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 지난 2004~2005년 발굴한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촌에 있는 발해 고분군 유적.
중국이 지난 2004~2005년 발굴한 지린성 허룽시 룽하이촌에 있는 발해 고분군 유적.

1. 지난호에 동북공정과 간도에 대해 살펴보았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한 마디로 고구려와 발해가 중국 역사라는 것으로 한민족으로서는 수용할 수 없는 내용이었다. 중국은 926년 발해 멸망 이후 1870년 한민족의 간도 개척 전까지 근 1000년간 한민족의 활동무대가 압록강과 두만강 이남 지역에 국한되어 있었다는 사실을 근거로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가 될 수 없다고 주장했다. 발해가 한민족이 세운 국가라면 발해 멸망 이후에도 한민족이 계속 거주하며 생활했어야 하는데 역사적으로 전혀 그런 근거가 없다는 것이다.

일리가 있는 주장이다. 사람은 땅에 붙어사는 법,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이 태어나고 자라온 땅에서 삶을 영위하는 것이 정상적이다. 발해가 한민족의 나라라면 발해 멸망 이후에도 한민족이 토착세력으로서 이 지역에 계속 거주하며 명맥을 이어나가야 맞다. 그런데 역사에는 그런 기록이 없다. 도대체 그 이유가 무엇일까.

2. 5경15부62주의 대제국으로서 해동성국이라 불렸던 발해가 멸망한 역사는 허망하기 짝이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내용은 대체로 다음과 같다.

발해가 제10대 선왕 이후 점차 쇠퇴의 기미를 보이는 동안 랴오허강 상류지대와 동몽골 지역을 발판으로 성장하던 거란은 9세기 후반부터 발해의 요동 지배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916년 거란의 여러 부족을 통일한 야율아보기(耶律阿保機)는 중원으로의 진출에 앞서 배후를 위협할 수 있는 발해에 대한 공격에 나섰다. 발해는 925년 12월 말부터 다음해 1월 초에 걸친 거란의 대대적인 공격을 맞아 별다른 저항도 해보지 못하고 1월 14일 수도가 함락됨으로써 멸망했다. 발해가 멸망한 원인에 대해서는 구체적으로 밝혀지지 않았으나 당시 내부 분열이 심해 효과적인 대응이 어려웠던 것 같다. 거란은 발해의 옛 땅에 동단국(東丹國)을 세워 거란 태조의 맏아들로 하여금 다스리게 했다. 그러나 발해 유민의 부흥운동이 전개되기 시작하자 928년 유민들을 요동으로 강제이주시키고 동단국도 동평(東平·금의 遼陽)으로 옮겼다. 발해 유민들은 12세기 초까지 200여년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출처 브리태니커)

해동성국이었던 발해는 거란이 침입하자 불과 보름 만에 수도가 함락되었다. 698년 대조영이 당시 계루부(桂婁部)의 옛 땅으로 일컬어지던 지린성(吉林省) 둔화현(敦化縣) 육정산(六頂山) 근처에 성을 쌓고 나라를 세운 지 230여년 만의 일이었다. 아무리 내부 분열이 심했다고 하더라도 너무 단기간이다. 또 거란이 발해의 수도에 세웠다는 동단국은 2년 만에 요양으로 천도해 버린다. 어렵게 정복한 지역을 2년 만에 버리고 후퇴한다는 것도 납득하기 어려운 이야기이다. 부흥운동이 심해서였다고 하는데 내부 분열이 심해 보름도 안 돼 무너진 나라가 부흥운동이라니?

3.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라고 하기 위해서는 발해 멸망 이후에도 이 지역에 한민족이 거주했어야 정상이다. 그런데 이후 역사는 전혀 그렇지 않다. 홀한국이 요양으로 천도할 때 발해의 유민들을 깡그리 포로로 잡아갔기 때문일까. 부흥운동이 강력했기 때문에 쫓기듯이 요양으로 가버린 홀한국이 발해의 유민들을 모두 데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브리태니커는 발해 유민들이 12세기 초까지 200여년간 곳곳에서 활동했으며 상당수는 1117년까지 30여차례에 걸쳐 고려에 망명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도 의문이다. 홀한국 천도로 외부 세력이 사라졌다면 토착세력에는 기회다. 다시 체제를 정비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그런데 이들은 고향을 버리고 대거 고려로 망명했다고 한다. 사람은 특별한 사유가 없는 한 자신이 나고 자란 땅에 붙어 사는 것이 정상적이다. 발해 유민들이 고향을 버리고 고려로 망명한 이유가 무엇일까.

4. 발해가 멸망하고 수백 년이 흐른 뒤 이 지역은 여진족의 터전이 되어 있었다. 1115년 아골타가 금나라를 세웠고, 1616년 누르하치가 후금을 세워 맹위를 떨쳤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이 부분을 파고들어 발해 또한 여진족, 즉 말갈족이 세운 나라라고 주장한다. 아울러 대조영도 고구려의 후예가 아니라 말갈족의 수장이었다고 한다. 발해 멸망 이후 이 지역이 한민족이 아닌 여진족의 터전이었다는 사실은 이러한 주장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

이에 대해 아골타가 신라의 후예이기 때문에 금나라도 결국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반론이 있다. 누르하치의 성이 애신각라(愛新覺羅)로서 김(金)씨와 같다는 주장도 같은 맥락이다. 하지만 설사 이것이 사실이라 해도 여진족과 한민족을 같은 민족으로 보기는 어렵다.

민족이란 ‘일정한 지역에서 오랜 세월 동안 공동생활을 하면서 언어와 문화상의 공통성에 기초하여 역사적으로 형성된 사회집단’으로 정의된다. 여진족과 한민족은 언어가 다르며 생활양식도 다르다. 동족이라는 공동체의식도 없다. 설사 뿌리가 같다 하더라도 오랜 세월을 거치며 완전히 다른 집단이 되어 버린 것이다.

유럽인과 중동인, 아프리카인이 노아의 세 아들에서 비롯된 것으로 결국 같은 뿌리라고 하더라도 오늘날 이들을 같은 민족이라고 볼 수 없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후금과 조선 사이의 끔찍했던 정묘호란과 병자호란을 생각해 보라.

5. 발해가 한민족의 역사임을 증명해 내지 못한다면 고구려 또한 중국 역사로 치부될 가능성이 커질 수밖에 없다. 동북공정은 고구려족이 중국의 소수민족으로서 상(商)인의 후예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발해가 여진족의 역사였던 것처럼 같은 지역에서 번성했던 고구려 역시 토착세력인 여진족이 주축이 된 국가라는 주장이 제기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은 동북공정이 종국적으로 ‘고구려-발해-금-후금-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중국 소수민족의 하나인 여진족의 역사라는 결론을 예정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품게 만든다.

만약 만주족(여진족)이 하나의 세력을 형성하여 동북아시아의 역사의 주인이 여진족이라면서 고구려-발해-금-후금-청으로 이어지는 역사가 한족(漢族)도 한민족(韓民族)도 아닌 바로 여진족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온다면 어떻게 될까.

만주어를 쓰며 금과 후금을 세워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했던 여진족이 독자세력화하여 고구려와 발해가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고 나온다는 것이다. 여진족이 요동과 만주, 간도, 연해주의 토착세력이라고 한다면 이를 부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6. 이에 우리는 1000년의 수수께끼를 풀어야만 한다. 발해 멸망 이후 1870년 한민족의 간도 개척 이전까지 한민족이 북방 영토를 내버려둔 이유를 규명해내야 한다는 말이다. 이와 관련하여 최근 백두산 화산폭발설이 각광받고 있다. 백두산 화산 폭발과 발해의 멸망 원인을 규명하는 다양한 다큐멘터리 프로그램이 제작 방영되면서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고 1000년 동안 한민족이 북방 영토를 방치한 이유가 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는 것이다.

상당히 매력적인 내용이다. 하지만 한·중·일 삼국 역사서 어디에도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다는 기록은 없다. 심지어 10세기 초반 백두산이 폭발했다는 기록조차 전무하다. 그러면 백두산 화산폭발설은 허무맹랑한 것일까. 이에 대해 백두산 화산폭발설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비록 인간의 기록은 없을지라도 명확한 자연의 기록이 존재한다고 주장한다. 정말 백두산이 폭발하였다면 자연의 기록이 남아 있을 것이다.

AD 79년 이탈리아 폼페이에 있는 베수비오 화산이 폭발하면서 일대 도시들이 화산재에 매몰되어 버렸다. 로마가 번성하던 시절이었지만 로마의 역사서에는 베수비오 화산 폭발에 대한 기록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자연은 베수비오 화산이 덮어버린 도시들을 온전히 품고 있었고 1700여년 뒤 그 사실을 인간들에게 가르쳐 주었다.

7. 화산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폭발은 930~946년에 발생했으며 화산폭발지수 7.4로 지난 2000년간 지상 최대의 화산폭발로 추정되고 있다. 화산폭발지수(火山爆發指数·Volcanic Explosivity Index·VEI)는 1982년 미국지질연구소의 크리스토퍼 뉴홀(Christopher G. Newhall)과 하와이대학의 스티븐 셀프(Stephen Self)가 제안한 지수로 화산의 폭발력을 나타내는 지수이다. 이것은 화산 자체의 크기가 아니라 폭발의 크기를 보여주는 지표로서 구분의 기준은 화산 분출물의 양이다. 0부터 8까지 등급이 매겨지는데, 지수가 한 단계 올라갈 때마다 화산 분출물의 양은 10배가 된다.

1980년 5월 18일 미국 오리건주 세인트헬렌스 화산 폭발은 화산폭발지수 5에 해당한다. 화산 폭발로 인해 폐허가 되어 버린 세인트헬렌스 주변 지역은 34년이 지난 현재 겨우 잡풀들이 자라나기 시작했다. 백두산 화산폭발지수가 7.4라는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이 세인트 헬렌스 화산 폭발보다 400배 더 많은 화산 분출물을 뿜어 냈다는 것을 의미한다. 폼페이시를 6m 두께의 화산재로 덮어버린 베수비오 화산 폭발도 화산폭발지수 5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2010년 4월 유럽의 항공대란을 초래했던 아이슬란드 에이야프야틀라이외쿠틀 화산 폭발은 화산폭발지수 4의 소규모 화산 폭발이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밝혀지기 전까지 세계 최대 화산 폭발은 1815년 인도네시아 탐보라 화산 폭발로 알려져 있었다. 이 폭발도 규모가 어마어마해서 화산재가 지구 전체를 떠돌아 유럽에 미니 빙하기와 대기근을 초래했다고 하는데 화산폭발지수 7.1의 규모였다.

8. 백두산 화산이 10세기경 거대 폭발을 일으켰다는 사실이 처음 우리에게 알려진 것은 1980년이었고, 백두산 화산 폭발이 발해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리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은 1992년의 일로 불과 20여년 전이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은 백두산 화산재가 발단이 되어 밝혀졌다. 1981년 일본 도쿄도립대학의 마치다 히로시(町田洋) 교수에 의하여 백두산 화산재가 처음 발견되어 학계에 보고되었는데 그는 홋카이도 남쪽 항구도시인 도마코마이에서 일본의 다른 화산재를 연구하다가 우연히 백두산 화산재를 발견하였다. 백두산에서 홋카이도까지는 1000㎞가 넘는다. 백두산 화산재가 겨울철 편서풍을 타고 동쪽으로 멀리멀리 일본까지 날아간 것이다. 1000㎞ 떨어진 일본에 화산재가 2㎝ 이상 피복되었다는 것은 백두산 화산 폭발 규모가 엄청났다는 것을 방증하는 것이다.

화산재는 화산마다 구성 성분이 다르다고 한다. 일본은 1970년경부터 동해 해저를 시추해 왔기 때문에 해양학 연구자들은 해저주상시료를 가지고 있었다. 이 화산재와 동일한 성분의 화산재가 주상 시료에 포함되어 있었는데, 일본에서 한반도 북부 쪽으로 갈수록 점점 그 두께와 입자 크기가 증가했다. 추적 결과 그 발원지는 바로 백두산이었다.

9.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를 규명하기 위해 과학적인 여러 가지 방법이 동원되었다. 일본 나고야대학의 나카무라 교수팀이 백두산에서 6개의 탄화목을 채집하여 측정한 결과 폭발 연대가 934±6년, 936+8/-6년이었다. 특히 이 탄화목들은 겨울철에 매몰된 것으로 판명되었다.

백두산 화산 폭발 시기에 대한 또 다른 단서는 일본 아오모리현에서 발견되었다. 국분사 화산재 퇴적물 하층에서 국분사 지진 재해 수리에 사용된 기와가 출토되었는데 문서에 의하면 기와층의 연대가 870년경이었다. 또 화산재 퇴적물 상부에서 불 탄 기둥이 출토되었는데 그것은 국분사의 칠층탑이 소실된 934년 사건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이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재는 870년부터 934년 사이에 퇴적된 것이 된다.

10. 화산이 폭발하게 되면 1차적으로 용암류, 화산재의 낙하 등 화성쇄설 활동, 화쇄류, 측방 폭발 그리고 화산가스의 분출 등 재해가 발생하고, 2차적으로 암설류, 이류, 산사태나 암설 아발란체, 홍수, 화재, 쓰나미, 대기권의 전 세계적인 냉각현상을 유발하게 된다. 이로 인한 피해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이다.

1983년 이후 하와이제도의 킬라웨어 화산은 현무암질 용암류를 분출하였는데 200채의 가옥이 파괴되었고 해안 고속도로가 거의 단절되었다. 2002년 1월 콩고 니라공고 화산에서 괴상용암류가 분화하였는데 고마시가 완전히 파괴되고 용암이 시를 관통해 30만명이 대피했다. 1982년 인도네시아 자바섬의 갈룽궁 화산은 68명의 인명을 앗아갔다. 최근에는 2014년 9월 27일 일본 온타케산(御嶽山) 화산 분화로 수십 명의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 바 있다.

화산 폭발에서 가장 치명적인 것이 화산쇄설류라고 한다. 이것은 화산재 폭풍 같은 것으로 시속 160∼240㎞의 매우 빠른 속도로 움직이기 때문에 순식간에 주변에 살아 있는 모든 것을 삼켜버린다. 온도가 800도에 달하기 때문에 이것에 닿는 생명체는 살아남을 수 없다.

1902년 5월 8일 아침 카리브해의 마르티니크섬에서 뜨겁고 끓어 오르는 듯한 화산재와 증기, 가스들이 굉음을 내며 프레산 아래의 성 피에르 마을을 덮쳤고 3만여명의 인명 피해를 남겼다. 두 명의 생존자 중 한 명은 감옥에 갇힌 죄수였고 다른 한 명은 건물 안으로 뛰어들어간 구두수선공이었는데 모두 끔찍한 화상을 입었다고 한다.

1980년 5월 18일 오전 8시32분 세인트헬렌스 화산은 대략 직경 2.3㎞의 거대한 산사태와 암설류를 유발하는 규모 5.1의 지진을 기록했고 직경 2m의 나무들이 화산으로부터 24㎞ 거리까지 베어져 날아갔다. 폭발의 영향은 근원지로부터 거의 30㎞까지 느껴졌고 폭발은 반경 600㎢를 황폐화시켰다. 화산폭발지수 5의 규모였다. 2014년 상반기에 개봉 상영된 ‘폼페이 최후의 날’이라는 영화를 보면 흑갈색 화산재 폭풍이 사람들을 집어삼키는 영상이 등장한다. 또 이탈리아 폼페이 유적지에 가보면 이 화쇄류에 의해 순식간에 희생되어 버린 희생자들의 화석을 볼 수 있다.

11. 특히 백두산 화산 폭발은 겨울철에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백두산 화산재가 1000㎞나 떨어진 일본 홋카이도까지 날아간 것은 편서풍이 부는 겨울에나 가능한 일이다. 탄화목들의 상태 또한 백두산 화산 폭발이 겨울에 일어났다는 점을 증명해 준다. 백두산이 겨울에 폭발했다는 것은 재앙의 정도가 훨씬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화성쇄설류에 의한 엄청난 피해가 발생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1985년 콜롬비아의 네바도 델 루이스 화산이 분화하는 동안 만년설이 녹을 때 발생한 거대한 이류가 발생하였다. 물이 경사면 위에서 화산재와 결합하여 젖은 슬러리를 형성하였고 중력에 의하여 아래쪽으로 빠르게 이동했다. 화산이류는 강 주변 마을을 묻어 버렸고 2만3000명의 사망자를 발생시켰다. 1990년 초 알래스카 리다우트 화산에서의 화성쇄설류가 드리프트 빙하를 가로질러 이동하였는데 눈과 얼음을 녹여 엄청난 양의 혼합물을 만들어 냈다고 한다.

백두산 화산 폭발 또한 겨울에 일어났기 때문에 눈과 얼음을 녹여 엄청난 양의 라하르를 만들어 냈고 이것이 인근 지역에 큰 재앙을 초래했을 것이다. 뜨거운 화쇄류가 산 정상에 있는 수억톤의 눈을 녹여 화산 이류를 만들어냈을 것이고 이것이 마치 해일처럼 산사면을 돌진해 내려갔을 것이다. 계곡을 따라 압록강과 두만강, 송화강 쪽으로 쏟아진 화산 이류는 수계를 따라 형성된 촌락을 차례차례 매몰시키며 하류에 대홍수를 일으켰을 것이다.

12. 조선은 목극등의 명에 따라 백두산정계비터에서 목극등이 지정한 물줄기를 따라 석퇴와 토퇴, 목퇴를 설치하였다. 이 경계선은 대각봉 쪽으로 이어지는데 대각봉계선 해발 2100m 지점에 조면암으로 된 자연갱도가 발달되어 있다고 한다. 길이가 72m 정도 되는데 이것이 바로 토문이라고 한다. 조면암은 화산 분출 시에 형성되는 화성암의 하나로서 주로 알칼리성 용암이 분출될 때 형성되는 비현정질의 화산암이다.

간도파출소장 사이토 스에지로는 1907년 10월 18일 이토 히로부미에게 ‘토문강 답사보고서’를 제출했는데, 이것이 ‘간도영유권 발췌문서’에 수록되어 있다.

석퇴의 끝 지점에 양쪽 높이 약 100m의 단애가 있는데 소위 토문이라 칭하는 것이 이것인 것 같다. 하천의 형상을 따라 울창한 대삼림 속으로 달려 약 4리를 더 가니 방향을 북으로 돌린다.

토문에서 약 3리 정도는 큰 돌이 여기저기 떨어져 있는 조약돌천이며 거기서부터는 모래천이 된다.… 방향을 북으로 돌리고 나서는 약 18리를 지나 낭낭고 부근에 이르러 다시 방향을 서로 돌려 소사하를 거쳐 송화강으로 들어간다.

토문은 병풍처럼 드리워진 검은 절벽 지형이다. 석벽이 아니라 토벽이기 때문에 토문이라 이름 붙여진 것이다. 백두산에서 흘러내린 물은 토문강을 지나 오도백하로 흘러들어간다고 한다. 중국인들은 토문강을 흑석하라고 부른다.

13. 연구 결과에 의하면 백두산 화산 폭발은 한 차례의 폭발로 끝난 것이 아니었다. 9세기에도 폭발이 있었고 10세기 대폭발도 한 번이 아니라 여러 차례였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시기가 조금씩 다른 결과가 도출되기도 하는 이유이다. 9세기부터 소규모 폭발 등 대폭발의 조짐이 있었다면 발해 국민들의 민심 이반이 초래되었을 것이 자명하다. 다음호에는 10세기 백두산 화산 폭발이 간도의 영유권과 관련하여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본격적으로 살펴보기로 한다.

강정민 변호사·‘간도반환청구소송’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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