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던 사찰 박문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바쳐진 박문사 절에서 발행한 기념엽서. 김시덕
오늘날 신라호텔 자리에 있었던 사찰 박문사. 이토 히로부미에게 바쳐진 박문사 절에서 발행한 기념엽서. 김시덕

일본이 러시아를 기습공격한 직후인 1904년 2월 9일, 주한 일본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는 조선 측에 일본과의 군사동맹 체결을 요구했다. 당시 조선은 전시 중립을 선언한 상태였지만, 스스로를 지킬 수 없는 국가가 타국의 선의를 기대하며 선언한 중립은 무의미했다. 러시아 역시 자국이 유라시아 동부 지역에서 충분한 힘을 가질 때까지는 조선이 일본과의 완충지대로서 독립해 있기를 기대했지만, 조선이 독립을 지킬 수 있도록 원조를 할 처지는 아니었다. 서울에 수만 명의 일본군이 주둔해 있던 2월 23일, 일본은 조선 측에 ‘한일의정서’ 조인을 강요하는 데 성공하여 러시아와의 전쟁을 위해 조선을 이용할 수 있는 명분을 확보했다. 뒤이어 같은 해 8월 22일에는 제1차 한·일협약을 체결하여 대한제국 정부에 일본이 지명한 고문단을 파견할 수 있게 했고, 1905년 11월 17일에는 대한제국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제2차 한·일협약(일명 을사늑약)을 체결하여 사실상 한반도를 일본의 일부로서 합병했다. 메이지 일본이 한반도를 영향권에 넣고자 수십 년간 추진해 온 사업이 이로써 완료되었다.

메이지유신 이래 정부의 실질적인 지도자로서 일본의 점진적 서구화를 이끌어 온 이토 히로부미는, ‘조선 문제’의 해결에서도 자신의 경험을 살리고자 통감 취임을 자청했다. 그는 조선을 일본의 영향권 안에 두고 서구 국가들과 청나라가 일본의 이 우선권을 침해하게 하면 안 된다는 점에서는 일본의 다른 인사들과 같은 입장이었으나, 조선의 즉각적인 병합 및 만주 침략을 주장하는 군부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조선 문제’의 처리에 신중한 입장이었다. 일본이 조선을 보호국화하는 것을 서구 열강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상태였고,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뒤 섣불리 요동반도 할양을 요구했다가 열강의 개입을 초래한 경험도 있기 때문이다.(‘일제 침략과 대한제국의 종말’ 37쪽·서영희) 그러나 1909년 3월에 일본 정부가 조선 ‘병합’을 정식으로 결정하자, 역사의 흐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이에 순응하면서 자신의 의도에 맞게 개량하는 타입인 이토 히로부미는 4월에 조선 ‘병합’에 찬성한다.(‘伊藤博文’ 340쪽·瀧井一博) 따라서 이해 10월 그가 하얼빈에서 안중근에게 살해되었기 때문에 일본의 조선 ‘병합’이 앞당겨졌다는 일각의 주장은 성립되지 않는다.

훗날 조선총독부는 고종시대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장충단을 공원으로 바꾸고, 이를 내려보는 위치인 현재의 신라호텔 자리에 이토 히로부미를 추도하는 박문사(博文寺)라는 절을 세웠다. 그리고 안중근이 사형된 뒤 떠돌고 있던 안중근의 아들 안준생을 이곳으로 불러 이토 히로부미의 아들과 만나게 해, 아버지의 ‘죄’를 사과하고 ‘내선일체’를 상징하는 퍼포먼스를 벌였다.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시설을 신사(神社)가 아닌 사찰로 지은 것 역시, 그들 나름대로는 조선인들의 감정을 배려하고 친근감을 주기 위해서였다는 주장도 있다.

20세기 전반의 식민지 시대에는 이토 히로부미를 모신 박문사를 비롯하여, 식민지 조선을 정신적으로 지배하는 상징으로서의 조선신궁(朝鮮神宮), 조선의 행정 중심지인 경성을 종교적으로 구현한 경성신사(京城神社), 러일전쟁 당시 뤼순을 함락시켰으며 메이지 덴노가 사망하자 할복자살한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를 모신 노기 신사, 남산 일대에 거주하는 일본인들을 위해 남산 기슭에 조성한 한양공원(漢陽公園), 조선 출신 일본군의 혼령을 모시고자 용산의 일본군 기지와 남산 사이에 조성한 경성호국신사(京城護國神社) 등이 남산 일대에 조성되었다. 이들 시설은 조선을 강제 병합한 일본이 조선의 저항을 상징적으로 제어하기 위해 설정한 일종의 ‘신성 공간’이었다.

1905년 11월 17일에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민영환·조병세·홍만식·이상철·이한응 등의 고위 관료들이 잇달아 자살하고, 조선에 와 있던 일본인 니시자카 유타카(西坂豊)와 청국인 반종례(潘宗禮)도 각기 자국의 반성을 촉구하며 자살했다. 조선은 자국의 속국이므로 외국에 대사를 파견하면 안 된다는 청국의 압박을 이겨내고 초대 주미대사로 파견된 바 있는 박정양은 조약 체결 직전에 죽었다. 또한 1907년에 군대가 해산되자 박승환 대대장이 자결했고, 초대 주러시아 공사였던 이범진은 1910년의 경술국치 이듬해인 1911년에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자살했다.

이처럼 망국의 책임을 지고 목숨을 끊은 관료들이 있었던 한편, 목숨을 걸고 일본과 싸우는 이들도 많았다. 1895년의 을미사변 이후 발생한 항일 의병은 1905년의 을사늑약 이후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평민 출신 신돌석은 이인영의 연합 의병 13도 창의군에 경상도 대표로 참가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 ‘태백산 호랑이’라 불렸다. 유인석은 한반도 남부에서 전투를 전개하다가 러시아 연해주로 망명하여 ‘13도 의군(十三道義軍)’을 조직했다. 일본군이 한반도 남부에서 이른바 ‘남한폭도 대토벌 작전(南韓暴徒大討伐作戰)’을 전개하는 등 압박을 가하자, 조선 독립전쟁 세력은 함경도 노비 출신의 거상(巨商) 최재형 등이 독립전쟁 세력을 지도·후원하고 있던 러시아의 연해주 등 국외로 망명했다. 일본 육군사관학교에서 군사학을 배운 김경천 역시 독립전쟁을 위해 연해주로 망명하였다가 이곳에서 러시아혁명에 휘말려 옥사(獄死)한다. 당시 일본군은 자신들이 전투를 벌인 조선 의병의 수를 14만1603명, 자신들이 죽인 의병 수를 1만7688명으로 추산했다.(‘日淸·日露戰爭’ 229쪽·原田敬一) 이처럼 망국을 앞둔 조선에서는 수많은 사람이 목숨을 걸고 일본에 맞섰으며, 이 시기의 조선 민관 모두가 비겁한 것은 아니었다.

이 시기의 조선인들은 타국의 간섭에 맞서 국가를 통일한 외국 영웅들의 이야기를 즐겨 읽었다.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전쟁을 지휘한 미국의 워싱턴, 이탈리아의 통일을 이끈 마치니·가리발디·카보우르가 그 주인공이었다. 폴란드·베트남 등의 망국사 역시 동병상련의 대상이었다. 이처럼 많은 조선인들이 자국을 통일한 외국 영웅을 이야기하고 다른 나라의 망국을 슬펴하는 가운데, 조선 정부의 공식 유학생으로 일본에 건너간 김경천은 도쿄 진보초의 고서점에서 일본어로 된 나폴레옹 전기를 읽고는 ‘정신에 일대 변동’을 일으켜 군인이 되기로 결심하고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한다.(‘경천아일록’ 51쪽·김병학 역) 메이지 정부 수립 전후의 일본인의 경우, 조선인과 마찬가지로 미국의 독립 영웅 워싱턴의 이야기를 읽으며 서구 열강으로부터의 자립을 꿈꾸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일본인은 나폴레옹의 일대기인 ‘나폴레옹전(那波列翁傳)’을 네덜란드어에서 번역하여 열독하는 등, 프랑스를 일대 제국으로 이끈 나폴레옹을 19세기 중기 이래로 좋아했다.(‘江戶 のナポレオン傳說’·岩下哲典, ‘日本におけるナポレオンの人気 と理解’·立川京一) 그리고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나폴레옹과 동급의 정복 영웅이라고 찬미하며 아시아 침략의 상징으로 받들었다. ‘통속 나폴레옹 군기(通俗那波列翁軍記)’라는 전기를 쓴 스기야마 도지로(杉山藤次郞)의 경우,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임진왜란 당시 일본에 머무르지 않고 대륙으로 건너와 세계를 정복하고 지옥까지 쳐들어갔다는 내용의 가상 역사소설 ‘가년위업 도요토미 재흥기(假年偉業/ 豊臣再興記)’를 출판하기도 했다. 이처럼 조선과 달리 당시 일본에서는 제국 건설을 지향한 나폴레옹이 외국의 영웅으로서 인기를 끌었으며, 나폴레옹과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견주어 조선 병합을 정당화했다. 초대 조선총독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는 취임식 밤, “고바야카와 다카카게, 가토 기요마사, 고니시 유키나가가 살아 있었다면 이 밤의 달을 보며 어떤 생각을 할까(小早川·加藤·小西が世にあらば今宵の月をいかに見るらん)”라는 시를 읊기도 했다. 류성룡의 임진왜란 관련 기록인 ‘징비록’도 이 시기에 일본에서 여러 차례 출판되었다. 일본인들은 ‘징비록’을 읽으며, 임진왜란 때 조선을 정복하는 데 실패한 것을 ‘반성’하고 이번에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각오’를 한 것이다.

남산의 통감부 터 옆의 공터에 버려져 있는 주한 조선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기단석. 이 지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중앙정보부 부지였기에 이런 형태로 잊혀진 채 잔존하였다. ⓒphoto 김시덕
남산의 통감부 터 옆의 공터에 버려져 있는 주한 조선공사 하야시 곤스케 동상의 기단석. 이 지역은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었던 중앙정보부 부지였기에 이런 형태로 잊혀진 채 잔존하였다. ⓒphoto 김시덕

이처럼 비상한 각오를 하고 달려든 일본의 침략 의도를, 당시 열강들과 맞설 만한 실력을 미처 갖추지 못한 조선이 저지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주일 러시아공사 로젠은 일본이 ‘한반도 진출을 역사적 사명으로 인식하고’ 있다고 러시아 당국에 보고한 바 있으며(‘제정 러시아의 한반도 정책, 1891~1907’ 33쪽·최덕규), 그러한 일본 측 주장의 배경에 임진왜란이 있음을 당시 서구의 관찰자들은 누누이 기록했다. 이처럼 자국의 ‘고유한’ 이익권으로 간주한 조선을 다른 열강으로부터 지키기 위해서는 전쟁도 불사하리라는 것을, 러일전쟁 당시의 러시아군 사령관인 쿠로파트킨은 이미 전쟁 전에 예견한 바 있다. “우리는 조선 문제에 있어서 매우 신중해야 한다. 러시아가 조선을 합병할 필요까지는 없으나, 어떠한 구실로도 그곳에 강력한 일본 또는 여타 열강이 세워지는 것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 최선의 방안은 조선이 독립 상태를 유지하는 것이다. 비록 조선이 약하다고 하나 우리가 보호를 해주면 독립 상태를 유지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에 즉각 보호령을 세우기 위해서는 막대한 지출을 해야 하고 더욱이 분쟁에 휩싸이고 대 일본전까지 치를 수도 있을 것이다.”(‘러일전쟁’ 78쪽·심국웅 역, 최정현 수정)

이처럼 한 열강이 집요하게 어떤 지역을 식민지화하고자 할 경우, ‘약육강식’이라는 개념이 식민지와 피식민지 국민 모두에게 상식으로 받아들여지던 당시에는 그 의도를 저지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동남아시아사 연구자 최병욱은 같은 시기에 베트남·버마가 유럽 열강의 식민지가 되고 태국만이 독립을 지킨 원인 역시 이상과 같은 ‘외세의 의도’였다고 분석한다.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강한 국가(powerful states)’들 중 어느 나라가 식민화되고 어느 나라가 독립을 유지했는가 하는 것은 해당 국가에 접근한 서양 제국들의 의도에 달린 것이었다. 왕실을 비롯한 지배층의 대응 노력이 얼마나 효율적이었느냐의 차이도 분명 있을 수 있지만, 더 중요한 것은 외세의 의도였다. 베트남과 버마에 대해서는 프랑스와 영국이 분명한 점령 의도를 가지고 있었고, 태국에 대해서는 영국이나 프랑스가 전쟁이라는 손실을 감수하면서까지도 차지해야 할 매력을 찾아내지 못했다. 이 ‘외세’의 의도에 따라 내부의 대응 능력도 다르게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아시아에서 일본이나 태국이 독립을 유지하고 아울러 자발적 개혁으로 근대화를 이룬 것은, 미국이나 영국, 그리고 프랑스가 이 두 나라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점령 의도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과 관련 있는 것이다. 외세의 점령 의도에서 비교적 자유로울 때 내적 대응은 여유롭게 진행될 수 있으며 성공한 정책이 부각되기 마련이다. 반대로 상대의 점령 의도가 명백할 때 해당 국가 내부의 각종 대응은 허둥댈 수밖에 없었으며, 국권 상실이라는 결과 앞에 제반 개혁 정책은 실패로 낙인찍힐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는 중국 배후 시장으로의 진출이 필요했으며 그 통로로 베트남이나 캄보디아, 라오스를 통한 메콩의 확보가 필요했고, 영국은 같은 이유로 버마를 거치는 배타적 육상로를 확보하고 싶었던 것이다. 반면에 중국과 국경을 접하지 않은 태국은 영국, 프랑스로부터 비교적 자유로울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국권을 상실했느냐 아니면 독립을 유지했느냐를 가지고 19세기 각국의 대응 방식이 성공적이었느냐 실패였느냐를 평가하기에 부족하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이런 결과론적인 평가는 해당 국가나 지역, 그리고 인류 사회의 과거와 현재를 인식하고 미래를 통찰하는 데 별로 도움이 되지도 못한다. 우리는 국권의 상실 여부만 놓고 19세기 대륙부 동남아시아 국가들 중에 태국이 버마나 베트남에 비해서, 그리고 캄보디아와 라오스에 비해서 뛰어난 나라였다고 할 수 없다. 베트남으로부터 버마에 이르기까지 대륙부 동남아시아의 국가들은 자신들의 방식대로 발전하고 변화해가고 있었고 지도자들의 노력 또한 컸다.”(‘동남아시아사-전통시대’ 285~286쪽) 식민지가 되지 않기 위해 각국이 노력해야 했음은 물론이지만, 그러한 자강 노력을 초월한 약육강식의 무한 투쟁이 당시 전개되고 있었음을 간과한다면 이 시기의 역사를 이해할 수 없다.

최근 출판된 ‘한국 근대 형사재판제도사’의 서문에서 도면회 역시 조선의 멸망에 대해 비슷한 문제의식을 보인다. 조선의 자강 노력이 내부 모순으로 좌절되고, 그 틈을 노려 일본 측이 민심을 얻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연구를 시작할 당시, 나는) 한국의 일본 식민지화가 일제의 침략 야욕과 압도적 군사력 때문이었다는 답처럼 유치한 역사 서술은 없다고 생각했다. 대한제국의 황제와 고위 관료, 한때 2만여명에 달했던 한국군은 어찌하여 총 한 방 제대로 쏘지 못한 채 권력을 빼앗기거나 무장 해제를 당했단 말인가? 국가의 멸망을 앞에 두고 어찌하여 양반 유생층 일부만이 의병 투쟁에 나섰을까? 전국적 항쟁은 왜 일어나지 않았을까? (중략) 갑오개혁으로 도입된 근대적 재판제도의 운영 상황을 정리한 결과, 식민지화 이전 한국의 재판제도가 조선 후기와 다를 바 없이 민중 수탈의 도구였다는 점, 이토 히로부미가 통감 부임 후 한국 재판제도의 ‘개혁’에 가장 공력을 기울였던 이유가 한국 민중의 환심을 사서 종국적으로 한국을 병탄하려는 데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중략) 독립협회 운동 좌절 이후 1905년경까지의 한국 사회는 중앙 정부와 지방관의 수탈로 인해 민중의 불만이 쌓여 여차하면 정변이나 혁명이 일어날 것 같은 분위기였다. 안타깝게도 그러한 민중의 에너지를 새로운 정치 권력 수립으로 전환시켜줄 세력은 없었다. 1906년 이후 일본의 통감부 설치와 그에 뒤이은 한국 병합은 군사적 강점에 기초한 침략 행위지만, 어찌보면 이러한 한국 민중의 고통과 개혁 열망에 편승한 침략이었다. 갑오개혁기에 이루어진 근대적 개혁 조치들이 아관파천 이후 폐기 또는 수정되었으나 일본의 통감부 설치 이후 다시 복원되고 더욱 강력한 힘으로 시행되면서 한국민들로 하여금 일말의 기대를 걸게 했기 때문이다.”(7~9쪽)

멸망 당시 조선 조정에 문제가 산적해 있었음은 사실이지만, 조선인들이 이를 해결하고자 노력한 것 역시 사실이다. 청일전쟁 당시 일본의 외무대신이었던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 정부는 당파 간의 알력이 심하여 모든 내정 개혁의 사업이 방치됐고, 내외의 여망에 부응하질 못했다. 그러면서도 어느 정도까지는 개혁사업을 실행하려고 기도한 것도 사실이었다”(‘건건록’ 160쪽·김승일 역)고 회고한다. 이처럼 조선의 민관은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했으나, 국제적인 관계 속에서 역부족으로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500년을 유지했다는 사실이 조선이 위대했다는 주장의 증거가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조선이 멸망했다는 사실이 조선인들을 폄하하는 증거가 될 수도 없다. 이 시기에 한반도와 연해주의 조선인들을 널리 만난 바 있는 비솝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이른바 ‘민족성’이라는 개념을 주장하는 사람들에 대해 효과적인 반론이 될 수 있을 논평이다. “여행자들은 조선 사람들이 게으르다는 인상을 많이 받았으나 러시아와 만주에 이주한 조선 사람들의 활력과 인내를 보고, 그들이 집을 치장하거나 그들의 번영한 모습을 보고 난 후에 나는 조선 사람의 게으름을 기질의 문제로 여기는 것이 잘못되었다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조선에 있는 모든 남자들은 가난이 최고의 보신책이며 가족과 자신을 위한 음식과 옷을 필요 이상으로 소유한다는 것은 탐욕적이고 타락한 관리에게 노출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조선과 그 이웃 나라들’ 328쪽) 이처럼 조선 정부의 문제를 비판하고 조선인의 가능성을 긍정하는 견해를, 1895년에 조선을 탐사한 러시아인 루벤초프로부터도 들을 수 있다. “많은 이들은 조선인이 게으르다고 비난하지만 블라디보스토크나 남우수리 지방 근처의 조선인 정착지들의 생기 있는 상황을 보면 그와 반대임을 알 수 있다. 바로 1860년대 건강한 손과 좋은 머리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그야말로 가난에 찢긴 조선인들이 러시아 국경지대로 이주했었다. 조선 주민들의 빈곤은 주로 관할 주민들에게서 가능한 모든 것을 짜내는 수많은 관리들의 탐욕과 약탈에 기인한다.”(‘러시아의 한국 연구’ 42쪽·유리 바닌) 이러한 가능성은 이윽고 한반도 바깥에서 전개될 독립전쟁으로 현실화된다.

끝으로, 이번 회의 집필에 도움을 주신 독립기념관 김경미 선생님, 고려대 최정현 선생님, 서울대 규장각 황재문 선생님, 숭의여자대학교 박물관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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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재문 ‘안중근 평전’

이종각 ‘이토 히로부미’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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