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성룡이 만년에 후학을 가르친 안동의 병산서원. ⓒphoto 조선일보 DB
류성룡이 만년에 후학을 가르친 안동의 병산서원. ⓒphoto 조선일보 DB

서애 류성룡 초상화
서애 류성룡 초상화

천만 관객을 끌어들인 영화 ‘명량’에서 그는 살짝 스쳐 지나간다. ‘명량’은 정유재란 당시 해전이 배경이다 보니 이순신에 초점이 맞춰졌다. 조정에서 벌어지는 일들은 거의 다뤄지지 않았고, 결과적으로 그는 조명받지 못했다. 그는 서애(西厓) 류성룡(1542~1607)이다.

지난 2월 14일 KBS가 대하드라마 ‘징비록(懲毖錄)’을 방영하면서 류성룡에 대한 관심이 높다. 텔레비전에서 이순신을 주인공으로 한 드라마가 여러 번 제작되었지만 그때마다 류성룡은 이순신에 가려져 상대적으로 덜 조명받았다. 드라마 ‘징비록’은 류성룡이 주인공이다.

드라마 방영에 맞춰 서점가에는 ‘소설 징비록’ 열풍이 불고 있다. ‘소설 징비록’(이재운·책이있는마을), ‘소설 징비록’(이수광·북오션), ‘소설 징비록’(박경남·북향), ‘소설 징비록’(이번영·나남출판사), ‘비열한 역사와의 결별 징비록’(배상열·추수밭) 등 7~8권이다. 이밖에 송복 전 연세대 교수의 ‘서애 유성룡 위대한 만남’ 같은 류성룡 연구서 등을 더하면 그 숫자는 훨씬 늘어난다. ‘청소년을 위한 징비록’(이상각·파란자전거), ‘류성룡과 징비록 이야기’(박인경·채운어린이) 등도 있다. 가히 ‘징비록 신드롬’이 불어닥칠 기세다.

먼저 서애 류성룡과 관련된 객관적인 사실부터 알아보자. 임진왜란 당시 ‘전시 재상’으로 불린 류성룡은 경북 의성 태생으로 안동 하회마을에서 유년기를 보냈다. 류성룡은 스물두 살에 초시에 합격하고, 스물세 살에 생원회시(生員會試)에 율곡 이이와 함께 나란히 1등으로 합격했다. 이후 대사헌, 경상도 관찰사 등을 거쳐 병조판서, 좌의정, 영의정, 도체찰사로 일했다. 선조 밑에서 임진왜란을 총 지휘해 승리로 이끄는 데 큰 공을 세웠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조정에서 왜군과 명군의 위치를 가장 객관적으로 파악한 사람이었다.

선조 때 좌의정이었던 류성룡은 1591년 2월, 정읍현감이던 이순신을 6품계나 파격적으로 승진시켜 이순신을 전라좌수사가 되게 했다. 임진왜란 발발 1년 전이다. 류성룡은 임진왜란 당시 선조가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로 망명하는 것을 막았다. 또한 도체찰사를 맡아 사실상 전쟁을 진두지휘해 참혹한 7년 전쟁을 끝냈다.

징비록은 ‘전시 재상’ 류성룡이 모든 관직에서 물러난 만년에 임진왜란 7년 동안 조정에서 보고 느낀 것을 기록한 책이다. ‘징비록’은 ‘내가 스스로 반성하여 후환을 대비한다’는 뜻이다.

징비록을 가장 먼저 소설로 써낸 작가는 이재운이다. 이재운은 1991년 소설 ‘소설 토정비결’을 발표, 300만부라는 밀리언셀러를 기록한 작가. ‘토정비결’은 임진왜란 직전까지의 상황을 다루고 있다. 이씨는 1998년 ‘소설 징비록’을 경향신문에 ‘당취’라는 제목으로 연재한 뒤 해냄출판사에서 5권으로 출간한 바 있다. 지난 1월 한 권으로 다시 묶어 ‘소설 징비록 - 전시재상 유성룡과 임진왜란 7년의 기록’을 냈다. 이씨의 책이 다른 소설들과 다른 점은 바로 승지로 일한 이효원이 류성룡과 대화를 하는 장면이다. 이효원은 이재운 작가씨의 11대 조부. 지난 2월 24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커피숍에서 이씨를 만났다. 이씨는 “11대 할아버지가 쓴 책에도 류성룡과 만났다는 대목이 나와 그 부분을 앞부분에 가미했다”고 말했다. 이씨에게 ‘소설 징비록’은 ‘토정비결’의 후속편에 해당한다. 1998년 ‘소설 징비록’을 연재하면서 류성룡과도 처음 만나게 되었다. 류성룡은 거의 모든 책에서 전시재상이라고 표현되었다. 이씨가 연구한 류성룡의 역할이 궁금했다.

‘징비록’을 소재로 나온 다양한 소설들.
‘징비록’을 소재로 나온 다양한 소설들.

“임진왜란이 터지고 얼마 지나지 않은 5월 서애는 좌의정에서 파직당했다. 동인이라는 이유 때문이었다. 이후 서애는 보직이 없는 채로 선조를 따라 의주까지 가게 된다. 파직당하면 고향으로 내려가게 마련인데, 이미 고향은 왜군이 침탈한 상태라 갈 수도 없었다. 할 수 없이 왕을 호종(扈從)하게 된다. 왕을 호종해 봐야 월급도 끊겨 아무런 이득이 없었다. 여기서 서애의 노블레스 오블리주 정신이 나타난다. 서애는 국가의 녹을 먹은 사람으로서 가문의 명예와 나라를 생각해 호종 대열에 선 것이다. 회의할 때도 서애는 그냥 서 있었다. 선조도 그런 서애를 그냥 못 본 척 대했다. 그렇게 무보직 상태에 있으면서 외교·군사·보급 그리고 유격전까지 다 관여했다. 서애가 영의정에 보임된 것은 정유재란 때인 1597년이었다.”

서애가 없었으면 이순신도 거북선도 없었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서애가 병조판서를 거쳐 좌의정으로 일하던 1591년 초 이순신을 전라좌수사에 임명한 것을 두고 하는 말이다. 임진왜란의 3대첩 중 2대첩(한산대첩·행주대첩)은 모두 류성룡이 천거한 이순신과 권율에 의해 이뤄졌다는 평가가 나온 배경이다. 이재운 작가의 말이다.

“서애는 어려서부터 소꿉놀이 친구로 이순신을 지켜봐 와서 그의 능력과 됨됨이를 잘 알았다. 이순신은 반드시 이기고야 마는 성격이라는 것을 누구보다 잘 알았다. 왜군과 전투를 해도 이순신이 이길 것이라는 것을 알고 선조에게 천거했다. 선조도 서애의 말을 듣고 파격적인 승진을 시켰다. 그러나 권율의 행주대첩의 경우 무장, 보급, 그리고 승운이 따라준 우연의 결과라고 말하는 게 더 적절하다.”

이씨는 선조에 대해 “전술·전략에 노회한 교활한 국왕이었다”고 평가한다. 선조에 대한 평가를 더 들어보자. “선조는 동인과 서인의 당쟁까지도 통치수단으로 삼았을 만큼 머리가 좋았다. 그러나 그의 머릿속에는 오로지 ‘자기 안위’만이 들어 있었다. 두 번째가 국가 안위였고, 세 번째가 백성의 안위였다.”

일본의 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정유재란을 일으킨 게 1597년 1월 12일. 정유재란은 임진왜란 후 일본의 재침략을 말한다. 그런데 삼도수군통제사로 있던 이순신은 그해 2월 6일, 파직되어 투옥된다. 왜군의 반간계에 휘말린 윤두수·윤근수 형제 등 조정의 서인들이 이순신이 왕명을 어겼다고 진언한 결과다. 선조는 이순신이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의 목을 베어오더라도 결코 용서치 않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이씨에게 선조와 이순신의 관계에 대해 물어보았다.

“이순신은 전쟁에 바빠 왕이 자신을 두려워한다는 것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선조는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두려워했다. 이순신을 무섭고 공포스럽게 대했다. 서인이 이순신을 공격할 때 류성룡은 잘못하다 자기도 죽게 생겼으니까 끝까지 보호하지는 못했다.”

이수광 작가는 1983년 문단 데뷔 이래 역사소설과 역사에세이를 20여권 펴낸 베스트셀러 작가다. 고려조부터 조선조에 이르는 기간 동안 다양한 주제를 소설이나 역사에세이로 풀어냈다. 이수광씨는 전화인터뷰에서 류성룡에 대해 “지도자의 영도력이 아쉬운 오늘날 정치풍토에서 류성룡은 시대를 초월한 귀감”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권력을 잡았지만 남용하지 않았고, 부를 보고도 청백리로 근신했으며, 언제나 학문과 교육에 대한 열정을 버리지 않았다.”

이수광씨는 류성룡을 전아(典雅)한 선비라고 평한다. 이게 무슨 뜻인가. 이수광씨의 말이다.

“조선의 고결한 선비들을 말할 때 일반적으로 단아하다고 하는데 류성룡은 그 경지를 넘어 전아하다는 평을 받는다. 평생 청빈하게 살면서 학문에 전념하려는 일념으로 살았다. 그에게 벼슬은 시대가 부과한 고통이었다. 그러나 일단 임무를 맡으면 자신의 몸을 돌보지 않고 철저하게 매진하여 강력한 지도력을 발휘했다.”

또 다른 소설 징비록의 작가 이번영씨는 임진년이던 2012년에 ‘소설 징비록’을 내겠다고 생각했다. “임진왜란은 1592년 임진년 음력 4월 13일 발발했다. 그러므로 2012년 음력 4월 13일은 임진왜란 발발 7주갑(周甲)되는 420주년의 유사 국치일이다. 나는 그날을 기해서 우리가 결코 잊어서는 안 되고, 몰라서도 안 되는, 가히 우리의 경전과도 같은 이 고전을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는 형식으로 풀이해 세상에 내놓고 싶었다.”

이번영씨는 3년간 수많은 자료를 수집해 탐독했고, 역사적 현장을 수십 차례 답사하며 ‘소설 징비록’을 써나갔다. 이번영씨가 ‘징비록’과 처음 만난 것은 2003년이었다. 그는 징비록 해설서를 읽었을 때 충격과 함께 어떤 사명감을 느꼈고 소설화해야겠다는 결심을 굳혔다.

“징비록은 높은 수준의 학식을 가진 문관의 기록이기에 글과 글씨가 유려하다. 그러나 그 서술 내용이 더욱 값지다. 자신은 물론 임금, 조정진료, 사대부, 군지도부, 외교관, 외국군 지휘관, 백성 등의 잘잘못과 전란 전반의 모든 것을 가감 없이 차분하고 적나라하게 기록했다. 이 때문에 징비록은 사료적 가치가 지대한 기록물일 뿐만 아니라 학문적으로도 가치가 대단한 기록물인 것이다.”

이재운·이수광·이번영·박경남씨(왼쪽부터).
이재운·이수광·이번영·박경남씨(왼쪽부터).

이번영씨는 ‘징비록’의 저자인 류성룡에 대해 이렇게 평가했다. “서애는 당파(동인)에 속해 있었으나 당파를 초월했고, 임금의 신임에서 밀려나 있을 때에도, 높은 도덕성과 선견적 혜안으로 남들이 도저히 할 수 없는 일을 묵묵히 자청해서 감당해냈다. 그러면서도 자신의 명예나 사리에서는 초연했다. 외적으로는 온화·원만·침착했으나 내적으로는 주의가 확고하고 의지가 강했다.”

박경남씨는 4인의 소설가 중 유일한 여성이다. 박씨는 2014년 출간한 소설 ‘왕의 눈물’의 후속작업을 준비하던 중 자연스럽게 류성룡을 만났다. 박씨는 “아무래도 영화 ‘명량’의 영향도 있어서 임진왜란 관련 소설을 다른 방향으로 준비하다가 류성룡에 집중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집필중에 박씨는 KBS에서 ‘징비록’을 준비하고 있다는 얘기를 들었다. “자극도 되고 부담도 되었지만, 같은 인물과 같은 사건을 다루더라도 집중하는 면과 시각이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해서 나름대로 작업을 했다.”

박씨는 원본 ‘징비록’을 독파한 것 외에도 역사적 시각이 비슷한 류성룡 연구 서적을 전부 구해 읽으며 소설을 구상했다. 박씨는 소설의 주인공인 류성룡을 처음 알게 되었을 때 어떤 느낌이었을까. 박씨의 설명이다.

“류성룡을 처음 접했을 때는 밋밋했습니다. 아마 당대의 다른 인물들에 집중하다 류성룡을 알게 되었던 탓이었겠죠. 예를 들어, 허균이 허난설헌의 책을 출간하기 위해 서문을 부탁했던 인물이 류성룡이다, 이런 식이었으니까요. 하지만 ‘징비록’을 통해 류성룡을 접하게 되었을 때 왜 이런 인물이 과소평가되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 역시 제대로 알아보지 못한 점이 부끄러웠습니다.”

박씨는 ‘징비록’의 성격과 관련, “임진왜란의 전체와 한 나라의 재상은 어떤 존재인지 알려준 책이었다”고 평가했다. 이순신이 쓴 ‘난중일기’를 임진왜란의 부분이라고 한다면 ‘징비록’은 임진왜란의 전체라는 것이 박씨의 평가다. 박씨는 자신이 그려낸 류성룡을 어떻게 평가하고 있을까.

“류성룡은 어쩌면 그 시대의 내부 고발자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그 시대에 ‘징비록’은 굉장히 불편한 책이었고, 그 책을 쓴 류성룡은 불편한 존재였습니다. 오늘날 류성룡을 제대로 평가하는 것이 건강한 사회의 힘이라고 봅니다.”

한국인은 선조에 대해 저마다의 평가를 내린다. 이번에 다시 사람들은 드라마를 통해서든 소설을 통해서든 임진왜란을 당한 나라의 국왕 선조에 대한 평가를 할 수밖에 없다. 박경남씨는 “선조는 열등감의 소유자이자 이기적인 유전자를 가진 사람이었다”라면서 “임진왜란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을 만나 책임지지 못하는 군주라는 가장 치명적인 평가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이재운 작가는 KBS에서 지난해 ‘정도전’에서 2015년 ‘징비록’으로 류성룡을 다뤘다는 사실에 큰 의미를 부여한다. 명실공히 문화 분야에서도 민주화가 되었다는 징표라는 것이다. 이재운씨는 “문학 분야에 이어 영상에서도 왕조 중심 사관에서 민(民) 중심으로 옮겨왔다는 증거로 굉장히 좋은 현상”이라며 “드라마에서 류성룡이 주인공이 되었다는 것은 류성룡에 대한 복권이 이뤄졌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서애가 말년에 안동 하회마을에 내려가 쓴 ‘징비록’은 이렇게 시작한다.

‘내가 스스로 경계하는 것은 후환을 대비하는 것일세. 나는 벌로 하여금 스스로 독한 침을 구하게 하지 않으려네. 처음에는 도충(桃蟲)에 지나지 않지만 큰 새 되어 펄펄 날고 싶었네. 그러나 많은 어려움을 감당 못해 나는 여전히 료(蓼·여뀌풀) 위에 앉아 있네….’

‘징비록’은 숙종 때인 1695년 일본에서 번역 출간되었다. 일본을 방문한 조선 사신이 이 사실을 알고 조정에 보고했다. 서인(西人)정권이던 조정은 ‘징비록’을 금서로 지정했다. 이와 함께 류성룡에 대한 평가도 사실상 ‘금기’가 된다. 400년간 조선에서는 누구도 징비록을 읽지 않았다. 400년 후 조선은 또 일본의 침략을 받아 36년간 식민지에 놓이게 된다. 이재운씨는 ‘징비록’은 ‘징비(懲毖)’에 실패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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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관 편집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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