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28일 황교안 국무총리는 69일간 나라를 흔들었던 메르스(MERS·중동호흡기증후군) 발병 사태가 종식됐다고 선언했다. 메르스 사태는 단순히 외래 전염병 문제에 그치지 않는다. 보건 당국의 대응에 대한 행정적인 문제, 이를 둘러싼 불신과 공포의 문제, 더 나아가 한국 사회 기저의 문제까지 복합적으로 보여줬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가다. 주간조선이 만난 전문가들은 메르스 사태를 통해 본 한국 사회를 ‘울분 사회’로 진단했다. 20~30대 청년층에서는 불신과 냉소, 50~60대 장·노년층은 울분의 양상을 보였다는 것이다.
일러스트 김보민
일러스트 김보민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사람들이 보인 불신, 사회 불안, 분노 감정의 분출은 ‘울분’이란 단어로 설명된다고 한창수 고려대 교수(정신건강의학)는 말했다. “이건 메르스라는 그냥 단일 사건에 대한 분노, 불신이 아니다. 오래 지속된 울분 상태에서 오는 무기력함, 불안, 공포로 볼 수 있다.” ‘울분(Enbitterment)’은 적응장애의 일종으로, 지속적인 울분에 차 있는 상태이다. 개인적으로는 실직, 실패 같은 경험, 사회적 부조리를 목격하는 게 계속되면 생겨난다.

50~60대 이상 장·노년층이 정신의학적으로 보자면 한국 사회에서 울분 상태가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연령대다. 전상진 서강대 교수(사회학)는 “광복 후 지난 70년 동안 한국 사회는 고도성장을 통해 경제 발전을 이뤄냈지만 모든 사람이 그 혜택을 입지 못했다. 불공정한 사회에 대한 불만은 커지고, 소득 양극화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정부나 기업에 대한 불신도 커져 외국 PR컨설팅사 에델만에 따르면 미국, 인도, 중국, 유럽 국가 등을 포함한 27개국 중 정부 신뢰도는 한국이 제일 낮았다. 그마저도 해마다 떨어지고 있는 추세다. 50~60대의 입장에서 보자면 평생 사회와 가족을 위해 살았는데, 보상은 없는 셈이다.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서 분노와 화가 쌓이게 된 것이다.

50~60대가 다른 연령층에 비해 메르스 사태 때 보인 민감성은 수치로 확인된다. 한국갤럽이 지난 6월 둘째 주(6월 9~11일)와 셋째 주(16~18일)에 조사한 내용이 메르스 사태를 전후로 바뀐 중장·노년층의 감정을 보여준다. 6월 둘째 주까지만 하더라도 ‘메르스 본인 감염이 우려된다’고 말한 40대는 57%로 과반수를 살짝 넘었고, 50대와 60대는 46%로 20대와 30대의 60% 넘는 우려에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셋째 주 상황이 변했다. 20대의 우려는 전주 59%에 비해 3%포인트 떨어진 56%로 비등한 수준이었지만, 40대는 65%, 50대 61%, 60대 59%가 ‘감염이 우려된다’고 밝혀 불안감이 급등한 것으로 드러났다.

확산된 불안감은 쉽게 회복되지도 않았다. 현대경제연구원이 발표한 ‘최근 소비심리 움직임의 특징과 시사점’ 보고서에 따르면 소비자심리지수는 메르스 사태를 기점으로 노년층에 더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 카드사가 밝힌 신용카드 결제 이용금액 추이를 봐도 6월 첫째 주에 전월 대비 10% 감소세를 보인 20대의 신용카드 이용 금액은 셋째 주 들어서는 1.2% 상승세를 보였지만, 50~60대의 신용카드 사용 금액은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특히 60대는 다른 연령대에 비해서도 카드사용 금액 하락세가 컸다.

메르스 사태를 통해 관찰할 수 있는 한국 사회의 정신병리학적 문제가 울분 상태라면, 50~60대의 울분 감정은 매우 깊고 강하다. 울분 감정의 원인, 증상에 이들의 모습이 적절하게 들어맞는다. 울분은 오래되고 지속적인 상실감, 불공정함 등으로 발생한다. 고도성장기를 거치며 ‘경제발전에 보탬이 됐다’고 자부하지만, OECD 국가 중 1위로 50%에 가까운 노인빈곤율을 보면 50~60대의 내면에는 우울함, 분노 등이 쌓일 수밖에 없다.

이런 울분 상태는 내외면의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행동을 불러온다. 지난 7월 27일 대검찰청 범죄 분석 자료에 따르면 2013년 형법상 범죄 가해자 중 나이가 60대 이상인 사람은 7만6105명으로 전체 범죄 가해자의 7%를 차지했는데, 10년 전에 비하면 2배 넘게 증가했고 2011년 6%, 2012년 6.6%에 비해서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20~30대 범죄 가해자가 차지하는 비율이 2004년 18.6%에서 2013년 14.9%로 감소한 것과 대비되는 부분이다.

더욱이 경찰 범죄 통계를 보면 노인이 저지른 살인이나 강도, 방화 등 강력범죄 1700여건 중 범행 동기가 ‘우발적’인 사건이 337건으로 가장 많았다. 폭행 범죄에도 마찬가지여서 우발적으로 폭행을 저지른 것으로 분류된 사건이 5973건으로 6000건에 가깝지만, 가정불화 같은 이유는 200건을 겨우 넘기는 수준이다. 박현식 호서대 교수(노인복지학)는 “자포자기 상태에서 우발적인 범죄가 나온다”며 “가족과 사회로부터 소외받는다는 느낌, 실제적인 빈곤 등 울분을 일으킬 만한 요인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발생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7월 23일 열린 ‘좋은의사연구소’ 주최 ‘집단공황에 빠진 대한민국’ 심포지엄. ⓒphoto 고려대 의과대학
지난 7월 23일 열린 ‘좋은의사연구소’ 주최 ‘집단공황에 빠진 대한민국’ 심포지엄. ⓒphoto 고려대 의과대학

메르스 사태에서도 정부가 정보를 통제하는 가운데 시민들이 얻을 수 있을 만한 정보는 온라인 네트워크를 통해 전파됐다. SNS나 인터넷에 익숙하지 않은 장·노년층일수록 위험에 더욱 쉽게 노출된 것이 사실이다. 반복적으로 사회가 이들을 ‘보호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확인해줄 때마다 이들의 울분 상태는 강해지고 장기화될 수 있다. 보건복지부가 지난해 노인 1만여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노인 중 33% 넘는 인원이 우울 증상을 보였고, 10% 넘는 인원이 자살 충동을 느껴본 적이 있다고 응답했다. 우울감과 무력감을 느끼는 동시에 충동적이고 폭력적인 상황이 발생하는 일이 꾸준히 늘어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울분 상태에서 회복하는 일은 개인적으로는 꾸준한 치료, 사회적으로는 울분 상태에 이르게 한 근본적인 원인을 교정하는 데 있다. 한창수 교수는 “정신의학에서는 울분 상태를 벗어나려면 일종의 ‘성숙’을 이뤄야 한다고 말한다”며 “조금 더 융통성 있고 깨달음을 빨리 얻을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오랜 시간 울분 상태가 지속된 50대 이상 장·노년층을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관건이다. 박현식 교수는 “메르스 사태를 둘러싼 커뮤니케이션이 20~30대, 40대를 중심으로 이뤄지는 경향이 있는데, 사실 이런 사건들에서 가장 감정적으로 취약한 것은 노인층”이라면서 “노인들이 느낀 불안감, 분노, 공포, 무력감 등도 사회적으로 관리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한창수 교수는 경기도 안산시 고려대 안산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로 지난해 4월 16일 일어난 세월호 침몰 사건을 몸소 겪었다. “아마 전 세계적으로도 유례가 없는 일이었을 겁니다. 하룻밤에 80명의 학생이 정신과 전문의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학생, 학부모, 지역사회, 온 나라가 비슷한 감정에 빠졌습니다.” 상실감은 곧 불신으로 이어졌다. 반복되는 인재(人災)와 소통의 부재로 분노의 감정도 일어났다. 그러다가 올해 메르스 사태까지 터졌다.

지난 7월 23일, 서울 성북구 고려대 의과대학 문숙의학관에서 ‘좋은의사연구소’(소장 안덕선 교수)는 ‘집단공황에 빠진 대한민국’이란 주제로 심포지엄을 열었다. 메르스 사태를 겪은 한국 사회를 어떻게 바라볼 것인가를 얘기했는데, 위에서 말한 내용들이 개진됐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이진남 강원대 교수(철학), 김문조 고려대 명예교수(사회학)가 각각의 연구 분야에서 메르스 사태를 분석했다. 이들은 공통적으로 메르스 사태가 불러온 사람들의 감정에 주목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박한선 전문의는 “전염병이 돌면 당연히 공포가 생기고, 스스로 보호하려는 의식이 생긴다. 시대와 국가를 막론하고 전염병에 대한 공포는 여느 공포보다 더 강했다”고 말했다. 박한선 전문의는 의료인류학적으로 이번 메르스 사태를 분석했는데, 특히 다양한 시대와 국가와의 비교를 통해 전염병의 역사에 대해 말했다. 그에 따르면 메르스 발병 당시 서둘러 마스크를 쓰고, 외출을 삼가고, 혹여나 옮지 않을까 사람들이 조심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2015년, 한국에서 발생한 전염병의 문제는 기존에 있는 사회의 정신의학적 문제를 두드러지게 보이게 했다는 것이다.

제대로 대응하지 못한 국가와 의견이 서로 다른 시민사회, 보호막이 돼주지 못하는 보건당국 등은 마치 트라우마처럼 상처를 남겼다는 것이 의사들의 얘기다. 강의성 서울시 강동구보건소 의사는 “메르스 사태같이 국가적 재난이 발생하면 외상후 장애처럼 상처가 남는다”며 “가장 필요한 것이 심리 복구 작업”이라고 말했다. 이미 쌓여 있는 울분이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메르스 같은 대형 재난을 다시 맞으면 울분이 깊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정신의학계에서는 지속적인 울분 상태에서 벗어나려면 가족과 학교, 직장과 지역사회가 지속적으로 지지해주고 보살펴주는 구조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보통 50~60대를 위한 안전망은 행정적인 지원 절차에 그치는 경우가 많았지만, 보다 감정적이고 정신적인 부분에도 지원이 닿아야 한다는 얘기다. 박현식 교수는 “자존감을 높여주는 심리적 지원이 필요하다”며 “조만간 노인인구가 2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 만큼 50~60대의 울분 문제는 전체 사회의 문제로 보고 해결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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