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역사를 돌아보면 지도자의 판단과 결심이 그 나라의 흥망성쇠를 가늠한 사례는 허다하게 많았다.”
-후크(Sydney Hook)

이 시대의 지식인으로서 누구인들 ‘백범일지’를 읽고 가슴 저려보지 않은 사람이 있으며, 이 시대의 나이 먹은 세대로서 이승만 찬가를 불러보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그 두 거목은 우리에게 그렇게 각인되어 있으며, 그들을 미워하는 사람이나 숭모하는 사람 모두 그들의 그늘로부터 자유롭지 않았다. 요즘 들어 두 사람의 역사적 평가는 마치 기세 싸움이라도 하듯이 날카롭게 대립하면서, 한쪽은 건국대통령 만들기 작업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가 하면 다른 한쪽에서는 기이하게도 진보 진영의 비호를 받으며 역사의 재조명을 받고 있다. 이승만(李承晩)이 과연 건국대통령인지, 우파 보수의 원조인 김구(金九)의 묘소에 진보 진영이 몰려가 국경일 행사를 따로 치르는 것이 옳고 그른지의 여부를 떠나 그런 모습들이 그렇게 산뜻하게 여겨지지 않는 것이 지금의 현실이다.

두 사람의 역사적 평가가 마치 대결 구도처럼 흘러감에 따라 그에 대한 언급도 조심스럽고 주저하게 되는 것이 사실이다. 이승만의 경우는 명징하게 말년의 과오가 있기 때문에 비판이 비교적 자유롭지만, 그와는 달리 김구를 평가하면서 좋지 않은 말을 하는 것은, 이완범(李完範·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의 푸념처럼, 요즘과 같은 ‘김구 신화의 시대’에 일종의 금기 사항(untouchable)처럼 되어 있어 이를 다루는 것이 매우 부담스럽다. 그러나 이 두 사람의 언행과 처신이 현대사에 남긴 발자취가 너무 깊어 이들에 대한 논의를 거치지 않고서는 한국 현대사의 재구성이 어렵다는 데 필자들의 어려움이 있다. 이럴 경우에는 누구를 아끼거나 미워하는 감정을 떠나 이제는 역사 속의 인물에 대한 논의에 좀 더 너그럽기를 바라면서 글을 시작하려 한다.

나이를 먹어가면서 지난날을 되돌아보노라면 많은 일이 그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은 운명적이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다. 그 운명이라는 것이 세상살이에서의 만남과 헤어짐이든, 아니면 토인비(Arnold Toynbee)가 그토록 자주 쓰던 초자연적인 어떤 업장(業障·karma) 때문이었든, 우리의 의지와는 관계 없이 역사는 전개되어 왔다. 그러한 운명 가운데에서도 특히 출생과 신분의 문제는 우리의 뜻대로 된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조국을 선택하여 태어날 수 없듯이, 부모를 선택하여 태어나지 않았다. 그런 점에서 이승만과 김구를 논의할 때 우리는 두 사람의 출신 성분을 먼저 다루지 않을 수 없다. 출신 성분이 다른 사람들 사이에서도 우정이니 동지애니 하는 것들이 가능할까?

이승만은 1875년 황해도 평산(平山)에서 출생했다. 가문은 양녕대군(讓寧大君)의 후손으로서, 태몽에 용(龍)을 보았기 때문에 승룡(承龍)이라 초명(初名)을 지었다 한다. 용을 잇는다 함은 왕가의 후손에 대한 긍지를 담고 있다. 이승만은 왕족이라는 우월감으로 독선적인 태도를 보이곤 했다. 그는 자신이 왕실의 후손임을 강조함으로써 멸망한 왕조에 대한 민중의 전근대적 연민에 호소했다. 손세일(孫世一)의 증언에 따르면, 이승만은 평소에 “왕손”이니 “나의 백성들”이니 하는 용어를 즐겨 썼고, 천연스럽게 “과인(寡人)이…” 등의 용어를 썼다고 한다. 그것은 별 뜻 없이 나온 실언이 아니라 그의 진심이었을 것이며, 그의 행보가 어떠했든 간에 그가 유교적 권위주의에 얼마나 깊이 매몰되어 있었던가를 잘 나타내 주고 있다.

이승만은 1890년 박(朴)씨와 결혼하여 아들(泰山)을 두었으나 미국 유학을 떠나면서 이들의 사실혼은 종식되었다. 박씨 부인은 그 후 수절하다가 한국전쟁 중 신설동(新設洞)에서 북한군에 의해 납치되었다. 1894년에 이승만은 배재학당(培材學堂)에 입학하여 조선어 교사가 되었으며, 1896년에는 독립협회(獨立協會)에 가담하여 만민공동회(萬民共同會) 대표로 활약하다가 1899년에 투옥되었는데 이때 ‘독립정신’을 저술했다. 이때 그의 궁극적 관심은, 흔히 알려진 바와 같이 애국자로서의 반일이 아니라 반러시아주의에 몰두하고 있었다는 것은 특이한 현상이었다.

1904년 8월에 출감한 이승만은 11월에 도미하여 하와이와 로스앤젤레스를 거쳐 워싱턴에 도착했다. 이 무렵에 그의 아들 태산이 뒤따라 왔으나 곧 죽었다. 아내를 데려가지 않고 아들을 데려갔다는 사실이 매우 상징적이다. 그는 그곳에서 조지 워싱턴대학을 졸업(1907)했으며, 컬럼비아대학과 유니언신학교에서 강의를 들었고, 하버드대학에서 석사학위를 받은 뒤, 프린스턴대학에서 ‘미국이 주도하는 중립(Neutrality as Influenced by the United States·1910)’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 학력은 미국인도 쌓기 어려울 만큼 화려하다. 이때 그는 당시 프린스턴대학 총장이었던 윌슨(W. Wilson)을 만나 후의(厚誼)를 입었는데 이것이 그 후 그의 국제정치 인식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김구는 1876년 황해도 해주에서 경주 김씨(경순왕敬順王의 33대손)로 태어났다. 그는 조선조 역신(逆臣)인 김자점(金自點)의 후손으로서, 멸문의 화를 피해 해주(海州)에 숨어들어간 가문의 후손이었다. 그가 역신의 후손이었다는 사실은 그의 일생을 지배하는 외상(trauma)이 되었고, 왕손을 자처하는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늘 주눅 들게 만들었으며, 이승만도 의도적으로 그 상처를 건드림으로써 김구를 제압하려 했다. 평산과 해주가 그리 멀지 않은 같은 황해도 땅이라는 점이 그들을 묶어주는 끈이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러한 연고가 한 살 아래인 김구로 하여금 이승만을 깍듯이 ‘형님’으로 대접하게 만들었으며, 이런 인연이 늘 김구로 하여금 한 수 지고 들어가게 만들었다.

김구는 정식 교육을 받지 못하고 서당에서 한학을 공부한 것이 전부이다. 그리고 ‘마의상서(麻衣相書)’를 통해서 자신의 관상이 좋지 않음을 알고 심상(心相)의 중요성을 깨달아 항상 마음 좋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했다. 그가 ‘마의상서’를 읽었다는 것은 두 가지 점에서 놀라운데 첫째는 그 어려운 한문을 해득할 만큼 한학이 깊었다는 점이고, 둘째는 자신의 비운을 읽었다는 점이다. 그는 아마도 ‘마의상서’에서 “좁은 이마가 밑으로 내려오면서 광대뼈가 튀어나오고 다시 하관이 빠른 얼굴은 운이 비색(否塞)하며 아내의 운이 나쁘다(刑妻之格)”는 대목에 낙담한 것 같다. 그런 아픔 탓인지, 김구의 신분적·학문적인 열등감은 왕족 출신인 이승만의 우월감이나 엘리트 의식과 비교하여 좋은 대조가 된다.

김구는 17세가 되던 1894년에 “상놈으로 태어난 것이 한이 되어” 동학(東學)에 입도했다. 이러한 현상은 그가 당시까지만 해도 민족이니 국운이니 하는 대승적인 문제보다는 자기 구원의 소승적인 문제에서부터 신앙생활을 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 뒤로 그는 국사범으로 중형을 받고 수형하던 중에 인천감옥을 탈옥하여 도피 생활을 하면서 중이 되었다. 그가 승려 생활을 한 것은 1898년 가을부터 1899년 가을까지였다. 도피 중에 하동 쌍계사(雙磎寺)에 들른 것이 그가 불교와 인연을 맺게 된 최초의 계기였다. 그 후 그는 갑사(甲寺)에 들렀다가 다시 “구경 삼아” 공주 마곡사(麻谷寺)를 찾아가 승려가 되었다. 김구는 노승 하은당(荷隱堂)의 설득으로 하룻밤을 생각한 끝에 중이 되었을 때 불교의 오묘한 뜻에 감동되었다거나 아니면 해탈을 맛보고자 하는 불심이 있었던 것도 아니며, 다만 쫓기던 몸이 불사의 아늑함에 입도를 작심한 것이니 이는 현실도피적인 의미가 있다. 그는 원종(圓宗)이라는 법명을 받고 승려 생활을 하면서도 심화(心火)를 가슴속에 감추고 살았다.

김구는 얼마 동안 비승비속(非僧非俗)의 삶을 살다가 서울로 올라와 28세 되던 해에 최준례(崔遵禮)와 결혼을 하였는데, 준례라 함은 천주교의 세례명인 줄리아(Julia)의 한문식 표기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보건대 아내는 혼전에 이미 천주교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김구도 한때 상동교회(尙洞敎會)에서 믿음 생활을 했다. 젊은 날의 신앙생활은 마치 연어의 귀소(歸巢) 본능과 같은 것이어서 김구는 귀국한 뒤 말년에는 서대문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정책 연설에서 성경을 인용하는 빈도도 높아졌다.

김구의 신앙생활을 보노라면 그의 기구한 인생의 축약판과 같다. 서당에서 고명한 스승을 만나 유교에 심취했다가 동학 접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전하고, 다시 중이 되었다가 나중에는 천주교 신자인 아내를 맞아 성경을 읽으며 기독교도로서 일생을 마친 그의 신앙 편력이 곧 그의 삶의 모습이었고, 가치의 수용과 고민의 과정을 보여준다. 이러한 삶을 이승만의 외길 기독교 인생과 견주어보면, 인간은 자신의 출생과 젊은 날의 체험으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을 절감하게 된다. 인간 관계에서 마음의 상처나 유대감은 이념이 달라서 생기는 측면보다는 일상의 언행과 그로 인한 보대낌으로 생기는 것이다.

김구는 3·1운동이 실패하는 모습을 보면서 상하이(上海)로 건너가 임시정부에 가담했다. 그 무렵에 이승만은 미국에 있으면서 임정의 국무총리로 당선되었다. 그런데 이승만은 그 직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미국에서 스스로를 대통령(President)으로 불러 말썽이 되었다. 이 분규는 결국 임시헌법을 국무총리에서 대통령으로 조문을 바꾸는 것으로 해결되었지만 출발부터 임정과 이승만이 삐걱거리는 원인이 되었다. 1919년 9월 6일에 대통령으로 당선된 뒤에도 이승만은 주로 미국의 필라델피아에 머물면서 외교를 펴고 있었다. 1920년 12월이 되어서야 상하이로 건너간 이승만은 대통령에 취임하여 3개월 동안 머물다가 미국으로 돌아가 너무 오래 상하이에 귀임하지 않았다. 그가 임시정부를 외면하고 미주에 머물면서 대통령으로 자칭했다는 사실은 단순한 직무 이탈이 아니라 상하이 임정보다는 한성(漢城) 정부를 법통으로 생각하고 있는 듯한 인상을 줌으로써 임정 요인들을 불쾌하게 만들었다.

애당초 이승만이 상하이 임정 의정원에서 무효 1표를 제외한 만장일치로 대통령에 당선되었을 때만 해도 그가 미국에 머무르고 있다는 사실은 부러움의 대상이 되어 대통령으로 당선되는 데에 중요한 인자가 된 점도 있지만, 그 반대로 그것이 꺼림의 대상이 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대통령에 당선되고서도 상하이로 오지 않고 미국에서 활약한 사실을 우려한 임시의정원에서는 아예 “대통령이 자신의 임의대로 직책을 함부로 떠나는 일이 없도록” 헌법으로 못을 박았다.(‘대한민국 임시 헌법’, 1919년 9월 11일 제16조) 대통령의 출타를 헌법에 규정하는 이 희극은 당시 임정과 이승만의 불편한 관계를 극명하게 보여준다.

김구가 이승만의 처사에 불평을 품게 된 또 다른 사실은 임정의 재정난(財政難)이었다. 애당초 이승만을 대통령으로 당선시킬 때만 해도 임정 요인들은 이승만이 미국을 배경 삼아 재정적으로 지원해줄 것을 무언중에 기대하고 있었고 이승만 자신도 그 문제는 “내가 해결하겠노라”고 여러 차례 장담한 바 있었다. 그러나 그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다. 그가 임시정부를 위해 송금해준 액수는 200달러로 단 한 번뿐이었다.(구매력 기준으로 볼 때 그때의 1달러는 지금의 우리돈 2만원 정도이다.) 이 점은 이승만이 임정을 홀대해서가 아니라 실은 그 자신도 어려운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에 임정을 재정적으로 도와줄 형편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이승만과 임정의 사이가 껄끄럽던 터에 일이 안 되느라고 이른바 이승만의 위임 통치 파동이 일어났다. 이승만은 미국에서 외교우선주의에 따라 활동하던 시기에 지난날의 은사이자 당시 미국의 대통령이 된 윌슨에게 “국제연맹이 한국을 위임 통치해줄 것”을 요청한 사실이 있었다. 이는 임정은 물론 재미한인대표자회의와 사전 연락이 없이 그가 단독으로 취한 행동으로서, 국제연맹에 의한 위임 통치가 일본 지배를 벗어날 수 있는 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미국에 위임 통치를 요구했다”고 와전되어 임정은 그를 탄핵하여 해임(1925)시켰다. 이것이 이승만으로서는 평생의 한이 되었고 그 앙금이 해방정국에까지 이어졌다.<연재 4회 참조>

이승만과 김구는 현실 인식에서도 많은 차이를 안고 있었다. 김구는 테러리즘(terrorism)에 몰두하고 있었다. 엄혹한 식민지 지배 아래에서 성숙한 민중의 육성이 불가능하다는 제약, 3·1운동의 경우에서 볼 수 있듯이 민중적 지지 기반이 취약하여 민중 봉기나 지지에 의한 국가 건설이 불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위와 같은 민중주의의 체념의 결과 윤봉길(尹奉吉)이나 이봉창(李奉昌)의 경우처럼 순교자적 희생정신으로 무장된 개별적 테러리스트에 의한 효과에 대한 기대감이 그로 하여금 테러리즘에 몰두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한국 사회에서, 더욱이 김구를 숭모하는 무리들 사회에서는 이 테러리즘이라는 용어에 대단히 민감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그와 같은 오해나 비난을 피하기 위해 테러리즘을 학술적으로 정의하자면, “자금이나 훈련이 부족하고 적군의 엄혹한 탄압으로 말미암아 정규적이고도 조직적인 투쟁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순교자적 우국심으로 무장된 개별적 투사가 단독의 힘으로 적군에게 무장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자신의 명분과 기개를 드높이고 적군에게 공포를 불러일으키는 투쟁 방법”을 뜻한다. 아마도 한국독립운동사를 전공하는 학자들 사이에서는 의열 투쟁이라는 용어를 선호하는 것 같은데 본질적으로 큰 차이가 있는 것 같지는 않으나, 테러리즘에 대한 알러지는 아마도 중동이나 팔레스타인에 대한 연상 심리의 결과가 아닌가 여겨진다.

김구가 테러리즘에 몰두한 것과는 달리 이승만의 노선은 외교우선주의였다. 이승만은 향후 한국 사회에서 미국이 미칠 정치적 영향을 정확히 간파하고 있었다. 따라서 그의 친미주의의 밑바닥에는 미국에 대한 호의적 이해와 함께 친미가 그의 정치적 생존과 부합한다는 이중성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한국의 독립은 외교에 있다”는 것이 그의 독립운동의 방략이었다. 폭력적인 방법은 승리를 쟁취할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이승만의 정치 고문이었던 올리버(Robert T. Oliver)의 증언에 따르면, 무장투쟁은 한국에 대한 탄압을 가중시킬 뿐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그는 광복군(光復軍)의 창설조차도 반대했다.

서구 정치의 현장에서 술수와 전략을 체득한 이승만의 생각과 처신이 김구의 그것과 다른 것은 단순히 노선의 차이를 넘어 두 사람의 인간적인 유대마저도 멀어지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불행한 일이었다. 이승만은 이러저러한 보대낌을 겪으면서 임정 세력에 대하여 분명히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한 감정의 연속선상에서 광복이 되자 이승만은 임정 세력이 해체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임정과 “별개의 조직이라는 낭설이 두려워” 이를 내색할 수가 없었다. 그는 독립촉성중앙협의회에서 “이 말은 밖에 나아가서는 말들 마시오.… 내 생각으로는 임정을 해산하지 않으면 안 됩니다.”(‘독립촉성중앙협의회록(1/1)’)라고 말했다.

임정을 둘러싼 이러한 갈등은 1947년에도 누그러지지 않았다. 예컨대 이승만의 그와 같은 의중을 잘 알고 있었던 경무부장 조병옥(趙炳玉)은 1947년 5월 15일, 대전(大田)에서 소위 임정봉대추진위원회 주최로 개최 예정인 6도(道)대표대회의 주최 단체와 목적이 불법적이라는 이유로 군정장관의 명령으로 집회를 금지시켰으며, 수도경찰청장 장택상(張澤相)은 임정봉대추진회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것이 다시 김구에게 상처를 주었다. 그러나 이승만과 김구가 화목하지 않았다고 해서 그것이 곧 두 사람의 권력 투쟁이라고 보는 것은 잘못이며 특히 김구의 뜻을 오해하는 것이 될 것이다. 김구는 임정 수반을 지냈고, 조국 전선에서 열혈한 삶을 산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는 권력 의지가 없었다. 그러나 달리 생각하면 국가 수반에게 권력 의지가 없다는 것은 정치학의 입장에서 보면 흠결이 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그는 정치적 감각이나 술수를 타고난 사람도 아니고 그런 것에 마음을 쓰지도 않았다. 그런 점에서 그는 담백한 인물이었다. 그 점이 오히려 군정 당국자들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는 “형님이 먼저”라는 겸손함과 금도를 지켰고, 이승만과의 관계에서 늘 한발 비켜 서 있었다.

군정은 김구에 대한 민중의 애정과 그의 비중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의 고집스러움은 늘 군정을 어렵게 만들었다. 이를테면 김구는 1945년 11월 23일, 개인 자격으로 임정 요인들과 함께 미군 수송기 편으로 귀국했다. 귀국에 앞서 김구는 임정의 법통을 내세우면서 미 육군 아시아전구사령관 웨드마이어(A. C. Wedemeyer) 장군에게, 임정 요인은 귀국 후 미국 헌병의 보호를 받지 않을 것과, 입국 후의 치안 유지는 임정이 맡을 것과, 임정이 군대를 편성할 것과, 군정은 임정의 정치 활동에 간섭지 말 것을 요구했다. 점령군으로 진주하는 미국의 지휘책임자에게 이런 요구를 하는 것을 들으며 웨드마이어로서는 기가 막힐 일이었고, 김구가 사태를 너무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김구와 정치적 상담을 하는 것에 의미를 두지 않으려 했다. 미국이 보기에 김구는 정치적 감각이 전혀 없거나 어두운 인물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미국이 이승만을 전적으로 신뢰한 것은 아니었다. (다음 회에 언급하듯이) 미국은 이승만 제거 계획(Ever-ready Plan)을 세울 만큼 그를 혐오했다. 하지는 이승만이 건국 초기에 집권할 경우에 그가 독재자가 되리라고 확신하고 그렇게 될 경우에는 한국에서 미국의 입지를 더욱 곤혹스럽게 만들 것이기 때문에 이승만의 부상을 마음 내켜 하지 않았다. 미국인의 눈에 비친 이승만은 프랑스혁명 전야의 부르봉왕조(Bourbon)의 후손처럼 보였다.

이승만의 그와 같은 권력 의지가 가장 잘 나타난 것이 곧 최능진(崔能鎭) 사건이었다. 평남 강서(江西) 출신인 그는 미국 스프링필드대학(Springfield University)을 졸업한 지식인으로서 일제 치하에서는 독립 운동과 투옥 생활을 했고, 광복이 되자 경무국 수사과장에 취임하여 당시의 친일적 분위기 속에서 양식과 능력 있는 경찰로 중망을 받고 있었다. 문제는 그가 조병옥과의 의견 충돌로 본의 아니게 강제 퇴임하고 이에 대해 강력하게 저항했다는 점이었다. 이승만이 최능진을 그토록 증오한 이면에는 건국 초기의 국가주석 추대 운동에서 최능진이 서재필(徐載弼)을 지지했다는 사사로운 감정이 개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최능진은 이승만에 대한 저항으로 1948년의 5·10 총선거에서 이승만에 맞서 동대문 을구에서 출마했다. 무투표 당선을 바랐던 이승만 계열은 최능진의 사퇴가 뜻대로 이뤄지지 않자 서북청년회를 시켜 등록 마지막 날에 그의 서류를 탈취함으로써 결국 이승만의 무투표 당선을 달성했다.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그에 대한 억압은 끝내 혁명의용군 사건으로 비화했다. 죄목은 정부 전복 음모였다. 최능진은 전(前) 여수·순천 주둔 14연대장으로 김구의 열렬한 추종자였던 오동기(吳東起)와 더불어 러시아혁명 기념일에 서울로 진격하여 정부를 전복할 계획을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오동기와 최능진은 얼굴도 모르는 사이였다. 최능진은 복역을 마치고 출옥했다가 다시 체포되어 한국전쟁 중에 처형되었다. 이승만 세력은 김구와 최능진을 단일 사건으로 타진(打盡)하고자 했다. 이 드라마의 연출자는 김창룡(金昌龍)이었다.

역사란 때로는 기묘하고도 소설보다 더 소설적일 때가 있다. 최능진은 곧 현대사에 자주 오르내린 정수장학회장 최필립(2013년 사망)의 아버지이다. 여순사건이 어디까지 사실이고 어디까지가 왜곡이든 간에 그 사건에 연루된 박정희(朴正熙)와 최능진의 자녀들이 다시 손을 잡고 현대사를 편직(編織)해 나간 스토리를 얘기하기란 불편하지만 역사란 그렇게 퍼즐 맞추기처럼 엮어져 갔다. 그 수많은 사연들을 가슴에 묻은 채 아무 기록도 남기지 않고 하나둘씩 증인들이 사라지는 것이 안타깝다.

<다음 호에 계속>

신복룡

전 건국대학교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 한국근현대사와 한국정치사상사를 공부하고 가르쳤다. 건국대학교 중앙(상허)도서관장과 대학원장을 역임한 후 퇴직하여 집필 생활을 하고 있다. 한국정치학회 학술상(2001·2011)을 받았다.

신복룡 전 건국대 정치외교학과 석좌교수·정치학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