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정부합동분향소 내에 마련된 희생자들의 영정사진.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정부합동분향소 내에 마련된 희생자들의 영정사진. ⓒphoto 이태경 조선일보 기자

2014년 4월 16일 대한민국은 끔찍한 비극과 마주했다. 인천 연안 여객터미널을 떠나 제주로 향하던 청해진해운 소속 세월호가 이날 오전 8시50분 침몰해, 배에 타고 있던 476명의 탑승객 중 172명만이 구조됐고, 304명은 끝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나마 이 중 9명은 시신조차 수습되지 못했다. 이 사건이 더욱 큰 충격을 던졌던 것은 탑승자 중 상당수인 325명이 수학여행을 가던 고등학교 2학년(안산 단원고) 학생들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배가 기울어지기 시작한 후 ‘가만히 있으라’는 선내 방송을 듣고는 대피하지 못한 채 변을 당했다.

사건이 일어난 과정은 이렇다. 세월호는 사고 당일 오전 8시30분경 전라남도 진도군 병풍도 부근 바다에서 가장 조류가 센 맹골수도에 최고속도로 진입했고, 항로를 바꾼 후 지그재그로 운행하다가 8시49분에 병풍도 부근에서 다시 급격히 항로를 바꾸어 급선회했다. 항로는 ‘J’ 자를 그리며 왔던 길을 되돌아갔다. 이후 검찰 조사를 통해 밝혀진 사실이지만 사고 당시 세월호의 화물적재량은 2143톤이었다. 세월호의 적재 가능한 화물량은 1077톤이다. 전문가들은 당시 세월호의 상황을 ‘오뚝이를 뒤집어 놓은 것과 같았다’고 표현했다. 뿐만 아니라 세월호는 계속된 증개축 공사로 인해 무게중심이 50㎝가량 올라갔으며, 이로 인해 복원성이 상당 부분 상실된 상황이었다. 화물까지 잔뜩 실은 데다 이미 복원성까지 상실한 배는 급격한 방향전환으로 인해 기울어지기 시작했고, 이틀 뒤인 4월 18일 완전히 바닷속으로 모습을 감췄다.

사고 후 정부가 보여준 무능한 모습은 국민들로 하여금 더욱 거센 분노를 불러일으켰다. 정부는 사고 직후 민관 합동으로 육·해·공 전방위 수색을 펼쳤으나 거듭된 부실 대응과 혼선으로 구조작업은 계속 지연됐다. 특히 사고 직후 ‘전원 구조’라는 잘못된 보고로 인해 구조작업이 지연되는 일도 벌어졌다. 탑승객 숫자도 477명에서 459명, 462명, 475명으로 정정을 거듭했고 나흘이 지나서야 476명이란 숫자가 나왔다. 이후에도 명단에 없는 시신이 발견되거나 시신이 뒤바뀌는 경우도 생겼다.

해경은 사고 현장에 가장 먼저 도착하고도 선내 진입에 실패했다. 현장에 출동했던 해경 경비함에는 선내 진입을 위한 요원도, 장비도 없었다. 해경은 구호 계약을 맺은 민간 잠수업체 ‘언딘’ 잠수사를 먼저 투입하려고 해군과 다른 잠수사를 제지했다는 의혹을 받기도 했다. 수색 과정에서 언딘과 다른 업체의 알력 다툼도 불거졌다.

수색요원들이 세월호 선체 내부로 진입할 수 있었던 것은 나흘이 지나서였다. 선체 유리창을 깨고 내부로 들어간 후 시신수습 작업은 가속도를 냈다. 10여일간 매일 시신이 발견됐다. 4월 29일까지 200구 넘게 가족 품으로 돌아왔다. 기자도 사고 발생 후 나흘 뒤 사고대책본부가 차려진 진도 팽목항으로 내려가 며칠간 머물며 현장 분위기를 살핀 바 있다. 시신 한 구가 돌아올 때마다 팽목항은 통곡소리로 가득했고, 가족들의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희망은 점차 절망으로 바뀌어갔다.

한 달이 지나고 선체가 무너져 내리면서 수색작업이 수포로 돌아가는 날이 늘었다. 반복된 잠수로 쌓인 피로와 스트레스가 두 잠수사의 목숨도 앗아갔다. 6월 내내 선체 내부에서 시신 3구를 수습했다. 7월 18일 식당칸에서 여성 조리사 시신을 수습한 뒤 100여일간 성과가 없자 민간 잠수업체는 철수 입장을 밝혔다. 이에 실종자 가족들은 지난 10월 27일 무기명 투표로 수색 지속을 결정했고 이틀 만에 단원고 황지현양의 시신이 수습되면서 다시 희망이 보이는 듯했다. 그러나 사고 해역의 물살이 거칠어지고 수온도 급격히 떨어지자 실종자 가족들이 11월 10일 정부에 수색 종료를 공식 요청하면서 수색이 종료됐다.

지옥이 존재한다면 실종자 가족들이 4월 16일부터 11월 10일까지 209일 동안 겪었던 시간으로나마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을까. 주검을 수습한 가족들은 물에 불어난 가족의 몸을 만지며 울었고, 주검을 찾지 못했던 가족들은 오매불망 바다를 바라보며 울었다. 진도에서 만난 한 실종자 가족은 그 고통을 “실종자들이 발견돼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볼 때면 그렇게 진도를 떠나는 슬픈 현실이 오히려 부러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고 표현했다. 자식의 주검을 찾은 사람이 부러웠다는 이 말에서 그들이 겪었을 고통의 크기를 짐작하고도 남는다.

이처럼 누군가에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상처로 남은 이 사건을 주간조선이 다시 언급하는 것은 세월호 사고를 통해 한국의 슬픈 자화상이 너무 많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세월호 참사를 계기로 한국 사회에 안전의식 제고와 사고 예방 및 대책 시스템을 재점검하는 일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도 깔려 있다. 무엇보다 세월호 사고로 가족을 잃게 된 사람들의 상처를 치유하는 것은 온전히 한국 사회의 몫이다. 하지만 사고 이후 한국 사회의 행태들은 그들에게 더 큰 상처를 남기지는 않았는지 돌아보게 된다. 크나큰 재앙 앞에서 하나가 되었어야 할 한국 사회는 오히려 둘로 갈라졌다. 특히 서울 광화문 광장에 차려진 세월호 희생자의 천막농성장 앞에서 일부 극우 청년들이 피자와 치킨을 먹는 행위는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눈살을 찌푸리게 했다.

어른들의 몰상식한 행동과 대조되게 희생당한 단원고 학생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서로 도왔던 사실이 드러나며 한국 사회에 깊은 울림을 남기기도 했다. 생존자들의 증언과 유족 측이 제공한 희생 학생 휴대전화에 녹화된 동영상을 보면 희생 학생들의 이 같은 모습이 드러난다. 희생자 중 한 명인 정차웅군은 사고 당시 자신이 입고 있던 구명조끼를 벗어 친구에게 건넸으며 다른 친구들을 구하러 가다가 결국 빠져나오지 못한 것으로 전해졌다. 최덕하군은 침착하게 사고 사실을 가장 먼저 소방청에 신고해 172명이 구조될 수 있도록 도왔다. 295명의 희생자와 9명의 실종자를 남긴 세월호 참사가 과연 한국 사회에 던진 의미는 무엇인지, 떠난 자들이 우리에게 남긴 목소리는 무엇인지 다시 한 번 되새겨봐야 할 연말이다.

박혁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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