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반값등록금’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 ⓒphoto 이준헌 조선일보 객원기자
‘반값등록금’을 요구하는 대학생 시위. ⓒphoto 이준헌 조선일보 객원기자

메르스 사태를 전후로 완전히 변한 게 있다. 20~30대가 메르스 사태를 겪으며 보여준 사회불안, 분노, 불신 같은 부정적인 감정은 정부가 메르스 종식을 선언했지만 오히려 강해지고 있다. 청년들의 분노가 새삼스러운 일은 아니다. 몇 년 전부터 실업과 비정규직 문제로 시달려 온 청년들은 이미 지난해 세월호 참사에서 좌절과 상실감, 불신의 문제에 맞닥뜨렸다. 지난 5월 말부터 69일간 이어진 메르스 사태는 그 정점을 찍는 사건이 돼 버렸다.

이진남 강원대 교수(철학)의 말을 들어보자. “나는 독일 극작가 베르톨트 브레히트의 ‘의심을 찬양함’이라는 시를 좋아합니다. 거기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이제 한 사람의 지도자가 된 당신은 잊지 말아라. 당신이 옛날에 지도자들에게 의심을 품었었기 때문에, 당신이 지금 지도자가 되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당신을 따르는 사람들에게 의심하는 것을 허용하라.’” 이진남 교수는 “정당한 의심과 공포는 오히려 사회를 건강하게 한다”고 말했다.

이 교수의 말에 따르자면 메르스 사태를 맞으며 20~30대 젊은층이 불안을 느끼고 전염에 대한 공포에 시달렸던 것이 ‘과도한 집단 공황’이 아니다. 박한선 성안드레아병원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한 모의 실험을 소개했다. “2004년에 미국 콜로라도주 덴버에서 있었던 모의 생물테러 훈련입니다. 전염병인 가래톳 페스트 에어로졸을 살포했다고 가정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봤습니다. 하루 만에 783명이 감염되고, 일주일 만에 우리가 지켜오던 도덕적 가치가 무너지기 시작합니다. 치안도 마비되고, 구급차 기사는 근무지를 이탈하고, 보건 공무원은 근무를 거부합니다.” 그렇게 보자면 이번 메르스 사태는 생물학적 테러에 비할 바는 아니지만 대개 정당하고 생산적인 공포로 진행됐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평이다.

그러나 문제는 메르스 사태가 진정되고 난 후에도 사라지지 않는 분노의 문제다. 한국갤럽의 조사를 보면 메르스 사태의 위기감이 한창 절정이던 지난 6월의 20~30대의 메르스 감염 공포는 전 세대 중 가장 높았다. 6월 셋째 주에 20대의 56%, 30대의 72%가 ‘나도 감염될 수 있다’고 응답했고 20대의 54%, 30대의 65%는 ‘메르스가 더욱 확산될 것’이라고 불안감을 표했다. 이런 불안과 공포는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급기야 “왜 우리는 항상 불안해 해야 하나”라는 분노가 다시 시작됐다.

20~30대의 분노는 불신의 형태로 드러난다. 이진남 교수는 “메르스 사태에서 가장 큰 문제는 정부와 전문가 집단의 위험 커뮤니케이션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는 점”이라고 지적했다. “메르스 사태로 인한 공포가 정당한 것이었다면, 해명과 책임을 요구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도 타당한 일입니다. 메르스 발생 초기에 갖가지 의혹이 제기됐지만 정부는 아무것에도 답하지 않았지요. 오히려 일축했습니다. 그 결과 의혹이 해소된 것이 아니라 의심을 키웠습니다.”

여론조사기관 리얼미터가 지난 6월 메르스 사태, 지난 7월 국정원 해킹 사건 등을 두고 정부의 대책을 신뢰하느냐는 질문을 던져본 결과 30대의 경우 메르스 사태에서는 89.5%, 국정원 해킹 사건에서는 77.1%가 정부의 대책과 발표를 신뢰하지 않는다고 대답했다. 자살률, 양극화, 실업, 비정규직 비율 등 각종 지표를 근거로 한국 사회는 살기 힘든 곳이라는 ‘헬조선 지옥불반도’라고 비꼬는 일은 흔히 찾아볼 수 있다. 불신과 냉소가 평범한 감정인 듯이 보이는 상황이 된 것이다.

‘헬조선’은 한국 사회가 지옥(hell)처럼 살기 어렵다는 의미에서 쓰이는 신조어다. 최근 한 달간 트위터에서 언급된 ‘헬조선’을 트위터 분석 사이트 톱시(Topsy)에서 찾아보면 4740건이 넘는다. ‘개한민국’이라는 합성어도 1000건 넘게 쓰였다. 심지어 대학의 명예교수나 정치인까지도 ‘헬조선’이라는 단어를 쓰거나 이들 트윗을 공유하고 있다.

최근에 인터넷 커뮤니티를 중심으로 화제가 됐던 ‘세 모자 사건’도 이제는 뿌리 깊어진 불신을 보여주는 사례다. 친아버지에게 두 아들이 몇 년간 성폭행을 당해 왔고 친족·이웃 역시 이 범행에 일조했다는 한 여성의 주장은 특히 젊은 네티즌에게 공분을 일으켰다. 이들은 포털사이트 한 기사에만 20만건이 넘는 댓글을 쏟아내며 “사건을 해결해 달라”고 주장했는데 댓글의 대다수는 “왜 언론이 기사화하지 않느냐” “경찰은 수사에 착수하지 않느냐”는 불신의 감정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결국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었지만, 구체적인 근거도 없는 한 여성의 주장에 수없이 많은 사람이 공분한 이유에는 최근 젊은층의 기저에 깔려 있는 불신의 감정을 건드렸기 때문이라는 분석이 많다.

이진남 교수는 메르스 사태를 분석하며 여러 번 반복된 우리 사회의 불신, 분노의 문제를 짚었다. “대중들이 위험을 느꼈을 때, 이 위험을 정부 혹은 권위자가 해결해 주려고 하는구나라고 긍정적인 판단을 내리는 기준은 두 가지입니다. 전문가의 의도가 사심 없고 공평무사한 것인지, 효과적으로 자신의 임무를 수행할 능력과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것입니다. 그런데 이번 메르스 사태에서도 이 두 가지가 모두 충족되지 못했습니다.”

한창수 교수도 공포에 대응하는 개인의 뇌를 가지고 문제를 지적했다. “우리 뇌의 전두엽에는 평상시 공포감을 제어하고 이성적인 판단을 하게 만드는 부분이 있는데, 부정적 감정에 압도되면 이 기능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습니다. 그러면 대부분 의사결정이 감정적으로 이뤄집니다.” 한 교수는 “누군가를 무작정 비난하기도 하고, 남 탓으로 돌리기도 한다”며 “집단의 경우에도 다르지 않아 최근 한국 사회에 벌어진 일련의 사건은 마치 전두엽 기능이 마비된 상황이나 다름없다”고 말했다.

전두엽 기능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외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집단적으로 마비된 상황에서는 믿을 만한 권위자가 필요합니다. 그러나 요즘 우리 사회에서 믿을 만한 권위자는 거의 보이지 않는 게 문제예요.” 그래서 20~30대는 개인적으로 해결책을 찾고 있다. 근 몇 년간 불었던 자기계발서, 힐링, 인문학 같은 키워드가 이를 보여준다.

자기계발서는 하지만 별다른 해결책을 제시해주지 못했다. 각각의 세대, 각각의 상황에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계발서는 무척 많았지만 개인이 좀처럼 해결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네가 알아서 하라”고 책임을 미루기만 했다. ‘힐링’ 역시 개인이 해결하기 어려운 구조적 문제를 개인적인 휴식과 위안으로 해결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또는 ‘힐링 인문학’이라는 것이 유행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기서 인문학의 역할을 끊임없이 지적만 할 뿐 “왜”라는 질문에는 답하지만 “어떻게”라는 질문에는 해답을 내놓지 못했다. 급기야 힐링도 필요 없이 “이 사회는 근본적으로 잘못됐다”고 외치는 청년들이 등장한 것이다.

중국 철학과 한국 유학을 전공한 이선열 박사는 이런 자조와 냉소, 불신이 청년들의 문제만은 아니라고 말했다. “비전을 제시해야 하는 지식인조차 실어증에 빠져서 자조하기만 한다”는 비판이다. 이 박사는 중국의 사회운동가 쉬즈융(許志永)의 주장을 언급했다. “쉬즈융은 ‘우리의 방식은 비판이 중요하더라도 비판은 아니다. 개량이나 대항도 아니고, 건설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비판이 무의미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무력하게 되풀이되는 비판과 항변은 환멸과 냉소로 습관화되기 쉽습니다.”

“여기가 지옥”이라고 말하는 20~30대 청년들에게 한창수 교수는 “권위 있지만 믿음직한 부모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세월호 참사, 메르스 사태 같은 사건을 겪고 불신과 분노의 늪에 빠진 20~30대에는 ‘외상후 성장’이 필요합니다. 정신의학적으로 외상후 성장은 나이가 어릴수록 쉽게 이룰 수 있습니다. 일종의 깨달음이 필요한데요. ‘세상이 이렇게 불안정한 측면도 있구나’라고 깨닫는 식입니다.” 한 교수가 말하는 부모 역할론은 사회가 청년들에게 역할을 해줘야 한다는 얘기에서 시작한다. “권위적인 부모 밑에서 자란 아이는 시키는 일은 잘합니다. 그러나 창의성이 부족하지요. 무관심한 부모 밑에서 자라는 것은 아주 좋지 않지요. 최상은 권위 있지만 믿음직한 부모입니다.”

규칙과 규정이 정해져 있지만 격려와 제재에는 분명한 근거가 있어야 한다. “감정을 헤아리려 노력하면서 설득하고 함께 문제를 해결해 나가려는 부모가 권위 있지만 믿음직한 부모입니다.” 한창수 교수는 “사실 이런 부모 유형의 사회는 청년들에게만 필요한 것이 아니다”면서 “메르스는 일종의 외상이었고, 이로 인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모든 연령대의 모든 사람들에게 충분한 믿음을 제시해 줄 수 있는 권위자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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