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노이치바 설립자인 마스다 마사루 교수.
치노이치바 설립자인 마스다 마사루 교수.

지난 7월 17일 저녁 마스다 마사루(增田優) 교수를 만나러 가는데 도쿄에는 무더위를 식히는 여름비가 흩뿌렸다. 대도시 퇴근시간의 러시아워 때문에 나는 약속시간보다 30분 늦었다. 하지만 도쿄 시내의 한 한국 학교에서 내 일행에게 특강을 해주기 위해 기다리던 마스다 마사루 교수는 지각생들을 웃는 얼굴로 맞았다.

그는 “오늘 새로운 걸 배워서 기쁘다”며 끊임없는 지식욕을 과시했다. “덕분에 세종대왕에 대해서 공부를 했습니다. 일본에서는 요즘 동상을 세우는 일이 거의 없는데 오늘 내가 강의한 이 한국 학교에 세워진 세종대왕 동상을 보고 궁금하여 교감 선생님께 이것저것 물었습니다. 세종대왕에 대해서 들으니 관련 과목 두 가지 정도는 개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세종대왕이 얼마나 훌륭한 왕인지를 알면 나쁜 왕이 누군지도 알게 될 수 있습니다. 조선의 세종대왕과 관련된 과목 하나와 조선의 최악의 왕과 관련된 과목 이렇게 두 개는 개설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마스다 마사루 교수는 자율적인 개방 학습 네트워크(Voluntary Open Network Multiversity)를 지향하는 일본의 지식협동조합인 ‘치노이치바(知の市場·Free Market of·by·for Wisdom)’를 설립한 인물. 도쿄 오차노미즈여자대학에서 수학을 가르치는 60대 초반의 학자. 그는 일본에 새로운 형태의 평생학습 시스템을 선보여 주목받고 있다. 그가 2003년 설립한 치노이치바는 지금까지의 수료자만도 1만6000여명이다. 이날 나를 포함해 우천식 한국개발연구원(KDI) 선임연구위원, 최운실 아주대 교수, 이성 경기도 평생교육진흥원장, 이재실 한경대 교수 등 한국 참관단은 치노이치바 시스템을 운영하는 그의 교육 철학을 듣기 위해 그에게 특강을 청했었다.

마스다 교수는 도쿄대학을 졸업한 수학자다. 학생운동이 극렬하던 1970년대에 도쿄대를 다니며 학교 시위에도 참여해 돌을 많이 던졌다고 한다. “돌을 던지면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는데, 저 자신이 포물선을 많이 그리다 보니까 포물선을 연구하는 수학자가 된 거 같습니다”라며 껄껄 웃었다.

평범한 교육자이자 학자로 성장하던 그가 2003년 지식협동조합 운동을 시작하게 된 것은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는 지름길이 결국 교육이라는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교육의 격차는 경제적 격차를 가져옵니다. 결국 경제적 격차를 극복하는 방법은 교육을 통해 가능합니다. 학교에서 생긴 격차는 평생에 걸친 학습으로 계속 극복되어야 합니다.”

이 말을 하는 그의 눈은 열정으로 가득 차 있다. 그 뜨거움으로 평생학습의 새로운 장을 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가 선보인 치노이치바의 이념은 호학호교(互學互敎). ‘서로 배우고 서로 가르치자’는 뜻이다. 뭔가를 가르치고자 하는 사람들과 뭔가를 배우고자 하는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모여 무료로 지식을 주고받는다는 의미다. 이 이념은 치노이치바를 지금까지 이끌어온 힘이다. “치노이치바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이념입니다. 자율적이고 무료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치노이치바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우리 이념에 강하게 동의해야만 치노이치바가 계속될 수 있습니다.”

자율적 참여라는 것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됐지만 무료교육이라는 것은 전혀 이해가 가지 않았다. 학습자가 돈을 내야 책임감도 생기고 출석률도 높아진다는 것은 나만의 생각이 아닐 거다. 무료에서 나오는 도덕적 해이 때문에 한국의 경우 공공기관이 운영하는 직업훈련 과정에도 최소한의 자기 부담금을 부여하고 있는 실정이다.

마스다 마사루 교수의 생각은 달랐다. “가르치는 게 좋은데 무슨 돈을 받습니까? 그리고 배우는 사람들이 돈을 내면 가르치는 사람이 눈치를 보게 됩니다. 사람은 돈 낸 사람의 말을 듣거든요. 교수자가 학습자의 눈치를 보게 되면 엄격한 교육을 하기 힘들고, 엄격한 교육을 못하면 당연히 교육의 질은 떨어집니다. 그러면 치노이치바에는 위기가 오겠지요. 정부 보조금도 전혀 없습니다. 공적인 자금을 받다 보면 관리하는 사람이 필요해서 가르치고 배우는 일에 전념하기 힘듭니다.”

치노이치바에서 가르치는 강사의 구성은 33%가 대학 및 학회에 소속된 교수, 33%는 전문기관 및 연구기관에 소속된 전문가, 26%가 산업계 및 업계 단체 소속으로 구성되어 있다. 자신의 소속기관에서 제도화된 강의에 갈증을 느낀 전문가들이 대거 치노이치바에서 자신이 추구하는 강의를 하고 있다고 했다. 강의는 마스다 교수가 재직하는 오차노미즈여자대학 등 주로 됴쿄 시내 대학들의 강의실을 빌려서 한다. 치노이치바의 이념을 지지하는 대학들이 무료로 강의실을 빌려주고 있고 독지가들의 기부도 있다고 한다. 과목당 수업기간은 대학처럼 학기제를 채택해 15주를 들으면 수료가 가능하다. 무료이기 때문에 시간이 허락하는 한 몇 개의 과목을 들어도 상관없다.

치노이치바는 2004~2008년 형성기, 2009~2012년 전개기, 2013~2014년 완성기를 거쳐 올해부터는 진화기 단계로 접어들고 있다는 설명이다. 2004년 44개 과목, 346명의 강사가 수업을 담당하던 것이 2014년의 경우 95개 과목에 652명의 강사로 확대되었다. 같은 시기 수강생은 1191명에서 2873명으로 세 배 가까이 늘어났다. 개강과목도 화학, 생물, 교육, 인재육성, 예술, 국제 등 다양하다. 2009년의 경우 3407명의 수강자 중 2121명만이 수료하여 수료율은 62%에 불과했다. 2014년의 경우 2873명 수강생 중 2093명이 수료하여 수료율이 73%로 높아졌다. 마스다 교수의 설명은 이랬다. “엄격한 교수 학습과정 관리의 당연한 결과입니다. 출석과 보고서를 매우 엄격하게 점검하고 있습니다. ‘호학호교’의 이념을 가지고 이를 실천하는 사람만 수료가 가능합니다.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이 치노이치바에 참여하면서 수료율도 최근에 더 높아지고 있는 겁니다. 초기에는 50%에 불과했거든요.”

‘엄격하게 가르치는 교수’들이 ‘열심히 공부하는 학생’들을 끌어모으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일본에서 보통의 평생교육 프로그램의 경우 취미·여가와 관련이 있기 때문에 참여자의 대부분이 60대 이상이고 여성이 다수이다. 치노이치바는 그와 정반대이다. 연령대별로는 20대가 30%, 50대가 21%이고 40대가 20%로 그 다음을 이룬다. 30대는 15%다. 한창 일하는 연령대가 학습자의 대부분을 이룬다. 또한 남성 학습자가 73%로 여성의 3배에 달했다. 수강생의 직업은 다양하다고 한다. 33%가 제조업 종사자, 21%가 3차산업 종사자다. 공무원과 연구기관 소속이 7%, 국공립학교 교원이 4%, 사립학교 교원이 5%로 치노이치바가 ‘전문가들의 학습기관’ 역할도 하고 있다.

배우고 가르치는 학습공동체에 ‘이치바(시장·市場)’라는 이름이 어색했다. “시장이라는 말을 쓴 이유 중 하나는 ‘무료’라는 개념을 강조하기 위해서입니다. 영어로 ‘프리마켓(Free Market)’이라고 표기한 것은 자유시장이 아니라 공짜시장이라는 의미죠.(웃음) 그리고 누구든지 출입이 가능하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출입을 제한하는 시장, 보신 적이 있습니까?” 치노이치바는 시장을 넘어서는 초(超)시장적 개념이었다. 시장주의라는 말이 ‘행복하지 않은 경쟁’과 동의어가 된 현실에서 ‘지혜의 시장’은 가르치고 배우는 행복을 실천하고 경험하는 공동체적 시장이라는 점이 의미심장하다.

“치노이치바는 지혜를 추구합니다. 지혜는 지식에 덕이 더해진 거죠(Wisdom= Knowledge+Virtue). 지식의 전달은 온라인 교육으로 가능하지만 지혜는 함께 모이는 면대면 교육을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책이 아니라 현장에 뿌리내린 경험과 지혜는 뜻이 통하는 사람들이 모여야 공유가 가능합니다. 이렇게 현장에 쌓인 교양을 모든 시민이 갖도록 해야 합니다. 일본 대학의 문제는 구성원이 동질적이어서 시야가 좁고 이론 중심적이라는 점입니다. 치노이치바에는 이런 대학의 결점을 극복하여 공부다운 공부를 해보려는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당연히 현장의 낮은 목소리를 중요시합니다. 가르치는 사람이 배우는 사람이고, 배우는 사람이 가르치는 사람이지요.”

일본의 수학교수가 들려주는 교육에 대한 철학은 예전에 한국의 서당에서 훈장님께 들었을 법한 내용이었다. 그러나 그 훈장님의 말씀은 진부한 것이 아니라 맛있는 생선회처럼 신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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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대권 연세대 교육연구소 객원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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