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7일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에서 난민들이 유로터널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칼레에는 약 3000명의 난민들이 영국행을 요구하며 임시 캠프촌에 머물고 있다. ⓒphoto AP
지난 9월 7일 프랑스 항구도시 칼레에서 난민들이 유로터널을 향해 행진하고 있다. 칼레에는 약 3000명의 난민들이 영국행을 요구하며 임시 캠프촌에 머물고 있다. ⓒphoto AP

유탄(流彈)이 역사를 바꾼다고 했는데 사진도 역사를 바꾼다. 터키의 지중해변에서 익사체로 발견된 세 살배기 아일란 쿠르디라는 시리아 난민 사진이 세상을 울렸다. 이 사진 한 장이 4년 넘게 지루하고 참혹한 내전이 계속되고 있는 시리아 사태, 특히 유럽의 난민 처리 방향에 큰 변화를 일으키는 중이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여론이다. 그 여론에 영향을 미치는 것은 열 마디 말보다 사진 한 장이 더 크다. 쿠르드족인 아일란의 사진은 정말 모든 사람을 울게 만든다. 특히 사진이 찍힌 모습이 사진의 힘을 더해 주었다. 아기가 요람에서 편하게 엎드려 자는 모습이다. 뒤집어져서 발견되었을 때보다 훨씬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자식을 키워 본 사람이나 하다 못해 조카가 자는 모습을 한 번이라도 보았던 사람이라면 이 말에 동의할 듯하다. 그렇게 해서 수십만 명의 운명을 아일란이 바꾸었다. 누구도 못한 일을 세 살짜리 시리아 아이가 해낸 셈이다.

사진 한 장의 강력한 이미지가 세계 역사를 바꾼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베트남전 중인 1968년 사이공 경찰서장이 베트콩의 머리를 총으로 쏴서 즉결처분 하는 사진과 1972년 나체의 소녀가 네이팜탄을 피해 도망치면서 울부짖는 사진 한 장이 미국을 비롯해 전 세계 반전운동의 도화선이 됐다. 1993년 수단 내전 중 땅 위를 기어가는 피골이 상접한 흑인 소녀 뒤에 독수리가 소녀가 죽기를 기다리는 듯한 사진도 마찬가지다. 이 사진 한 장이 국제적 원조와 개입으로 이어져 내전의 방향을 바꿨다. 이제 세 살배기 아일란의 사진이 바로 이런 사진들과 나란히 역사 속에 남을 것이다.

변화의 단초는 두 달 전부터 있었다. 사진이 아니고 TV 방송, 그것도 생방송의 힘이었다. 지난 7월 16일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가 북부 독일의 한 고등학교 학생들과 TV 대담 생방송을 할 때만 해도 지금처럼 특별히 난민들을 따뜻하게 대하진 않았다. 그런데 TV 대담에서 한 팔레스타인 소녀가 유창한 독일어로 “4년 전에 독일에 와서 잘 살고 있는데 비자 문제 때문에 추방을 당할 위기다”라고 호소하는 돌발 사태가 벌어졌다. 그때까지만 해도 메르켈 총리는 사무적인 어투로 “정치란 때로는 냉정하단다” “레바논에 있는 팔레스타인 난민 캠프에 수천 명이 있지만 우리가 다 이리로 오라고 할 수는 없다. 우리는 모두를 어떻게 할 수가 없단다”라고 하면서 “네가 이해해야 한다”는 식으로 끝을 내려고 했다. 그 순간에 소녀가 울기 시작했다. 당황한 메르켈이 뛰어가 소녀의 어깨를 두드리고 수습을 하며 지나갔지만 사태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독일은 물론 세계 전체에서 냉정한 메르켈 총리를 향한 비난이 쇄도하기 시작했다. 평소 어머니 같은 이미지를 잘 유지하던 메르켈로서는 불벼락을 맞은 셈이다. 특히 그동안 침묵을 지키고 있던 다수의 독일인이 나서서 구명운동을 했고 결국 소녀 가족은 독일에 남아 있을 수 있게 되었다. 그때 이후 독일의 난민을 향한 방향이 서서히 바뀌기 시작했다. 메르켈 총리는 독일 국민의 정서를 그 사태를 통해 읽은 셈이다.

그래도 유럽은 쏟아져 들어오는 난민에 대해 임시 미봉책만 썼지 지금처럼 독일 80만명, 다른 유럽 각국 수만 명씩 받겠다고 하지는 않았다. 그로부터 두 달도 안 된 9월 4일 전 세계 신문에 실린 아일란의 사진 하나가 완전히 상황을 바꾸어 버렸다.

아일란의 사진은 영국의 분위기도 바꾸어버렸다. 언론은 단결을 한 듯 시리아 난민 사태를 동정적으로 다루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쏟아져 들어오는 이민자들 때문에 금방 영국이 망할 것처럼 엄살을 떨던 극우신문 데일리메일마저도 은근히 ‘난민 수용을 인정하되 조정을 잘 좀 하자’는 식으로 뒤로 뺄 정도였다. 반(反)이민정책으로 지난 총선 득표수로는 영국 제3당으로 올라선 극우보수당인 영국독립당 대표 나이젤 파라지도 나서서 반대는 못했다. “정규 이민정책에 따라서 해야 한다. 그리고 제대로 체크를 해야 한다”는 식으로 누그러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는 당장의 분위기만 달라진 것일 수 있다. 언론이 워낙 난리고 국민 분위기가 동정론 일색이라 그렇게 보일 뿐 실제 난민에 대한 영국인의 생각은 거의 바뀌지 않았다. 냉철한 영국인의 진정한 모습이 따로 있다. 여론조사기관 포퓰러스의 보고서를 보면 이를 알 수 있다. ‘아일란의 사진을 본 후 당신은 영국이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한다고 바뀌었느냐’는 질문에 ‘더 받아들여야 한다로 바뀌었다’가 36%, ‘더 줄여야 한다로 바뀌었다’가 17%, ‘별 차이가 없다’가 47% 등의 답변이 나왔다. 아일란의 사진을 보고도 영국인의 3분의 2는 동정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거기다가 데이비드 캐머런 총리가 이번 사태를 계기로 밝힌 난민 2만명 수용에 대한 의견에는 45%가 ‘너무 많다’, 27%가 ‘적당하다’, 15%만이 ‘너무 적다’는 반응을 보였다. ‘이 정도 선(2만명)에서 끝내야 한다’는 51%나 됐다. 캐머런 총리가 어떻게 더 해보려 해도 할 수가 없는 상황이다.

영국은 이번 아일란 사진이 나오기 직전까지만 해도 유엔 주도로 시작한 EU국가별 난민 쿼터제에 반대하고 참여하지 않은 채 버티고 있었다. 여론조사에서도 64%의 영국인이 유럽 난민 쿼터제를 거부한 것을 ‘잘했다’고 했다. 지금도 쿼터제에 참여를 하지는 않지만 상황은 바뀌었다. 사진이 나오기 직전에는 ‘수천 명은 받겠다’고 하다가 사진이 나온 후 그 숫자가 1만명으로 올라갔고 최종적으로 ‘향후 2년간 2만명을 받겠다’고까지 물러섰다. 사진이 나온 직후 캐머런 총리는 “한 아버지로서, 한 인간으로서 그 참혹한 사진을 보고 마음이 움직이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 이미지는 우리들 마음속에 아주아주 오랫동안 남아 있을 것이다”라면서도 “그러나 과연 우리가 무엇을 해야 변화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에 대한 의문을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가 아니라 한 나라의 총리로서 나는 가질 수밖에 없다”고 특유의 양보절을 적절하게 사용했다.

캐머런 총리는 불과 한 달 전인 7월 말 영국해협을 건너는 유로스타가 출발하는 프랑스 서부 항구 칼레에서 영국으로 건너오려고 대기 중이던 3000여명의 난민에 대해 언급하던 중 곤충들에나 쓰는 ‘떼로 몰려드는(swarm)’이란 단어를 써서 톡톡히 망신을 당하고 사과한 적이 있을 정도로 난민 문제에 냉담했다. 단어 하나도 골라 써야 할 영국 외무장관도 난민들이 ‘약탈하러 돌아다닌다(marauding)’고 묘사해 난리가 났었다. 그럴 정도로 영국 정부는 한 달 전만 해도 난민 문제에 아주 냉담했었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총리로서는 국민 정서를 무시할 수 없고, 특히 이민 숫자를 통제하겠다는 정책으로 2기 집권을 시작한 바 있기 때문이다. 아일란 사진 사건이 나고서도 영국인은 ‘난민을 얼마나 받으면 좋으냐’는 질문에 25%가 ‘한 명도 받으면 안 된다’, 8%가 ‘1000명’, 9%가 ‘5000명’, 16%가 ‘1만명’, 10%가 ‘5만명’의 반응을 보였다. 도합 42%가 5000명 이하를 원한다는 말이다. 이런 상황에서 캐머런 총리는 2만명을 받는다고 하면서 생색을 냈다. 그러면서 “영국은 GNP(국민총생산)의 0.7%를 (난민을 위해) 쓰는 유일한 나라이고 이 정도 금액을 따라올 나라는 어느 나라도 없다”고 자신 있게 말했다. 영국은 시리아 난민촌을 위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원조를 많이 하는 국가인데 이번에 1억파운드를 더 내놓겠다고 했다. 캐머런 총리는 “(난민을) 더 받아들여야 한다”는 노동당 그림자 내각 내무부 장관의 요구에 “영국은 시리아 난민에게 지금까지 도합 10억파운드를 지원했다. 어떤 유럽 국가도 이만큼 한 나라가 없다”라고 답했다. 10억파운드의 중동 난민 원조는 영국의 해외 원조 사상 최대 금액이다. 영국 내에서는 “다른 원조에 쓸 돈까지 다 쓴다”고 난리다.

시리아 내전에 군사 개입을 할 예정이냐는 언론의 질문에도 캐머런 총리는 2013년에 혼이 나서인지 “영국 내 여론의 진정한 일치(consensus)가 있으면 의회로 이 문제를 다시 가지고 가겠다”는 정도로만 말했다. 2013년 영국 하원은 시리아 내전에 참전하겠다는 정부안을 반대 285 대 찬성 272로 부결시킨 적이 있다. 당시 하원의석 수는 보수당 306석, 자민당 57석, 노동당 258석이었다. 보수당 연정파트너였던 자민당은 전원이 찬성 의사를 밝혔다. 노동당 의원 전원이 참석해 반대를 했다고 쳐도 역산해 보면 거의 30명 이상의 보수당 의원이 당론에 반하여 반대 투표를 한 것이다. 당시 캐머런 총리는 집권 이후 최대의 위기를 맞았었다. 2013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의 군사 개입에 대한 여론은 60%가 반대, 24%가 찬성이었다. 그러나 이번 아일란 사진이 나온 탓인지 9월 4일 이후 한 여론조사에서는 41%가 개입 찬성, 38%가 반대로 바뀌었다. 그래도 캐머런 총리는 신중한 입장이다.

독일이 아일란 사건이 나기 2주 전 “독일에 들어와서 난민 신청을 하는 모든 난민들을 받겠다”고 선언했고 이제는 “올해에만 80만명을 더 받겠다”고 한 상황이라 영국의 2만명은 더더욱 생색이 안 나게 되었다. 더군다나 영국은 1976년 베트남 멸망 때도 베트남인 1만9000명을 받아들였고 1999년 코소보 사태 때도 2만4000명을 받은 바 있어서 이제 와서 2만명밖에, 그것도 향후 2년간에 받겠다는 말로는 EU 내에서 미움을 살 처지다. 프랑스의 프랑수아 올랑드 대통령은 “영국이 만일 EU개혁을 원한다면 난민정책에 더욱 협조하라”고 영국 멱살을 잡고 은근한 협박을 하고 있다.

영국이 늘어나는 난민 문제를 주요 정책의 하나로 조명하지만 유엔 자료에 의하면 영국 내 난민은 줄어들고 있다. 2011년 19만3600명에서 2014년 11만7161명으로 3년 새 7만6439명이 줄었다. 영국은 역사적으로 보면 난민으로 인해 아주 큰 덕을 봤다. 조금 과장하면 “대영제국을 쌓는 데 난민이 한 역할이 반이 넘는다”는 말이 있다. 17세기 말엽 프랑스에서 가톨릭의 박해를 피해서 위그노 신교도 5만명이 영국으로 건너왔다. 프랑스 내 신교도의 종교 자유를 인정했던 낭트칙령을 루이 14세가 1685년 폐기하자 남프랑스에 살고 있던 중소상공인들이 대거 건너왔다. 이후 거의 20만명이 건너왔다. 그들은 거의가 다 기술자들이고 자본도 많이 가지고 있던 부유층이었다. 위그노 교도들은 영국이 평소 갖고 싶었던 비단, 제모, 금세공, 인쇄, 책 제본, 시계, 보석세공, 제지, 총기, 가구 기술자들이었다. 당시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가 안 될 정도의 선진기술국이었는데 위그노들이 가지고 온 기술은 영국이 갖고 싶어하던 것들이었다. 영국의 향후 산업혁명의 기초가 여기서 시작되었고 결국 대영제국을 완성하는 데 위그노의 역할이 대단했다고 역사학자들은 말한다.

반면 프랑스는 중남부 리옹을 비롯한 루앙 등의 상공업도시가 기술자의 반을 잃어버리고 침체되기 시작했다. 프랑스는 이를 계기로 영국에 산업 우위를 잃고 말았다. 영어의 난민(refugee)이라는 단어가 생긴 것도 이때다. 프랑스어의 난민(refugie)이 영어로 정착한 것이다. 이로부터 4반세기 뒤인 1710년경 영국 런던 인구의 5%인 50만명이 프랑스 출신 신교도였고 당시 런던 시내에만도 23개의 프랑스 개신교 교회가 있었다. 지금은 영국으로 들어오는 이민자들에 대해 목청을 돋우는 영국독립당 나이젤 파라지 대표도 위그노의 후손이다.

현재 영국을 이루고 있는 앵글로색슨족도 독일에서 4세기경 건너왔다. 그래서인지 영국 역사 속에는 이민자를 환영하는 전통이 있었다. ‘모든 이민자들은 뭔가를 가지고 온다’가 영국인 생각 속에 있다. 특히 이슬람의 유대인이라는 레바논인과 함께 시리아인은 역사적으로 장사꾼으로 유명했다. 이들의 항해술은 뛰어나서 지중해의 무역을 시리아인이 독점하던 때도 있었다. 그런 전통의 피를 가진 시리아인이 아무리 많이 서유럽으로 건너온다고 해도 부담이 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게 시리아 난민을 아는 사람들의 말이다. 더군다나 사선을 넘어온 이들이라 그들이 가진 ‘살고자 하는 용기와 결심’ 그리고 ‘가지고 온 재주’는 분명 도움이 될 것이라고 한다. 시리아 난민과 관련된 다른 주목할 예도 있다. 세기의 인물인 애플 컴퓨터의 창업주 스티브 잡스도 시리아 이민자의 아들이고 프랑스 사상 최고의 테니스 선수인 앙드레 애거시도 시리아 출신이다.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 수백㎞를 온 사람들은 ‘살아 남고자 하는 천부의 의지와 용기가 워낙 강해(blssed with uncommon drive and will to survive)’ 얼마 가지 않아 혼자서 살아갈 것이라는 전망이 우세하다. 그래서 그들에게 1년만 기회를 주면 그 다음은 걱정 안 해도 된다는 의견이 난민을 옹호하는 측의 말이다.

영국 내에도 여론조사 통계에 나타나는 숫자와는 달리 인도적인 여론도 높다. 한 기독교 단체가 발표한 성명이 아주 인상적이다. “새 철의 장막을 치고 날카로운 철조망의 성을 쌓아 가난하고 피부 색깔이 다른 인간을 막는다면, 여기에는 고상한 기독교 논쟁이 있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여기에는 많은 댓글이 붙었다. ‘캐머런이 선거 전에 영국이 기독교 국가라는 점을 자랑스럽게 여기자라고 했다면 그에 합당하는 도덕성도 지녀야 한다. 엑소더스를 잊지 말자’ ‘예수가 여관에 방이 없어 마구간에서 태어난 이유를 아는지 모르겠다. 여관에 방이 없다고 난민들을 쫓아내면 우린 예수를 밀어내는 것이다. 검은 얼굴을 한 무슬림 예수가 올 수 없다는 말인가’…. 또 ‘영국식의 문화와 생활방식이 난민을 받아들이면 바뀐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바뀐다. 영국인의 문화와 생활방식을 만드는 정신 속에는 넓은 관용과 자선의 마음이 있는데 우리가 지금 작은 섬, 관습, 문화를 보호하려고 문을 닫고 외면하면 우리들의 생각이 바뀌고 정신이 바뀌고 관습이 바뀌고 결국 문화가 바뀐다. 우리가 우리 종교를 보호하기 위해 이교도들을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크리스천 정신이 사라지는 것인데 그 사랑의 정신이 사라지고 난 빈 껍데기 기독교 정신을 우리가 지킬 이유가 무엇이 있나’라는 명문장도 댓글에서 발견할 수 있다. 거기에 찬성이 수천 개가 달려 있다.

시리아 난민들에게 이번 아일란 사건이 나기 전 원조를 준 나라들의 명단을 좀 길지만 한번 살펴보자. 상당히 흥미롭다. 미국이 28억파운드로 가장 많고 그 다음이 영국 8억9000만파운드, 3위 쿠웨이트 7억6400만파운드, 4위 독일 6억3300만파운드, 5위 사우디아라비아 3억8700만파운드, 6위 아랍에미리트 3억5900만파운드, 7위 캐나다 3억4100만파운드, 8위 일본 3억1000만파운드, 9위 노르웨이 1억7100만파운드, 10위 카타르 1억5700만파운드다. 1억파운드에 가까운 금액을 낸 국가는 네덜란드, 스위스, 스웨덴, 오스트레일리아, 덴마크다. 프랑스는 영국과 비교도 안 되는 아주 적은 7000만파운드를 냈고 그 다음이 이탈리아, 핀란드, 벨기에 순이다. 아일랜드도 2600만파운드나 냈다. 중국은 겨우 20만파운드를 냈다. 한국의 경우는 2012년부터 지금까지 1526만파운드를 냈다는 것이 외교부의 설명이다.

난민을 받아들인 나라 중에는 의외의 나라도 있다. 남미의 아르헨티나는 1000명을 받아들였고 브라질은 1740명을 받아들였다. 특히 베네수엘라는 무려 2만명을 받아들였다. 일본은 돈은 많이 냈지만 한 명도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미국도 돈낸 데 비해서는 받아들인 난민 수가 적다. 1434명밖에 안 된다. 돈으로는 도와주는데 이웃해서는 살기 싫다는 뜻인지 모르겠다.

영국이 미국에 이어 시리아 난민 문제에 2위의 원조를 했다는 사실은 겨우 인구 6500만명의 나라가 세계적인 영향력을 아직도 유지하는 이유 중 하나라고 본다. 영국은 세계 문제를 아직 자신들의 문제로 대한다. 물론 2차 대전 종전 처리 과정에서 영국이 저지른 잘못에 대한 대가라고도 할 수 있지만 어찌되었건 국력에 비해 난민을 적게 받아들인다고 욕할 일은 아니다.

선진국이 되는 길은 물론 어렵지만 선진국의 지위를 유지하는 일은 더 어렵고 비싸다. 특히 인내와 관용을 요구한다. 내 이웃에 누군가 다른 문화를 가졌던 사람들이 들어와서 내가 낸 세금으로 사는 일을 감수해야 한다. 인간 세상의 모두는 한때 난민이었고 이민자였다. 어려울 때 누군가로부터 도움을 받아 지금 잘살게 되었다면 도와야 할 일이다. 겨우 배낭 하나, 손에 가방 하나 들고 흡사 동네 가게에 쇼핑하러 나온 사람처럼 생을 바꾸기 위해 목숨을 걸고 바다를 건너오는 사람들. 영국으로 건너오는 컨테이너에 숨어 들어오다가 수십 명이 질식해서 죽고 심지어는 기차가 시속 300㎞의 속도로 10분마다 한 대씩 달리는 길이 50㎞의 유로터널 지하를 걸어오다가 죽은 사람들. 이들을 보면서 영국인의 마음속에는 자신들의 사고 밑바닥에 있는 성경 장면이 떠오를지도 모르겠다. 젖과 꿀이 흐르는 신천지를 찾아 40년을 광야를 헤맨 유대 민족의 엑소더스 말이다. 그래서 유별나게 난민들 일에 나서는지도 모르겠다.

권석하 재영칼럼니스트·’영국인 재발견’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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