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쟁이 있는 곳엔 난민이 있다. 이스라엘과의 분쟁으로 난민이 된 팔레스타인인(人) 수백만 명은 인접국 요르단, 레바논으로 몰려들었다. 그 수는 현재 요르단 전체 인구(650만명)의 절반에 육박한다. 중동 난민은 유럽을 향해서도 피란길에 올랐다. 브로커의 꾐에 넘어가 낡은 고무보트에 안전장치도 하나 없이 몸을 싣고 지중해를 건너 유럽에 가려다 수장(水葬)된 난민만 최근 1년간 3500여명이었다. 하루 10명꼴로 죽어갔다. 지중해는 죽음의 바다가 됐다.

지난 9월 2일 세 살배기 시리아 난민 아일란 쿠르디의 주검이 터키 해변에서 발견된 후 독일은 즉각 국경을 개방하고 한시적으로 자국으로 들어오는 모든 난민을 받아들였다. 쿠르디 충격 사흘 뒤 프란치스코 로마 교황은 바티칸의 성베드로성당에서 미사를 집전하면서 “유럽의 모든 가톨릭 교구가 난민 가족을 받아들여야 한다”며 “바티칸의 두 교구가 앞장서 각각 한 가족씩 난민을 받아들이겠다”며 구체적 방안도 내놓았다. 면적 0.44㎢로 전 세계에서 가장 작은 국가인 바티칸까지 난민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다.

피란처 제공보다도 난민이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분쟁을 종식시키는 노력이 절실하다는 주장도 고개를 들고 있다. 중동과 북아프리카 각지에 흩어진 난민들을 유럽이 모두 받기엔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특히 2011년 발발한 내전으로 생긴 시리아 난민은 400만명을 넘어선다. 유엔난민기구(UNHCR)에 따르면 시리아 난민은 터키에 190만명, 레바논에 110만명, 요르단에 63만명, 이라크에 25만명이 있다. 시리아 내에서 고향을 떠나 다른 지역으로 피신한 이도 500만명에 이른다. 시리아 전체 인구(2300만명)의 40%에 해당하는 900만명이 집을 잃고 핍진한 삶을 4년 넘게 이어나가고 있다.

국제구호단체가 제공한 시설에 머물고 있는 난민 수는 절반도 되지 않는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장기화하면서 구호 지원의 규모는 줄어들었다. 난민들은 하루 빵 한두 덩이와 우유 한 갑에 의존하며 천막에서 집단 투숙하고 있다. 하지만 난민캠프 생활을 하고 싶어도 할 수 없는 난민이 더 많다. 시리아와 인접한 요르단의 수도 암만의 거리를 걷다 보면 쓰레기통을 뒤지며 주인 없이 개나 고양이가 먹을 법한 음식물을 찾는 시리아인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구두닦이나 짐 나르기를 하면서 푼돈을 벌어 처자식을 먹여살리려는 이들도 많다. 중동권 전문매체 알 모니터에 따르면, 레바논 유흥업소에 지난 몇 년 사이 시리아 여성의 비율이 급격히 늘었는데 시리아 난민 여성이 대거 유입됐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됐다. 브로커들은 하루 100달러 이상을 벌 수 있다며 어려운 처지의 난민 여성을 유혹한다고 했다. 이슬람교 율법에 따라 일부다처제가 가능한 이슬람 국가의 중년 남성들이 적은 결혼비용을 내고 후처(後妻)로 시리아 여아를 받는 경우도 크게 늘어 논란이 되기도 했다. 한창 학교를 다녀야 할 학생들이 교육을 받지 못하고 비정상적인 생활에 놓이면서 이들이 나중에 사회불만세력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조심스럽게 제기된다.

지금과 같은 사태를 초래한 시리아 내전에 대한 책임은 바샤르 알아사드(50) 시리아 대통령이라는 것이 국제사회 주류의 시각이다. 시리아 내전은 현재 시아파인 알아사드 정권 대(對) 수니파 야권의 헤게모니 싸움 양상을 띠고 있지만, 그 시작은 시리아 민초들의 민주화 운동이었다. 시리아는 2011년 무아마르 카다피 리비아 국가원수, 호스니 무바라크 이집트 대통령 등 아랍의 독재자를 몰아낸 ‘아랍의 봄’의 영향을 받아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수도 다마스쿠스 거리는 부자(父子) 세습으로 40년 넘게 장기집권하는 알아사드 정권의 정치 개혁을 요구하는 시민들로 가득 찼다. 시위대의 손에는 푯말이 들려 있을 뿐 무기는 없었다. 알아사드 대통령은 무장한 군인과 탱크를 동원해 시위대를 강경진압했다. 시리아 작은 마을에서 초등학교를 다니는 어린아이들이 벽에 시위대를 지지하는 내용의 낙서를 했다고 체포해 고문하고 일부 아이는 고문 중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분노한 시위대는 무력진압하는 정부에 그냥 당하고 있을 수 없다며 하나둘 총을 들기 시작했다. 시리아 민중 시위 ‘다마스쿠스의 봄’은 이내 내전으로 변모했다. 코피 아난 전 유엔 사무총장이 유엔 특사 자격으로 내전을 중재하고자 나섰지만 알아사드 대통령은 물러서지 않았다. 혼돈이 지속되면서 알 카에다와 같은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단체가 시리아 땅으로 들어왔다. 내전이 시리아의 민주화를 목표로 한 무장세력과, 알아사드 독재정권의 싸움에서, 테러단체까지 제3세력으로 끼어드는 구도가 된 것이다.

시리아 난민 사태가 더욱 악화한 시점은 지난해 초부터다. 알 카에다의 지휘를 받는 한 무장단체가 세력을 확장해 어린 여자아이마저 무자비하게 참수하는 일들이 벌어졌다. 자칭 ‘이슬람국가(IS)’라는 이 무장단체는 구호단체 소속으로 시리아인을 도와주러 온 외국인 인권운동가마저 참수했다. 자신들의 극단적 이슬람 율법을 따르지 않는 마을 주민들을 집단 살해하며 자랑스럽게 홍보했다.

터키 해변에서 숨진 채 발견된 쿠르디 가족이 내전 속에서도 떠나지 않던 고향 시리아 북부의 코바니를 떠나 그리스로 가기로 마음먹은 것도 IS 때문이었다. IS가 코바니까지 점령하며 주민들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IS는 시리아 북쪽 인접국인 터키의 난민캠프에도 잠입해 도망간 시리아인들을 공격하기도 했다. 터키로 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대로 머물지 않고 다시 유럽으로 가려고 목숨을 걸고 고무보트를 타는 이유도 터키가 안전하지 않기 때문이다. 특히 쿠르디 가족과 같은 쿠르드족(族)은 터키 내에서 분리독립을 하려는 반체제 세력으로 여겨져 차별과 심한 통제를 받는 경우가 많다.

구제불능의 지도자로 전락한 알아사드에게 잘못을 탓하기에 앞서 어려운 처지에 빠진 이웃 시리아인을 외면한 아랍의 부국(富國)들이 각성해야 한다는 비판도 커지고 있다. 국제앰네스티에 따르면 걸프 산유부국인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연합(UAE), 쿠웨이트, 카타르, 바레인에는 시리아 난민 정착촌이 한 곳도 없다. 1인당 국민소득이 1만1000달러(약 1300만원)인 요르단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인도주의에 따라 난민 수용에 적극적인 반면, 1인당 국민소득이 14만3000달러(약 1억7000만원)인 카타르는 ‘난민 유입으로 사회 혼란이 우려된다’면서 인색한 입장을 보이고 있다. 산유국들이 인권을 위한다고 구호금은 내놓으면서도 정작 제일 시급한 난민 수용은 하지 않으려고 해 ‘돈으로 다 해결하려고 한다’는 비아냥도 듣고 있다.

특히 사우디와 카타르는 시리아 내전 악화에 일조한 책임이 있는 국가로 꼽혀 더 큰 비난을 받고 있다. 미국 의회보고서와 미 국무부 관계자의 언론 인터뷰에 따르면, 사우디와 카타르 정부는 시리아 내전 초기부터 수니파 무장단체에 수백만달러의 군비(軍備)를 댔다. 이들 국가의 일부 급진적 성향의 부호들은 IS나 알카에다와 직접적으로 연계돼 테러 자금을 지원했다는 의혹도 받고 있다. 시아파인 알아사드 정권을 무너뜨리고 수니파 정권을 세우면 중동의 패자 지위를 갖는 데 좀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아랍 수니파 국가들이 내전을 부추기는 동안 서방이 제대로 대처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린다 카티브 전 카네기중동센터 소장은 최근 뉴욕타임스에 “유럽의 난민 위기는 스스로 불러온 측면이 있다”면서 “중동 분쟁에 오래전부터 개입해 온 유럽 국가들이 시리아의 전쟁과 난민 문제 해결에 보다 충분한 자원과 시간을 쏟았다면 지금과 같은 상황이 벌어지진 않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이 IS 격퇴에 별 효과를 보고 있지 못하는 공습 작전의 비용으로 그간 시간당 6만8000달러를 썼지만 구호금에는 그것의 절반도 부담하고 있지 않다고 뉴욕타임스는 지적했다.

일부에서는 중동·북아프리카인들이 정세 불안을 이용해 난민이란 이름으로 선진국에 ‘불법이민’을 하려 한다고도 주장한다. 유럽 언론들이 자국에 유입하는 난민을 영어로 난민을 뜻하는 ‘레퓨지(refugee)’가 아닌 ‘이미그랜트(immigrant)’라고 표현하는 것도 저들을 난민이라고 선뜻 볼 수 없다는 의중이 반영돼 있는 것이다.

피란을 가려다 쿠르디와 그의 형, 그리고 아내마저 잃은 쿠르디의 아버지 압둘라 쿠르디는 이 사건 이후 유럽에 안식처를 찾아주겠다는 여러 호의를 받았지만 모두 거절했다. 대신 그는 기자들에게 말했다. “내 모든 꿈이 사라졌다. 시리아로 돌아가겠다. 고향 땅에 아내와 아이들을 묻어 주고 그 무덤에서 코란(이슬람 경전)을 그저 읽어 주고 싶다.”

노석조 조선일보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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