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주보’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 특별편의 표지에 실린 찬드라 보스. 당시 인도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옵서버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시덕 소장
‘사진주보’ 1943년 11월 대동아회의 특별편의 표지에 실린 찬드라 보스. 당시 인도는 ‘대동아공영권’의 범위에 포함되지 않았으므로 그는 옵서버 자격으로 회의에 참석했다. 김시덕 소장

일본이 청나라의 마지막 황제 부의를 빼내어 국가원수로 삼아 세운 만주국은, 만주인·몽골인·일본인·한인·조선인의 다섯 민족이 화해롭게 지낸다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실상은 일본의 ‘만몽(滿蒙)’ 진출을 위한 괴뢰국일 뿐이었다. 만주인을 한인으로부터 해방시킨다는 이념을 내세워 만주국을 만든 뒤에도 중국과의 전쟁이 계속되자, 일본 국내외에서는 이 전쟁의 목적이 무엇인지에 대한 의문이 터져나왔다. 이에 대한 대답으로 일본이 새로이 내건 이념이, 중국을 포함하여 아시아 전체를 서구 제국주의로부터 해방시킨다는 1938년의 ‘동아 신질서’ 선언이었으며, 이 이념을 수행한다는 명분으로 ‘대동아공영권’이 형성되어 갔다.(‘滿州事變から日中戰爭へ’ 230쪽·加藤陽子) 일본은 서구로부터 시작된 ‘근대’ 이후의 새로운 가치를 ‘대동아공영권’을 통해 만들겠다는 ‘근대의 초극’이라는 개념을 내세우기도 했다.

‘대동아공영권’의 실상은 제국주의 일본이 연합국과의 장기전을 위해 ‘대동아공영권’ 내의 다른 지역을 착취하는 구조였다. 전황이 악화되면서 조선인·타이완인을 징병하여 일본군에 포함시키기도 했지만, 일본 군부의 근저에는 경계심과 공포가 자리 잡고 있었다. “무기 사용법을 익힌 조선인이 많아진다는 것은 통치를 위협하는 일일 뿐만 아니라 당시 많은 일본인에게 ‘명예로운 황군’의 순혈이 조선인에 의해 침해된다는 것은 용납하기 힘든 일이었다. 만약 조선인이 군대에서 훈장이라도 받게 되면 멸시하기가 곤란해지고, 조선인이 장교가 되면 일본인이라고 해도 복종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실제 일본 육군에는 중장까지 올라갔던 이를 비롯하여 지원 등을 통해 이미 입대해 있던 조선인 장교가 적지 않았던 것이다.… 일본 육군은 전투부대의 조선인 비율이 20%를 넘지 않도록 기준을 정하고 조선인은 포로수용소 부대 등으로 돌렸다. 그 결과 포로 학대를 이유로 B·C급 전범이 된 다수의 조선인이 나오게 된다.”(‘단일민족신화의 기원’ 333~425쪽·오구마 에이지) 또한 1942년 11월 일본에서 개최된 ‘제1회 대동아문학자대회’에 참가한 이광수는 ‘대일본제국’의 신민으로서 순응하고자 최선을 다하지만 그것이 불가능한 데에서 오는 고뇌를 연하의 일본인 문학자들에게 말했다가 호되게 비판받는 경험을 한다. ‘대동아공영권’의 타이완 대표로 참석한 하마다 하야오(濱田雄)라는 사람의 증언이다. “나라호텔의 둘째 날 밤이었습니다. 날이 춥길래 바에 갔더니 (중략) 구사노 신페이(草野心平)씨와 가와카미 데쓰타로(河上徹太郞)씨가 이광수씨를 거세게 비판하고 있었습니다. 제가 오기 전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지만, 이광수씨가 반도(半島)의 작가로서 느끼는 괴로움을 살짝 토로했다가, ‘그런 괴로움을 말해서 뭣하는가, 문학의 괴로움은 그깟 괴로움에 비할 바가 아니다’라며 질타하고 있는 것 같았습니다.”(‘滿洲崩壞’ 12쪽·川村湊) ‘대동아공영권’의 구성원으로서 일본인과 평등해야 할 조선인이 이상(理想)과는 달리 일본인에게 차별받고 있다는 ‘친일파’ 이광수의 소극적인 항거를, 동료 일본인 문학자들은 이해조차 할 수 없었다. 일본이 패전한 이틀 뒤인 1945년 8월 17일, 최남선도 교수로 재직한 바 있는 만주 건국대학의 니시모토 소스케(西元宗助) 교수에게 조선인과 중국인 학생이 다음과 같이 작별인사를 했다고 한다. “조선이 일본의 예속에서 해방되고 독립해서야 비로소 한국과 일본은 진정으로 제휴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들은 조국의 독립과 재건을 위해 조선으로 돌아갑니다.” “선생님들의 선의가 어떤 것이었든… 만주국의 실질이 제국주의 일본의 괴뢰 정권에 불과했다는 것은 유감스럽지만 명확한 사실이었어요.”(‘키메라-만주국의 초상’ 286~287쪽·야마무로 신이치) 니시모토 교수는 학생들이 이러한 생각을 하고 있으리라는 사실을 상상조차 못했던 것이다.

‘대동아공영권’의 이념과 현실은 이처럼 달랐다. 그 이념에 실낱같은 희망을 건 사람들도 있었다. 거의 백 년 동안 제국주의 영국의 식민통치를 받던 인도의 무장독립세력이 그들이었다. 영국 총독 암살에 실패하고 1915년 일본에 망명한 라쉬 비하리 보스(Rash Behari Bose)는, 조선 병합과 만몽 분할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한 이누카이 쓰요시(犬養毅), 도야마 미쓰루(頭山滿), 우치다 료헤이(內田良平) 등 아시아주의자들의 비호를 받았다. 한국을 정복하기 위한 러일전쟁에서 일본이 승리한 것이 기타 아시아 지역에는 아시아주의적 관점에서 환영받은 것처럼, 일본의 힘을 빌려 독립전쟁을 전개한 동남아 및 인도의 일부 세력은 현대 한국인의 세계관으로는 처리되기 어려운 복잡한 성격을 띠고 있다. 한편 인도가 제국주의 일본의 시야에 들어오면서, 현대 한국의 일부 기독교 종파가 ‘기독교가 쇠퇴한’ 유럽으로 역(逆) 포교를 시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불교가 쇠퇴한’ 인도로 자신의 가르침을 포교할 것을 지시한 개창자 니치렌(日蓮)의 유언에 따라 일본의 일연종(日蓮宗)은 근대 인도에서 포교를 시도했다. 인도 뭄바이 근교의 칸헤리 석굴에 일연종 승려가 근대에 새긴 것으로 보이는 니치렌슈 석각문(石刻文)은 당시의 흔적이다. 지금도 델리에는 일연종 사찰이 있어서 일본인의 숙소로서 기능하고 있기도 하다.

이후 1941년에 영국령 홍콩·싱가포르를 함락시킨 일본군은 영국군 포로에 포함되어 있던 6만5000명의 인도인을 ‘인도 국민군’으로 조직했다. 그리고 이들을 중심으로 인도 독립운동 단체들을 규합하여 ‘인도 독립연맹’을 만들고, 당시 일본에 귀화한 상태였던 라쉬 비하리 보스를 이 조직의 의장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일본 당국의 결정에 여타 인도인들이 반발하자, 일찍이 공산주의적 성향을 띠었으나 당시에는 영국의 적국인 이탈리아·독일 등 파시스트 국가의 힘을 빌리고자 독일에 머물던 수바스 찬드라 보스(Subhas Chandra Bose)를 1943년 5월에 잠수함에 태워 왔다.

한국에서는 인도의 독립운동가로 간디와 네루가 주로 알려져 있지만, 당연히도 인도에는 찬드라 보스나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그리고 결국 파키스탄의 독립을 이끌게 되는 무하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와 같이 간디·네루와는 다른 길을 추구한 독립운동가도 많았다. 이승만과 김일성만으로 한반도 남북의 현대사를 온전히 이해할 수 없듯이, 인도와 파키스탄, 그리고 방글라데시의 현대사 역시 그러하다. 똑같이 인도의 독립을 바랐던 간디, 찬드라 보스, 암베드카르였지만, 이들은 독립 인도가 어떤 형태를 지향해야 하는지에 대해 근본적으로 다른 생각을 했다. 가장 첨예한 대립은 농본주의와 공업화 문제였다. “간디는 반공업주의자였고, 사람들이 최소한의 욕구만을 갖고 대대로 내려온 직업에 기꺼이 종사하며 살아가는 촌락을 인도의 이상사회로 보았다. 그러나 암베드카르에게 ‘촌락’은 카스트제도의 억압과 사회경제적 후진성이 존재하는 ‘시궁창’이었다. (중략) 시골마을은 억압받는 계급에게 종속을 의미했고, 간디가 혐오했던 도시와 공업사회는 달릿(불가촉천민)에게는 오히려 탈출구를 상징했다.”(‘암베드카르 평전’ 99~100쪽·게일 옴베르트) 암베드카르에게는 인도의 독립 이상으로 도시화·공업화를 통한 카스트 문제의 해결이 시급한 과제였다. 찬드라 보스 역시 지방분권적이고 농본주의적인 간디의 이상에 반대하여 독립 인도 정부는 권위주의적으로 공업화를 추진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파시스트 국가의 힘을 빌릴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パル判事’ 41쪽·中里成章) 이처럼 인도의 독립운동은 한국에서 이야기되는 것처럼 간디와 네루만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간디, 네루, 암베드카르, 찬드라 보스는 현재의 인도에서 모두 존경받고 있다. 비록 선택한 길은 달랐지만 모두 인도의 독립을 위해 투쟁한 독립영웅이라는 것이다.

무장 독립을 추구한 찬드라 보스는 일본의 힘을 빌리는 길을 택했고, 유라시아 동해안의 남쪽 지역에서 연합국 세력을 몰아내고자 한 일본의 우파는 이들을 이용하기로 했다. 찬드라 보스는 어디까지나 인도 국민군과 일본군이 그리고 자유 인도 임시정부(Provisional Government of Free India)와 일본이 동등한 상대여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일본군은 이들을 괴뢰군·괴뢰정부로 간주했다. 이런 상태에서 일본군이 최악의 패배를 기록한 임팔작전이 1944년 3월에 시작되었다. 찬드라 보스는 이 전투를 인도 해방의 첫 단계로 인식했지만, 일본군의 목적은 인도에서 북부 미얀마로 공격해 오는 영국군을 억제하는 데 있었으며 인도 해방은 부차적인 문제였다. 이후 일본이 패망하자, 연합군에 적대하고 추축국과 손잡은 찬드라 보스는 전범으로 몰릴 위험이 있었다. 그는 소련 또는 만주로 망명하기 위해 일본의 비행기를 빌려 탔다가 타이완에서 비행기가 추락하는 바람에 사망했다. 비극적인 생애였다.

그런데 이 임팔전투에서는 조선인 독립군이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하고 있다. “독립군의 일파인 민족혁명당은 임정에 참여한 후인 1942년 겨울 인도 주둔 영국군 사령부의 요청으로 주세민과 최성오를 인도에 파견했다. 영국군은 인도·버마 전구(戰區)에서 일본군에 대한 선전, 포로심문을 위해 일본어가 유창한 한국인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중략) 이들은 1943년 2월 버마에 도착해 선전활동에 큰 성과를 거두고 1943년 3월경 돌아왔다.” 한국인의 활동에 주목한 영국군사령부는 이들을 재차 파병해 줄 것을 요청했고, 이에 1943년 8월에 광복군 총사령부는 한지성 등 9명의 광복군 인면(印緬·인도, 미얀마) 전구 공작대를 인도로 파견했다. 이들이 임팔전투에서 연합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것이다. 이들은 1945년 7월에 미얀마의 수도 양곤을 탈환할 때까지 활동을 이어갔다.(‘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51~53쪽·정병준) 비록 이들의 활동이 이 지역의 전황을 좌우할 정도였다는 평가는 받지 못하지만, 한반도 출신의 사람들이 2차 세계대전 중 연합군과 일본군에 소속되어 남아시아에서 활동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기억할 필요가 있다.

조선인의 일본군 참전이 일본 내에서 조선 지방의 권리 향상으로 이어지지 않은 것처럼 영국도 1차 대전 당시 인도인과 했던 약속, 즉 인도인이 전쟁에 협력하면 전후에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그리하여 찬드라 보스 등의 일부 인도인은 영국과의 타협 노선을 포기하고 영국의 적인 파시즘 국가들에 희망을 걸었다. 그렇기에 찬드라 보스는 전후에 전범 재판을 받을 뻔했으며, 그가 이끈 인도국민군을 1945년 11월에 재판에 회부하려던 영국 식민당국의 시도는 인도인의 반발을 불러일으켜 인도 독립운동을 촉발하게 된다.(‘パル判事’ 78~81쪽) 이때 찬드라 보스의 노선에 동조하여 열정적으로 데모에 참가한 라다비노드 팔(Radhabinod Pal)이라는 법률가는, 이로부터 반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 극동국제군사재판에 검사로 참가하게 되었다. 그는 인도를 식민지배하는 영국과 일본의 차이는 승전국과 패전국이라는 단 한 가지뿐이며, 히로시마·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는 중대한 전쟁범죄를 저지른 연합국이 추축국을 법률적·도덕적으로 단죄할 수는 없다는 입장에서 일본 무죄론을 주장했다.(‘パル判事’ 68쪽) 팔과 마찬가지 생각을 품고 있던 기시 노부스케(岸信介)와 같은 일본의 우익 정치가들은, 자신들이 노골적으로 미국의 논리에 저항하는 대신 팔 판사를 정의의 상징으로 추앙함으로써 간접적·심리적으로 미국에 저항하는 방식을 택했다. 현재 일본 군국주의의 상징인 야스쿠니 신사(靖國神社)에는 팔 판사 현창비가 세워져 있다.

대동아전쟁 기념보국엽서 제1집. 왼쪽 위는 홍콩 함락, 왼쪽 아래는 싱가포르 함락, 오른쪽은 진주만 공습 장면이다. 김시덕 소장
대동아전쟁 기념보국엽서 제1집. 왼쪽 위는 홍콩 함락, 왼쪽 아래는 싱가포르 함락, 오른쪽은 진주만 공습 장면이다. 김시덕 소장

제국주의 일본이 저지른 전쟁범죄의 책임을 져야 할 일본 우파의 운명은, 1948년에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에 결정적 승리를 거두면서 극적으로 바뀌었다. 애초에 일본을 무장 해제시키고자 했던 미국은, 중국 공산화에 맞서 일본을 유라시아 동해안의 반공 기지로 재무장시키고 남한과 타이완을 그 배후 기지로 삼는 것으로 정책을 바꾸었다. 이러한 흐름에서 일본의 전범은 반공주의라는 명분하에 기사회생한 것이다. 미국의 급격한 일본 점령 정책 변화를 ‘역코스(reverse course)’라 하며, 그 결과 신생국가 일본에는 군사력의 완전한 포기를 선언한 헌법 9조로 상징되는 평화주의의 흐름과, 미국의 지도하에 한국·타이완과 반공 동맹을 결성하는 우파적 흐름이 공존하게 되었다. 오늘날까지 일본 사회는 미국의 역코스가 초래한 이 모순적 상황을 자체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상태이다. 역코스는 어쩌면 미국이 일본을 자국의 지도하에 놓기 위해 시행한 교묘한 견제의 틀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것 같다. 2차 대전 말기의 대규모 공습(1945년 3월의 도쿄 공습에서는 조선인을 포함하여 8만~10만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과 원자폭탄 투하에 대한 피해의식, 나아가 ‘너와 내가 모두 제국주의 정책을 취했는데 왜 나만 처벌받아야 하는가’라는 모순에 대한 불만을 일본의 책임 있는 지위의 인사가 공개적으로 발언하는 날, 미·일동맹은 소멸하고 유라시아 동해안은 새로운 정치적 상황으로 진입하게 될 것이다. 반대로 이러한 움직임이 일본에서 일어나기 전까지 일본의 정책은 미국의 지도와 양해, 나아가 일본의 경제력과 군사력을 이용하고자 하는 미국의 압박하에 이루어지고 있다고 간주할 수 있다.

한국인이라면 근대 제국주의 일본에 대해 19세기 말에서 1910년에 걸친 병합과정에 큰 분노를 느낄 터이다. 그러나 극동재판의 대상이 된 시기는 1928~1945년이다. 이 시기에 이미 일본의 일부였던 조선인은, 타의적이라고는 하지만 만주국의 건국에 ‘애매모호한’ 일본인으로서 참가했고 동남아시아의 전선에서는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했다. 이는 비단 조선인뿐 아니라 조선보다 이른 시기에 일본의 일부가 된 타이완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기에 극동재판에서는 조선인과 타이완인 일본군도 전범으로 처벌받았고, 한반도 남부에 들어온 미군은 식민지 조선의 해방자라기보다는 적국 영토에 대한 점령자로서 행동했다. “일본에 대한 적대적 점령에 대비해 준비된 군정요원들이 남한으로 쏟아져 들어왔고, 교범에서 배운대로 행동했다.” (‘20세기 미국의 한반도 전략과 역할’·정병준). 한반도와 타이완섬에 대한 일본 정부의 정책은 전황이 엄중해질수록 점점 적극적이 되어, 마침내 이들 지역의 주민을 일본군으로서 징집하게 되었다. 식민지 주민들은 많은 경우 타의적으로 징집되었으나, 어떤 이들은 조선인이 ‘혈세’를 지불함으로써 일본 내부에서 조선 지역의 권리를 향상시킬 수 있다며 적극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1937년에 난징, 1942년에 싱가포르가 함락되면서 일본에 맞설 국제 세력이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느껴지게 되자, 예언자가 아닌 다수의 조선인과 타이완인들은 독립을 현실적으로 와닿는 선택지가 아니라고 판단했던 것 같다.

그러나 물론 어떤 이들은 독립이라는 꿈을 현실로 만들기 위해 시베리아에서, 버마에서, 중국에서, 그리고 태평양에서 죽어갔다. 그리고 현실은 소설보다 극적인 법이어서, 광복은 도둑처럼 찾아왔다. 이렇게 되자 독립이라는 선택지를 상정하지 못하고 일본의 정책에 적극적으로 동참함으로써 조선인의 권리를 신장시키는 것을 최선의 목표로 삼던 이들은 혼란에 빠졌다. 신생국가 ‘대한민국’은 적극적으로 국방의 의무를 주장한 자들과 일본군의 일원으로 참전한 조선 출신 병사들을 희생양으로 삼음으로써 건국 이전의 어두운 과거를 지우고자 했다. 일본 내에서 조선인으로서 살아남고자 적극적이었던 ‘친일파’ 다수는 새로운 국제질서였던 냉전을 틈타 ‘반공’이라는 이데올로기로 자신의 과거를 덮었다. 마치 필리핀과 일본의 ‘전범’들이 역코스 과정에서 면죄부를 받은 것과 같이. “태평양전쟁을 승리로 이끈 맥아더는 세계의 가장 주목받는 군인으로 부상하게 되었다. 즉 천재적인 군사전략으로 미군의 희생을 최소화했으며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다고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전쟁 수행 과정에서 맥아더는 여러 가지 문제를 일으켰다. 그 가운데 하나가 상부의 허락을 받지 않고 진행한 돌발적인 언론 발표였다. 맥아더의 이러한 공식발표는 늘 시기상조라는 비난을 받아 왔다.(중략) 다른 하나는 수복된 지역의 정치 질서를 자신의 의도에 따라 재편하려고 시도한 것이다. 필리핀 수복과 때를 같이하여 1945년 6월 9일 필리핀 국회는 맥아더에게 필리핀 국민을 대신해 깊은 감사를 전했다. 이때 맥아더는 로하스(Manuel Roxas)를 후원해 그가 대통령이 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로하스는 일본의 필리핀 점령 시기 일본에 협력한 일종의 부일협력자로 처벌을 받아야 했음에도 불구하고, 맥아더가 그를 사면하고 대통령으로 만든 것이었다. 당시 미국의 한 정치고문은 이를 두고 맥아더가 필리핀의 향후 정치 과정에 결정적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했다. 이는 광복 이후 한국의 정치 과정과 매우 유사한 경로를 취했기 때문에 이를 비교하는 것도 중요한 연구 과제가 될 것이다.”(‘맥아더와 한국전쟁’ 51쪽·이상호)

신생국가 대한민국에서 ‘친일파’가 생존권을 얻기 위해서는, 일본군으로 복무하고 종군위안부가 되어야 했던 이들의 존재를 시민들의 기억에서 지워야 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마찬가지여서, 자신들이 징용하고 동원했던 자들에 대한 사후처리는 거의 이루어지지 않았다. B·C급 전범, 종군위안부, 스파이 취급을 받아 강제 이주당하고 학살당한 연해주와 사할린의 조선인, 인도네시아 독립운동의 영웅인 동시에 구일본군 전범이었던 양칠성, 일본이 천황(天皇)제도를 지키기 위해 전쟁을 질질 끄는 바람에 무의미하게 사망한 10만명의 오키나와 주민들, ‘프런티어’ 북만주(北滿洲)를 개척하자는 명목으로 일본에서 보낸 소년들로 구성된 만몽개척단(滿蒙開拓團), 일본군·만주군에 소속되어 북만주에 주둔하다가 일본의 패전과 함께 소련군의 포로가 되어 시베리아에 억류되었던 조선인들…. “게다가 한국 현대사에서 부끄러운 부분이기는 하지만, 일제가 만주국을 통치하던 시절 신징군관학교나 펑톈군관학교를 나와 일본군이나 만군에 근무하던 장교 출신 가운데 대한민국에서 대통령·총리·장관 등으로 영달을 누린 사람들이 적지 않다. (중략) 전후 사정이 어찌됐든 이들이 재빨리 만주 등지에서 빠져나와 돌아온 반면, 가장 말단 사병으로 북만주 등지에 끌려갔던 청년들은 소련에서 어처구니없는 고생을 해야 했다.”(‘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15~16쪽·김효순)

일본의 저명한 영화감독 오시마 나기사(大島渚)는 1960년대에 한국을 방문해, 구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이 비참한 삶을 살고 있는 모습을 ‘잊혀진 황군(忘れられた皇軍)’이라는 영화로 남겼다. 오시마는 사할린의 조선인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이들 구일본군 출신 조선인들을 방기한 일본 정부를 비판했다. 그러나 사할린 잔류 조선인 권희덕씨는 다음과 같이 일본과 남북한 정부를 모두 비판한다. “전후, 일본이 책임을 갖고 우리들을 귀국시키려고 했다면 가능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52년 대일강화조약 발효까지 우리들은 법률적으로 ‘일본 사람’이었으니까요. 조선에서 온 1세들은 사회제도의 180도 전환에 적응할 수가 없어서, 내 눈앞에서 정신이상으로 자살한 노인이 두 사람이나 있었습니다. 그러나 사할린에 남은 조선 사람이 돌아갈 수 없었던 원인은 38도선에 의한 조국의 분단입니다. 남쪽도 북쪽도 이념만 떠들지 말고 인도적으로 되어야 합니다. 저는 사할린의 조선 사람을 일본으로부터도, 조국으로부터도 버림받은 20세기의 버림받은 민족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 정부는 1965년의 한·일기본조약에서 과거의 배상문제는 끝났다고 말하고 있지만, 사할린의 우리들은 관계없는 일입니다. 왜 우리들이 조약의 희생자가 되지 않으면 안 될까요?”(‘사할린 아리랑’ 32쪽·이토 다카시) 이와 같이 이들의 존재를 묻어버림으로써 신생국가의 과거를 순결케 하고자 했던 대한민국 정부에도 이들을 방기한 책임이 있는 것은 당연하다. 2015년에 50주년을 맞이하는 한·일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일본이 지불한 ‘독립축하금’은 식민지 시기 피해자 개개인에게 거의 주어지지 않았을 뿐 아니라, 그 후 개개인의 배상요구를 막는 법적 장애물이 되기도 했다. 베트남전쟁에서 사상당한 한국군 병사들이 기억에서 지워지고(‘파병 50돌, 4650명의 무덤 위에서 전쟁의 의미를 묻다’·박태균), 그들의 출병을 대가로 미국으로부터 주어진 지원은 참전자 개개인에게 돌아가는 대신 ‘국가’를 위해 쓰였다. 개인의 희생 위에 국가가 탄생하고 성장하는 과정은 근대 유라시아 동해안에서 반복해서 보게 되는 잔인한 풍경이다.

끝으로, 이번 회를 집필하는 데 도움을 주신 서울대 의대 신동훈 선생님, 도쿄외국어대 신재은 선생님, 도쿄대 동양문화연구소 후루이 료스케(古井龍介) 선생님, 데칸대 김용준 선생님, 가천대 유수정 선생님, 건축가 황두진 선생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연재를 통해 가장 많은 것을 배운 사람은 필자였습니다. 지난 일 년간 감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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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효순 ‘나는 일본군 인민군 국군이었다’

우쓰미 아이코 외 ‘적도에 묻히다 - 독립영웅, 혹은 전범이 된 조선인들 이야기’ 역사비평사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조교수. 고문헌 연구를 통해 전근대 일본의 대외전쟁 담론을 추적 중. ‘이국정벌전기의 세계-한반도·류큐열도·에조치’로 일본 고전문학학술상을 외국인 최초로 수상.

김시덕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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