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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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봄, 일본은 ‘다케시마의 날’을 국가기념일로 지정하고 이를 전 세계에 발표한다. 아베 내각은 미국의 찬성을 등에 업고 평화헌법 개헌을 국민투표에 부친다. 워싱턴에서는 젭 부시 대통령이 핵을 포기한 북한과의 수교를 선언함과 동시에 주한미군 철수 계획을 기습 발표한다. 사전에 아무런 언질도 받지 못한 한국 정부는 우왕좌왕 중심을 잡지 못한다. 한편 중국과 미국은 서로가 주도권을 잡고 있는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과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에 서로 가입하기로 함으로써 양국 간의 팽팽했던 줄다리기가 사실상 미국의 승리로 마무리된다.’

다가올 동아시아 정세를 소설로 담아낸 ‘크레바스’(메디치)의 내용이다. 사실 저자 강희찬(39)씨의 상상은 전혀 가능성 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AIIB, 일본의 개헌 시도 등 ‘크레바스’에 등장하는 주요 이슈들은 지금도 언론을 장식하는 단골 소재들이다. 하지만 이러한 동아시아의 변화 요인들이 앞으로 어떤 상황을 불러올지는 아무도 모른다. ‘크레바스’에 따르면 동아시아는 앞으로 2년 만에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힘든 급격한 변화에 휘말린다. 과연 저자는 어떤 생각으로 결코 다가올 것 같지 않은, 다가오지 않았으면 하는 동아시아의 미래를 그려냈을까. 지난 8월 4일 여의도 소재의 국가경영전략연구원(원장 최종찬)에서 ‘크레바스’의 저자 강희찬씨를 만나보았다.

강희찬씨는 연세대학교 법학과를 졸업한 후 중국 외교대학에서 국제관계학을 공부했다. 이후 미국 존스홉킨스대와 중국의 난징대에 공동으로 설치된 중·미(中美)연구센터에서 중·미 관계를 연구했다. “어렸을 때 꿈이 외교관이었기 때문에 늘 외교와 대외관계에 관심을 가져왔다”는 그는 현재 민간 싱크탱크인 국가경영전략연구원(아래 연구원)에서 연구공론화사업부 부장을 맡고 있다. 그는 “해외에서 온 외교 인사들과 접할 기회가 많은데 ‘한국의 주요 이슈는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많이 받는다”며 “한국도 부의 분배, 정치 리더십 등 여느 나라와 비슷한 고민들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외관계에 있어서 우리나라만큼 고민이 깊은 나라는 없는 것 같다”고 했다.

그가 속한 연구공론화사업부는 연구원 차원에서 발굴한 국제적 어젠다들을 사회에 알리는 ‘공론화’ 작업을 하는 곳이다. “이 책을 쓰게 된 것도 공론화 작업의 일환인 셈”이라는 그는 “어떻게 하면 일반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대외관계를 보다 쉽게 이해하고, 이에 대한 관심과 흥미를 가질 수 있을까에 대한 고민에서 집필을 시작했다”며 책을 쓰게 된 계기를 밝혔다. 소설이라는 장르를 택한 것은 이러한 집필의도에 더욱 충실할 수 있는 선택이었다. 그는 “대부분의 외교 전문가들이 칼럼이나 논문 형태의 글을 쓰는데 일반 국민들에게는 다가가기 어려운 포맷이라는 생각이 들었다”며 “딱딱한 형식의 글보다는 스토리가 가미된 소설 형태의 글이 대중에게 더 읽히기 쉬울 것이라 판단했다”고 말했다.

흔히 성질 급한 한국인들의 생활태도를 ‘빨리빨리’ 문화라고 말한다. 하지만 외교적 차원에서 그의 눈에 비친 한국인의 모습에는 웬일인지 ‘빨리빨리’ 기질이 보이지 않는다. 그는 “대외관계 정책은 그냥 멈춰져 있는 것이 아니고 계속 움직이고 변화하는 것인데 요즘은 그 속도가 더 빨라지고 있다”며 “그런데 평소에는 성질 급한 한국 사람들이 주변 국가가 빠르게 변하고 있는 상황에서는 오히려 속도가 더디다”고 말했다. 우리 국민들이 급변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못 쫓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나라를 둘러싼 대외상황이 어떻게 변화하고 있기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하는 것일까. 저자는 최근 동아시아의 판세가 변하면서 힘의 균형이 흔들리고 있다는 점에 집중했다. 그는 “미국은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 정책을 내세우며 아시아에 신경을 쓰고 있고, 중국은 최근의 성장세를 틈타 아시아에서 패권국가로 거듭나려 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동아시아 정세를 진단했다. 한편 일본에 대해서는 “원래 아시아에서 일등국가라는 자부심이 강했고, 세계 최고를 향한 꿈이 있었는데 계속되는 경기침체와 중국의 성장세에 위기의식을 느끼고 있다”며 “상황이 이렇다 보니 일본이 더 우경화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평가했다. 이 와중에 북한이라는 복병은 돌발행동을 일삼고 있다.

이런 동아시아의 얽히고설킨 상황 한가운데 한국이 있다. 그는 “동아시아의 일련의 변화들은 결국 우리나라가 선택한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그는 “앞으로 몇 년은 한국이 상당히 어려운 판단들을 해나가야 할 것”이라면서 “중요한 것은 그러한 판단들이 정책 결정자만의 영향이 아니라 여론, 즉 국민들의 영향을 받게 된다는 것”이라며 국민들이 대외관계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 이유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요즘은 정책 결정 과정에서 국민들의 여론이 상당한 영향력을 발휘하는데 사실 국제관계도 그런 경우가 많다”며 “때문에 국민들이 국제적 이슈에 관심을 갖는 것이 우리나라에 있어 중요한 토양”이라고 설명했다.

이 소설에는 젭 부시, 아베, 시진핑 등 현 지도자들이 실명 그대로 등장하여 예민한 외교 현황을 고민하고 집행하는 모습이 담겨 있다. 때문에 집필 당시 주변에서 우려와 부담을 표하기도 했다. 그는 “현재의 외교 정책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아무래도 실질적으로 필드에서 키 플레이어로 뛰고 있는 사람들이기 때문에 연구원 입장에서 특정 이슈에 대해 왈가왈부하는 것은 상당히 조심스러운 일”이라며 “개인적 의견을 피력하기보다는 키 플레이어들이 정말 위기의식을 가지고 실질적 결과를 만들어내고 있는지에 대해 질문을 던지고 싶었다”고 말했다. 정부가 대외관계에 있어 언론이나 전문가의 의견에 끌려다니기보다는 위기의식을 갖고 스스로를 재평가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실제로 열심히 일하고 있는 외교인사들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소리일 수 있겠지만, 원래 그 위치는 칭찬을 받는 자리가 아니라 쓴소리를 듣는 자리”라며 “쓴소리를 듣고 더 열심히 일해주길 바라는 마음으로, 필드에서 도움이 될 수 있는 접근법을 연구원으로서 제안하고자 책을 썼다”고 전했다.

그렇다면 그가 제안하고자 하는 동아시아 정세를 향한 우리의 접근법은 무엇인가. 그는 “상대를 과대평가하는 것, 상대의 논리에 익숙해지는 것, 단기와 중장기적 목표를 혼동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며 3가지 경계사항을 짚었다. 그는 “우리는 현재 중국을 다소 과대평가하고 있으며, 중국이나 미국의 논리에 젖어들어 국익을 현명하게 따지지 못할 위험이 있고, 이 두 강대국 사이에서 우리가 단계적으로 성취할 수 있는 것들을 치밀하게 계획해야 하는 상황”이라고 설명했다.

크레바스, 빙하에 생긴 깊고 좁은 틈을 말한다. 한반도의 외교적 입지는 바로 이 크레바스에 근접해 있다. 까딱 잘못하면 한국은 이 크레바스에서 영영 헤어나올 수 없을지도 모른다. 크레바스에 갇히지 않기 위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바로 ‘위기의식’이다. 그는 “내가 싸움을 아무리 잘해도 더 싸움을 잘하는 사람과 붙으면 싸움을 못하는 사람이 된다”며 “한국이 국력이 세다 해도 우리가 붙어야 할 상대는 바로 미국, 일본, 중국”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이미 협상력이 밀리는 사람이 상대편과 같은 수준의 생각과 노력을 해서는 판세를 뒤집을 수 없는 법. 그는 “‘한국은 더 강한 위기의식을 가져야 하고 더 스마트하고 빠르게 움직여야만 주변의 강대국들을 상대할 수 있다’는 위기의식이 없으면 우리는 크레바스에서 헤어나올 수 없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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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해 인턴기자·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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