 일본 병사들이 백병전을 벌이고 있다. 그 위에는 여기 그려진 사건에 대한 설명이 적혀 있다.

‘1882년 7월 23일 조선 경성의 우리 일본공사관에 폭도 수백 명이 불시에 쳐들어왔다. 하나부사 공사 등은 분연히 방어하여 겨우 20여명으로 한국인 대부대를 무찔러 일본의 무위(武威)를 떨치며 한국군을 부수고 무사히 돌아왔다. 악전고투의 모습을 그림으로 나타내서 이들의 훈공(勳功)을 세상에 알린다.’ 이를 통해 이 풍속화가 1882년 7월 19일에 조선 병사들이 급료에 불만을 품고 조선의 탐관오리와 일본공사관을 습격한 임오군란(壬午軍亂)을 그린 것임을 알 수 있다. 조선 정부가 신식 군대인 별기군을 우대하고 옛 군인들을 차별한 데에서 비롯된 이 반란 사건은 이들이 일본공사관을 공격하면서 국제적인 사건으로 비화했다. 조선에 경제·군사적으로 간섭할 명분을 찾던 일본은 조선 병사들의 일본공사관 습격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전쟁 분위기를 고취했다.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에 간행된 ‘일청조선전쟁기(日淸朝鮮戰爭記)’라는 책은 임오군란에 대한 일본 국내의 시각을 보여주는 프로파간다이다. 상단 왼쪽에는 임오군란과 청일전쟁에 관련된 지도와, 조선 왕성을 배경으로 한 명의 노인이 보인다. 이 노인은 전근대 일본이 한반도에 대해 정치·군사적으로 우위에 서게 되었다고 주장하는 사건인 이른바 ‘진구코고(神功皇后)의 삼한정벌’ 전설에 등장하는 다케우치노 스쿠네(武內宿禰)라는 신하다. 여기서 놓칠 수 없는 것은, 다케우치노 스쿠네의 모습이 임진왜란의 장본인인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의 모습과 비슷하게 그려져 있다는 사실이다. ‘삼한정벌’ 전설과 임진왜란, 그리고 ‘조선대전쟁’을 중첩시키며 한반도에 대한 일본의 지배가 면면히 이어져왔다고 간주하는 19세기 말기 일본의 분위기를 확인할 수 있다.

한편 상단 오른쪽에는 조선군에 홀홀단신으로 맞서는 일본인이, 중단 왼쪽에는 난을 피해 인천으로 피란한 일본공사관 일행이 배를 타고 탈출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조선 병사들을 ‘폭도’로 묘사하고 일본인들이 이들로부터 피해를 입었음을 강조한 것이다. 중단 오른쪽에는 조선의 ‘개화당’과 ‘완고당’ 인사들의 명단이 실려 있다. ‘일청조선전쟁기’와 같이 유치한 형식의 그림책을 읽을 서민들도 김옥균·김홍집·박영효 등 조선 정국의 주요 인물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니, 이른바 ‘조선 문제’가 당시 일본인들에게 얼마나 시급하고도 긴요한 과제로서 다가왔는지를 보여주는 것이라 하겠다. 하단 왼쪽에는 임오군란을 틈타 대원군이 궁궐에 들어가 명성황후 민씨를 압박했다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훗날 조선의 왕성을 습격하여 명성황후를 죽인 뒤에도, 일본인들은 어디까지나 대원군이 이 사건의 주모자이고 일본 낭인들에게는 책임이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펼친 바 있다. 이 그림에서도 대원군과 명성황후 간의 대립 구도를 강조함으로써, 조선에 대한 일본의 간섭을 정당화하려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물론 대원군과 명성황후가 대립하고 있다는 인식은 김윤식 등 당시 조선의 고위 관료들도 공유하고 있는 바였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90쪽·김용구) 일본 측은 조선의 이러한 인식을 자국 측에 유리하게 확대해석했다. 이처럼 ‘조선대전쟁 그림’과 ‘일청조선전쟁기’는 임오군란에서 청일전쟁, 러일전쟁에 이르는 시기의 한반도를 전쟁 상태로 간주하고, 이 혼란을 틈타 한반도에서 이권을 추구하고자 한 19세기 말 일본 사회의 분위기를 생생하게 보여준다.

임오군란 당시 조선 병사들이 원래의 목표가 아닌 일본 외교관들을 공격한 것은 단순히 일본에 대한 역사적 반감 때문이 아니었다. 1853년에 미국의 페리 제독이 군함을 이끌고 일본을 협박하여 이듬해 불평등조약인 미·일화친조약을 맺은 바 있다. 일본 정부는 이 방식을 그대로 조선에 적용하고자 1875년에 운요호(雲揚號)를 강화도로 보냈고 이듬해 1876년에는 불평등조약인 강화도조약을 맺었다. 이로부터 일본 경제와 현격한 격차를 보인 조선 경제는 급속히 피폐해졌다. 이러한 배경이 있었기에 이들 반란군은 애초의 목표가 아니었던 일본공사관을 습격한 것이다.

병사들이 반란 초기에 흥선대원군을 찾아가 중재를 요청한 것처럼, 국왕 고종 역시 자신의 아버지인 대원군에게 사태 수습을 요청한다. 그러나 조선에 들어온 중국 청나라의 군대가 대원군을 자국으로 납치하기에 이르러 조선을 둘러싸고 일본과 청나라 사이에 충돌이 발생한다.

청나라는 이제까지 자국 주변의 ‘불확실한 공간’에 대하여는 느슨한 간접지배를 원칙으로 해 왔다. 그러나 1860년대부터 1877년까지 오늘날의 동투르키스탄, 즉 신장위구르 지역에서 야쿱 벡(Yakub Beg) 등이 이끄는 이슬람 세력이 독립전쟁을 벌이고, 이를 틈탄 러시아가 일리(Ili·伊犁) 지역을 무력 점거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동투르키스탄은 최후의 유목 제국이었던 몽골족의 준가르칸국이 자리했던 지역으로, 청나라는 모든 몽골족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준가르 세력을 추격했다. 끝까지 저항하는 몽골인들이 청나라 군대에 의해 대량학살된 뒤 이 지역에 새로이 거주하게 된 것이 오늘날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이슬람교도들이었다. 1860~1870년대에 독립국가를 세운 경험이 현재도 이들에게 정치적 영감을 주고 있음은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바다.(‘근대 중앙아시아의 혁명과 좌절’ 서문·김호동)

동시에 이 시기에는 지난 회에 살펴본 바와 같이 유구왕국의 주민들이 타이완의 선주민에게 학살된 사건을 명분 삼아 일본군이 타이완을 침공했다.(1874년 5월) 청나라 조정에서는 일본에 대항하여 해군을 증강하자는 ‘해방론(海防論)’의 이홍장(李鴻章)과 야쿱 벡의 봉기를 진압하고 러시아에 맞서자는 ‘색방론(塞防論)’의 좌종당(左宗棠)이 충돌했다. 이들은 모두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증국번(曾國藩)의 제자였다. 당초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할 임무를 맡은 것은 유능한 몽골족 장군 셍게 린첸(Sengge Rinchen·僧格林沁)이었다. 그러나 그가 1865년에 전사함에 따라 증국번이 한족들에게 중화(中華)를 지키자고 호소하여 의병을 조직하게 된다.

만주족과 몽골족의 연합정권으로서의 성격을 띤 청나라에서는 한족이 정부 요직에 오르는 사례가 거의 없었다. 셍게 린첸이 전사한 공백을 틈 타 증국번·이홍장 등 반란 진압에 훈공을 세운 한족들이 정부 고위직에 오르는 길이 열렸다. 1870년대가 되면 해방론과 색방론의 대립에서 보듯이 한족은 국가의 나아갈 바를 정하기에 이르렀다. 병자호란을 거치면서 청나라에 복속한 조선에는 원칙적으로 한족 관료가 파견되는 일이 없었다. 한족이 간여할 문제가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임오군란 이후 원세개(袁世凱)가 조선에 파견되어 권력을 휘두른 데에서 알 수 있듯이, 조선에 대한 지배에서도 한족은 다시 모습을 드러내기에 이르렀다.(‘청나라, 키메라의 제국’ 236쪽·구범진)

그림  ‘일청조선전쟁기’ 2편 김시덕 소장
그림 ‘일청조선전쟁기’ 2편 김시덕 소장

야쿱 벡의 봉기를 진압하는 과정에서 청나라 조정은 서구 열강의 국제법에 따라 기존의 외교 정책을 변경하게 되었으며, 그 첫 적용 사례가 임오군란이었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1~17쪽) 조선을 국제법적 차원의 속국으로 만들기 위해 한편으로는 ‘조선책략(朝鮮策略)’을 조선 정부에 전달하여 외교정책을 조선에 제안하고, 또 한편으로는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보내어 국왕의 아버지를 자국으로 납치하는 강경책을 실행에 옮긴 것이다. 조선 정부 역시 청나라로부터 조선을 떼어내어 독립국으로 대우하면서 독점적으로 조선을 침략하고자 하는 일본의 전략에 맞서기 위해 청나라의 이러한 입장에 기본적으로 동의했다. 일본에 파견되었던 어윤중이, 조선이 독립국이라고 말하는 일본인들에 대해 “자주는 할 수 있지만 독립은 아니다”라고 말했다는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23쪽)

참고로 ‘조선책략’을 김홍집에게 전달한 황준헌(黃遵憲)은 초대 청나라 주일공사인 하여장(何如璋)의 수행원이었다. 마찬가지로 하여장을 수행한 양수경(楊守敬)은 일본에 존재하는 중국의 귀중한 문헌을 다수 수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수집한 문헌 가운데에는 1695년에 교토에서 간행된 일본판 ‘징비록’도 있었다. 일본판 ‘징비록’은 류성룡의 ‘징비록’ 본문에 일본식 훈점(訓点)을 붙이고 조선 지도 등을 첨부한 것이다. 이 책을 읽은 양수경은, 국왕 선조가 음락했고 류성룡·이덕형 등의 간신이 설쳤으며 조선인들이 전쟁을 잊고 있었기 때문에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이 일본의 공격에 무력했다는 명나라 ‘양조평양록(兩朝平攘錄)’ 등의 내용은 오류라고 비판한 바 있다. 일본의 침략에 사전 대응하지 못했음을 반성하여 미래를 대비하자는 내용을 담은 ‘징비록’을 ‘조선책략’의 저자인 황준헌은 과연 읽었을까. 만약 읽었다면, 류성룡의 자아비판에도 불구하고 300년 만에 또다시 일본의 침략을 받은 조선에 대해 그는 어떻게 생각했을까.

청나라는 서구 열강의 침략에 맞서 외교·군사 정책을 근본적으로 변경하고 이를 조선과의 관계에 적용하고자 했다. 임진왜란 당시 한반도를 명나라에 합병하자는 안이 명나라 정부에서 논의된 것과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한반도를 청나라에 병합하자는 논의가 청나라 정부에서 이루어졌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96~99쪽) 이홍장은 조선의 주권을 부정하는 이러한 방침을 택하지 않았지만, 청나라 군대를 조선에 주둔시키고 대원군을 납치하는 등 강경책을 구사하는 데에는 주저함이 없었다.

수·당이 고구려 및 신라와 충돌하는 경험을 통해 중원 세력은 한반도를 완전히 병합한다는 야망을 포기하고 한반도 세력은 중원의 국가를 상국(上國)으로서 존중한다는 암묵적 합의를 도출하여 이를 1000년 이상 유지해왔다. 중원 지역을 지배하는 것이 당·명과 같은 한족이든, 몽골족·만주족과 같은 비(非)한족이든 이러한 묵계를 19세기 중기까지 지켰다. 그러나 임오군란을 맞이하여 중원 세력이 이 합의를 일방적으로 파기하자, 한반도 세력은 이에 반발하여 일본 세력을 끌어들임으로써 중원 세력을 축출하고자 하는 시도를 하게 된다. 이것이 1884년 12월 4일에 김옥균 등이 쿠데타를 일으켜 3일간 정권을 차지한 갑신정변이다.

이들은 베트남의 지배권을 두고 프랑스와 청나라가 충돌하면서(1884~1885년 청불전쟁) 청나라가 조선에서 군대를 일부 빼 간 틈을 타서 일본 세력을 끌어들여 청나라를 축출하고 대원군을 귀국시키는 등 조선의 자주권을 확보하려 했다. 그러나 고종이 미국의 선의(善意)를 믿은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이 일본의 선의를 믿은 것은 정치적 패착이었다. 애초에 이들을 도와주기로 했던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일본 공사가 갑자기 방침을 변경하여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원세개가 이끄는 청나라 군대가 창덕궁에 진입하면서 쿠데타는 실패했다. 쿠데타 세력이 도피하는 가운데 홍영식은 “한 사람은 남아서 개화세력이 천명한 기본 원칙에 부끄러움이 없었음을 세계에 알려야 한다”며 그대로 남아 살해되었다.(‘개화파 열전’ 39쪽)

이처럼 갑신정변 세력은 통설과 달리 단순히 ‘친일파’로 치부될 수 없다. 최근 한국 학계는 이러한 관점에서 갑신정변 연구를 심화하고 있는데, 이러한 재평가가 이루어지기 전의 분위기에 대해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의 저자 김용구 교수는 다음과 같은 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1967년이라고 기억한다. 필자는 ‘갑신일록’의 판본과 갑신정변에 관한 의견을 듣기 위해 국사편찬위원회를 찾은 적이 있다. 당시 이 위원회는 정부 청사(현재 국립박물관) 4층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분의 연구원이 필자를 만나자 친일파의 문제를 왜 연구하느냐고 반문하였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157쪽) 필자는 이 일화에서 두 가지 점을 생각하게 된다. 한 가지는 ‘갑신정변 세력은 친일파인가’ 하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친일파라면 연구할 필요가 없는가’ 하는 것이다. 한국 학계가 친일파 문제를 냉철한 학문적 관점에 입각하여 정면에서 다루지 않은 결과, 한쪽에서는 아무에게나 친일파라는 낙인을 찍어대는 자들이, 또 한쪽에서는 “식민지 시기의 조선인들은 살아남기 위해 모두 친일했다”는 주장을 펼치는 자들이 탄생했다.

갑신정변 세력을 배신한 일본은 임오군란 때와 마찬가지로 이번에도 일본인이 무고하게 조선·청나라 사람들에게 피해를 입었다는 프로파간다를 퍼뜨렸다. 갑신정변의 일본 측 배후인 이노우에 가쿠고로(井上角五郞)가 저술한 ‘한성지잔몽(漢城之殘夢)’에 삽화를 붙여 청일전쟁 중인 1895년 1월에 간행한 ‘정청도회(征淸圖繪)’를 보자. 도피 중에도 여성에 대한 예의를 지키는 일본 신사와, 피란하는 일본인들에게 만행을 저지르는 조선·청나라 사람의 모습이 대비되어 그려져 있다. ‘문명’ 일본과 ‘야만’ 조선·청나라를 강조함으로써 이들 지역에 대한 침략을 정당화하고자 하는 의도가 드러난다. 이처럼 일본은 갑신정변에서 자국민이 피해를 입었다고 선전하는 한편으로, 이번 정변을 온건하게 해결하고자 청나라에 대해 유화적 태도를 취했다. 사건 처리를 위해 중국 톈진에서 회담을 가진 이홍장과 이토 히로부미는, 두 나라 가운데 어느 한 나라가 조선을 병합할 경우에는 전쟁이 일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 결과 1885년 4월 18일에 맺어진 톈진조약에는 “장래 만일 조선국이 변란이나 중대 사건이 있어서 중·일 양국 혹은 1국이 파병을 요(要)할 때에는 먼저 문서로 알려야 하며 그 사건이 진정된 이후에는 곧 철회하여 다시 머물러 주둔하지 않는다”(‘임오군란과 갑신정변’ 271·279쪽)는 조항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리고 이 조항이 10년 뒤 청일전쟁을 일으키는 단초가 된다.

갑신정변과 무관함을 주장하는 일본 정부는 일본으로 망명한 김옥균을 냉대했고, 심지어는 북태평양의 사이판 근처에 자리한 오가사와라제도(小笠原諸島) 및 홋카이도로 유배 보내기까지 했다. 4년간의 유배를 마친 뒤 그는 이홍장과 직접 담판하기 위해 중국 상하이로 건너갔다가 조선 최초의 프랑스 유학생 홍종우에게 암살되었다. 김옥균의 일본인 후원자들이 도쿄의 아오야마 레이엔(靑山靈園)에 세운 김옥균 추모비에는 “비상한 재주를 갖고, 비상한 시대를 만나, 비상한 공도 세우지 못하고, 비상하게 죽어간, 하늘나라의 김옥균 공이여”라는 유길준의 글이 새겨 있다.(‘개화파 열전’ 15쪽·신동준)

한편 김옥균은 일본의 게이오대학에 유학한 바 있으며 이 대학의 설립자인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갑신정변의 배후로 지목되기도 한다. 앞에서 소개한 이노우에 가쿠고로는 “김옥균·박영효 등 일파의 거사는 당초부터 선생이 관여하고 듣고 계신 바이다”라고 적었다.(‘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159쪽·야스카와 주노스케) 후쿠자와 유키치는 이 기회에 메이지 덴노(明治天皇)가 직접 일본군을 지휘하여 청나라와 결전을 벌여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그리고 1885년 1월에는 임오군란과 갑신정변에 이어 “세 번째의 조선사변이 있을 것임을 오늘 예상한다”며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예언하는 듯한 사설을 적고 있다.(‘후쿠자와 유키치의 아시아 침략사상을 묻는다’ 162쪽) 19세기 말의 유라시아 동해안은 ‘조선대전쟁’의 혼란에 휘말렸으며 그 끝에 조선의 멸망이 있었다.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와세다대학 도서관에 감사드린다.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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