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A. 20대 주부 김명희(가명)씨는 조깅화를 사기 위해 백화점 운동화 매장에 들렀다. 단화 스타일과 발목까지 올라오는 농구화 스타일, 두 개가 눈에 들었다. 고민이 시작됐다. 둘 중 어떤 것을 사야할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빈손으로 집에 돌아왔다. 머릿속에선 두 운동화가 시소를 탔다. 다음 날 또 백화점에 갔다. 고민만 하다 돌아오길 한 달째, 매일 출근하다시피 매장에 들렀다. 매장 직원은 김씨가 가면 슬슬 피했다. 매일 와서 ‘이것이 낫겠냐, 저것이 낫겠냐’ 똑같은 말을 물어대니 질릴 만도 했다. 김씨의 남편도 시달림을 당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퇴근해 돌아오면 저녁마다 운동화 이야기를 했다. 처음엔 조언을 해주던 남편도 결국 폭발, “두 개 다 사”라고 화를 내면서 수표를 주었다. 다음 날 운동화 두 개를 사들고 온 김씨, 그때부터 후회가 시작됐다. 운동선수도 아닌데 운동화를 두 개나 샀으니 불필요한 낭비를 한 사람이 된 것이다. 운동화를 볼 때마다 속이 상했다. 며칠 후 남편의 부부동반 모임에 갔다. 마침 한 부인이 운동화를 사야겠다고 했다. 잘됐다 싶어 한 개를 팔기로 했다. 묵은 체증이 내려가듯 시원한 기분도 잠시,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속에서 김씨는 다시 고민에 빠졌다. 도대체 둘 중 어떤 것을 팔아야 할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집에 와서도 괴로워하던 김씨는 급기야 밤 11시에 운동화를 사기로 한 부인에게 ‘안 팔겠다’고 전화를 걸었다.

B. 30대 여성 이은희(가명)씨는 혼자서 물건을 사지 못한다. 마음에 쏙 드는 옷을 발견해도 바로 사본 적이 없다. 옷을 들었다 놨다, 계산대로 갔다왔다 몇 번을 망설이다 돌아온 다음엔 ‘살 걸 그랬나’ 후회하기 시작한다. 결국 친구에게 도움을 청한다. 이씨는 친구에게 “이 옷 어때? 사도 될까?” 물어본 후 답을 듣고 나서야 옷을 산다. 이씨의 친구가 “네가 입을 옷인데 왜 나한테 물어보냐”며 핀잔을 줘도 소용없다. 이씨는 매번 “네가 사라고 하면 살게”라며 결정을 친구에게 맡긴다.

선택의 갈림길에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심리를 두고 ‘햄릿증후군’ ‘결정장애’라고 한다. 선택 과잉의 시대, ‘21세기의 햄릿’이 늘고 있다. 포털사이트에 관련 검색어를 입력하면 “나도 결정장애”를 호소하며 도움을 요청하는 글들이 넘쳐난다. 서울대 생활과학연구소 소비트렌드분석센터(센터장 김난도 교수)는 2015년 주요 트렌드로 ‘햄릿증후군’을 꼽기도 했다. 온라인 쇼핑시장에는 이들을 공략한 새로운 거래유형도 등장했다. ‘큐레이션 커머스’, 즉 미술관의 큐레이터가 예술작품을 엄선해 선보이듯 결정을 못하는 소비자를 위해 전문가가 좋은 상품을 추천해주는 형식의 쇼핑몰이다.

최근 한국소비자원은 ‘큐레이션 커머스’를 이용해 본 적이 있는 소비자 700명을 대상으로 이용실태 조사를 실시했다. 관련 쇼핑몰은 2014년 12월 말 현재 56개. 네이버 및 ‘랭킹닷컴’에서 검색된 큐레이션 쇼핑몰은 총 116개였으나 한국소비자원 확인 결과 그중 60개는 폐점, 리뉴얼 중인 것으로 나타났다. 업종별로 분류해 보면 식품·간식이 21.4%, 종합쇼핑몰이 16.1%, 패션·리빙이 12.5%, 임신·출산·육아·웨딩이 10.7% 순이었다. 한국소비자원 조사에 따르면 22.1%가 “불만, 피해 경험이 있다”고 응답한 반면 65.7%가 “큐레이션 커머스를 계속 이용하고 싶다”고 응답했다.

온라인 쇼핑 이외에도 ‘결정장애’를 호소하는 사람들을 위한 큐레이션 서비스는 콘텐츠 시장, 애플리케이션 등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스마트폰 앱 검색어에 ‘결정장애’를 치면 ‘결정장애 굿바이-쏘캣’ ‘뭐 무꼬?’ ‘폴릭’ ‘결정의 신’ 같은 앱들이 줄줄이 뜬다. 두 가지 상품을 비교해놓고 회원 투표를 통해 결정을 도와주는 등 전문적인 큐레이션 역할을 하기보다는 ‘재미’ 수준에 그친 경우가 대부분이다. 책 선택을 도와주는 온라인 서점 ‘알라딘’의 ‘북플’ 서비스나 시청자 취향에 맞는 프로그램을 추천해주는 올레 TV의 ‘감성 큐레이션’도 여기에 해당한다. 종합편성채널 MBN은 ‘결정장애’를 겪고 있는 이 시대 여성들의 고민해결사를 자처하며 ‘언니들의 선택’이라는 프로그램을 시작했다.

‘결정장애’나 ‘햄릿증후군’은 정식 병명은 아니다.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자신의 책 ‘스스로 살아가는 힘’(더난출판사)에서 ‘선택의 기회가 많아진 현대사회가 낳은 새로운 정신적 문제’라고 규정했다. 옛날에는 웃어른들 말씀이나 사회적 관습에 따라 살면 됐기 때문에 딱히 선택할 일이 많지 않았다는 것. 현대사회로 접어들고 핵가족, 1인가구가 늘어나면서 당장 ‘오늘 점심은 뭘 먹지’부터 시작해서 좋건 싫건 스스로 모든 것을 선택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선택지가 많을수록 불만이 많아지고 구매 만족도도 떨어진다. 선택에 따른 리스크와 후회가 커지기 때문에 실망할 가능성도 커진다.

문요한 원장이 책에서 언급한 임상사례이다. ‘결혼은 더 좋은 조건을 갖춰야 한다고 미루다 보니 너무 늦어버렸다. 직장도 기회가 몇 번 있었지만 결정을 미루다 기회를 놓쳤다. 마트에서 물건을 사려고 해도 싸게 파는 곳이 있을 것 같아 선뜻 집어들지 못한다. 친구를 만날 때도 약속 장소를 정하지 못해 괴롭다. 가격, 분위기, 맛 등 모든 것을 만족하는 데를 찾다 보니 만남 자체보다 장소를 정하는 일이 스트레스다. 어릴 때는 부모 말만 따르면 됐기 때문에 선택을 고민할 필요가 없었는데 성인이 되고 결정할 일이 많아지니 두렵고 부담스럽다. 대신 누가 정해줬으면 좋겠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맞아 맞아, 딱 내 이야기야”라고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것이다.

정신분석학자 이무석 박사(이무석정신분석연구소장·전 전남대 교수)는 ‘결정장애’를 강박장애와 의존적인 성격에 따른 것으로 분류하고 모두 성장 과정에서 원인을 찾았다. 이 박사는 주간조선과 전화통화를 통해 기사 앞에서 언급했던 A, B 사례를 제시하며 각각 원인을 설명했다. 사례 A는 강박장애로 인해 결정을 내리지 못하는 경우다. 이 박사는 “완벽주의자들에게서 많이 나타난다. 어떤 것을 선택하든 희생이 따르게 돼 있는데 포기를 못하는 것이다. 아이들 학습지를 선택할 때도 몇 달을 알아보고 어렵게 결정한 뒤에 후회와 환불을 반복한다. 결정장애로 괴로워하는 사람들의 심리에는 두려움이 깔려 있다. 불안하고 자신이 없다. 삶이 위험투성이로 보이고 불행한 일이 벌어질까 걱정스럽다. 사례 A의 주인공인 김씨도 성장기에 원인이 있었다. 너무 어렸을 때 대소변 가리기를 혹독하게 훈련받았다. 내 마음대로 하면 무서운 징벌이 따랐다. 어떤 선택을 하든 불행해진다는 무의식이 형성된 것이다. 평소에는 안 드러나다 중요한 결정을 내려야 할 때 무의식에서 불행한 미래를 상상해서 시나리오를 쓴다”고 설명했다.

사례 B는 의존적인 성격으로 인한 결정장애이다. 이 박사는 “엄마가 너무 무섭게 하거나 높은 기준을 요구하는 경우 자기 결정은 뒤에 두고 엄마의 결정을 선택하게 된다. 그래야 안전하니까. 이런 의존적인 성격은 대인관계에서도 자신이 없다. 항상 자기를 버리고 떠날까봐 초조해하고 사람들 비위를 맞추다 보니 자기 결정을 할 틈이 없다”고 말했다.

어떤 일이든 할수록 더 잘하게 되고 안하면 더 힘들어진다. 결정도 피하고 미루다 보면 점점 더 어려워지고 누군가 대신 결정해 주기를 바라게 된다. 서울 송파구 문정동에 사는 이미란(50)씨는 결혼 이후 모든 결정을 남편에게 맡기다 보니 신발 하나 사는 것도 남편이 결정해줘야 한단다. 이야기를 들어보니 계기가 있었다. 결혼 초 남편에게 옷을 사다줬다. 까다로운 남편, 이것저것 트집을 잡더란다. 그 후로 뭘 사든 남편 허락을 구하다 보니 심각한 ‘결정장애자’가 돼버렸다. 이젠 자신의 옷을 살 때도 결정을 못해 스마트폰으로 사진을 찍어 남편에게 보낸단다.

엄마들의 스케줄에 따라 키워진 아이들의 경우도 스스로 결정하고 선택하는 능력을 거세당하기 쉽다. 엄마들은 ‘실패를 줄이기 위해서’라고 말하지만 실패를 두려워하고 자율성을 잃어버린 반쪽 어른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대학교 1학년 남학생입니다. 집이 너무 멀어 기숙사에 들어갔는데 뭔가를 결정해야 할 때마다 너무 힘듭니다. 집에 있을 때는 엄마한테 물어보면 답이 나왔거든요. 9시 강의가 있는 날 꼭 머리를 감고 가야 하나요? 머리만 안 감으면 5분 더 잘 수 있는데 제 머리가 안 감으면 금방 떡이 져요. 사소한 것 같지만 스트레스입니다. 집에 있으면 엄마가 감아야 할지 그냥 나가도 될지 알려줬을 텐데 하필 엄마가 지금 미국에 가셔서 카톡을 안 보는지 답장을 안 주시네요. 상담사님이 좀 결정해주세요.’ 한국청소년상담복지개발원 청소년사이버상담센터 메일에 상담을 요청한 내용 중 하나이다.

인천 김현숙 마음과마음 정신과의원 원장은 전화 인터뷰를 통해 “선택과 실패에 대한 데이터베이스가 없으면 결과에 대해 불안해질 수밖에 없다”고 분석했다. 김 원장은 “인생은 선택의 과정이다. 선택을 하고, 실패를 통해 배우고, 또 다른 선택을 해가는 것이 삶이다. 엄마가 해준 선택에 따라 살다 보니 기준으로 삼을 수 있는 선택과 실패의 정보가 없다. 그러니 인생의 어떤 결정도 내리지 못한다. ‘이 남자와 결혼을 할까요, 말까요’ 물어보는 환자도 있다. 의존적인 성향의 사람들을 보면 엄마의 안전한 선택 뒤에 숨어 어른이 되고 싶지 않은 심리가 숨어있다”고 덧붙였다.

문요한 원장은 결정장애자들의 특징을 3가지로 요약하고 있다. 첫째는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잘 모르고 삶의 기준이나 원칙이 없는 경우가 많다. 자신만의 기준이 없기 때문에 다른 사람의 말에 쉽게 흔들리고 마음이 수시로 바뀌는 것이다. 두 번째는 둘 다 손에 쥐고 놓으려 하지 않는다. 한쪽을 선택하면 다른 쪽은 놓아야 하는데 둘 다 손에 쥐려고 하기 때문에 하나도 잡을 수 없다. 셋째는 실패와 타인의 평가에 예민한 사람들이 많다. 잘못에 대한 책임을 지고 싶어하지 않기 때문에 스스로 나서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문 원장은 또 결정장애자들의 3가지 착각을 지적했다. 21세기 햄릿들의 결정적인 착각은 결정을 미루고 더 많은 정보를 알아보는 것을 ‘신중함’이라고 미화한다는 것. ‘첫 번째 단추를 잘못 끼우면 나머지 단추도 잘못 끼우게 돼 있다’는 말도 결정장애자들이 내세우는 명분이지만 사실은 실패에 대한 두려움이 크기 때문이다. 또 ‘최고의 결정은 결정의 순간에 달려 있다’는 착각이다. 문 원장은 결정에 대한 만족은 결정의 순간보다 결정한 후 과정에 달려 있다고 말한다. 선택에만 집착하다 보면 정작 자신이 무엇 때문에 선택을 하려고 했는지 목적은 잃어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무석 박사는 “완벽한 선택이란 세상에 없다. 마음에 들지 않는 부분도 반드시 따라온다. 선택에 따른 일종의 세금이다. 결정장애로 고민하는 사람들은 ‘나는 왜 이렇게 못났을까’ 자책하는 경우가 많다. 더 안전하고 더 의미있는 삶을 살기 위한 고민이라고 생각하고 자신의 선택에 대해 너그러워질 필요가 있다”고 조언했다.

취재를 하는 과정에서 사람들에게 가장 많이 들은 말은 “나도 결정장애”라는 말이었다. 환경과 교육이 만든 ‘현대판 햄릿’의 대열에서 기자 또한 예외는 아니다. 사실 ‘결정장애’라는 키워드를 집어든 것은 LA 커뮤니티칼리지 사상 한인 최초이자 최연소 교육이사를 지낸 재미동포 티나 박을 인터뷰하고서였다. 그의 인생은 늘 정상에서 급선회를 했다. 인터뷰를 끝내면서 인생의 중요한 순간마다 과감한 선택을 할 수 있었던 비결을 묻는 질문에 티나 박이 이렇게 답했다. 그의 대답이 ‘결정장애’의 답이 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부모님은 항상 제 의견을 물어보셨어요.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을래? 초코 아이스크림을 먹을래? 이런 사소한 일부터 시작해서 집안의 대소사까지도 어린 저에게 질문을 던졌어요. 그래서 저는 늘 답을 준비하고 있어야 했어요. 답을 찾기 위해서는 제가 뭘 원하는지 정확히 알고 있어야 했습니다.”

결정장애를 극복하는 법

결정도 일종의 훈련

인생은 결정의 연속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의 인생을 받아들이는 선택이다. 불공평하고 수동적으로 시작한 삶을 받아들이고 사랑하는 것이다. 자율성은 스스로 선택하고 결정했을 때 발휘된다. 결정도 능력이자 훈련이다.

1. 최고의 결정을 위해 애쓰지 말고 최선의 결과를 위해 노력하라.

결정을 잘 못하는 사람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최고의 결정을 하려는 것이다. 모든 선택과 결정은 아쉬움을 남긴다. 세상에 후회 없는 결정이란 없다. 좋은 결정이란 자신의 선택을 즐기고 그 선택이 최상의 결과로 이어지도록 최선의 노력을 기울였을 때 찾아온다.

2. 선택의 가짓수를 조절하고 때로는 선택 상황을 제한하라.

선택의 폭이 너무 적어도, 넓어도 스트레스를 받는다. 선택의 폭이 좁으면 불만이고 넓으면 선택을 못한다. 또한 삶의 모든 상황을 선택으로 열어두는 것은 피곤하고 어리석은 일이다. 5만원 이하의 제품을 인터넷으로 구매할 때에는 상품평이 가장 많은 제품 중에서, 옷을 고를 때에는 5개 이하의 매장을 둘러보고 선택하겠다는 식으로 자신만의 기준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3. 경험과 선택을 통해 자신의 가치와 취향을 파악하라.

결정을 잘하려면 자기 이해가 대단히 중요하다. 어떤 운동을 할지 판단이 안 선다면 지금까지 했던 운동을 떠올려 보자.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은데 주저하게 되면 미리 체험해보고 판단하는 것도 좋다.

문요한 ‘스스로 살아가는 힘’(더난출판사)

황은순 차장 /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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