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인 김병로 길 도로명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가인 김병로 길 도로명판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서울시 도봉구는 지난 8월 27일 초대 대법원장이자 인권변호사였던 가인 김병로(1887~1964) 선생의 옛 집터 인근에 ‘가인 김병로 길’이라는 명예도로명주소를 부여했다. ‘가인 김병로 길(Gain-KimByungro-gil)’이라는 명예도로명이 부여된 곳은 도봉로136길 1에서부터 도봉로136길 130까지의 640m 구간이다. 가인의 옛 집터 인근인 창동 북한산아이파크아파트 입구에서부터 쌍용아파트까지 이어지는 길이다.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따서 이름 지어진 ‘가인초등학교’와 ‘가인지하차도’와 인접한 곳이기도 하다.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는 안타깝게도 이렇다 할 구색을 갖추지는 못했다. 옛 집터로 가려면 대로변의 한 모텔을 끼고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야 한다. 그러면 낡은 빌라 한 채가 서 있는데 바로 그곳이 가인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다. 이를 알려주는 것은 ‘김병로 선생의 옛 집터’라고 쓰여 있는 자그마한 푯말이 전부다. 가인의 옛 집터는 이미 오래전에 민간에 팔려나가 보존하지 못했다는 것이 도봉구 측의 설명이다. 다행히도 가인 김병로 길에는 그의 호를 딴 ‘가인초등학교’와 ‘가인지하차도’가 인접해 있어 그 이름이 무색하지 않았다.

김병로 선생의 호인 가인(街人)에는 ‘거리의 사람들’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다. 나라를 잃고 설움을 겪는 동포를 생각하며 스스로 지은 아호다. 그의 아호에서 알 수 있듯 그는 평생을 나라를 위한 청렴한 법조인으로 살았다.

가인 김병로 선생 옛 집터 앞에 푯말이 세워져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가인 김병로 선생 옛 집터 앞에 푯말이 세워져 있다. ⓒphoto 임영근 영상미디어 기자

전북 순창 출신으로 유년 시절 의병활동에 참여하기도 했던 그는 1910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 니혼대학과 메이시대학 등에서 법률을 공부했다. 1919년 판사로 임용된 그는 1년 만에 변호사의 길로 돌아섰다. 무료로 독립운동가들을 변론해 주는 민족 인권변호사로서 이름을 떨친 건 그때부터다. 광복 후에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특별재판부 재판부장과 초대 대법원장을 지냈다. 사법부의 독립과 국가보안법 폐지를 외치며 이승만 정부와 대립한 바 있다.

김병로 선생이 창동에 터를 잡은 것은 1932년의 일이다. 창씨개명을 요구받는 등 사상사건의 변론 등에서 제한을 받게 된 김병로 선생은 이곳으로 내려와 농사를 지으면서 광복이 될 때까지 13년간 은둔생활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과거 창동역 일대는 서울이 아닌 경기도 양주군 노해면에 속해 있었다. 일제강점기인 1911년 10월 11일 경원선 용선~의정부 구간의 개통으로 서울 진입이 쉬워지면서 이 지역은 일제의 눈을 피해 떠돌던 독립운동가들이 모여 살기에 적합한 장소가 되었다. 이동진 도봉구청장은 김병로 선생이 창동역 주변에 처음으로 이주해 온 독립운동가 중 한 명이라고 설명했다. 이동진 구청장의 말이다.

“독립운동에 대한 탄압이 극심해지던 일제강점기 말기에는 저명인사에 대한 회유가 극심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독립운동을 하다가 친일로 넘어가는 것을 보면서 김병로 선생은 ‘차라리 시골에 내려가서 농사를 지으며 살지, 일본에 부역하지는 않겠다’는 결심하에 창동으로 내려와 터를 잡으셨다고 합니다. 그곳은 일본의 감시망에서 벗어나면서도 서울을 편히 오갈 수 있는 곳이었죠.”

이동진 도봉구청장 ⓒphoto 도봉구청
이동진 도봉구청장 ⓒphoto 도봉구청

자치단체의 역사·문화적 정체성

도봉구는 어떤 연유로 명예도로명주소 사업을 시작하게 됐을까. 이동진 구청장은 지역의 정체성을 강조했다.

“지방자치가 부활한 지 20년 되는 해입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기초자치단체인 ‘구’의 경우는 역사나 문화의 정체성이 부족한 것이 사실입니다. 서울시만 해도 모든 구가 ‘서울’로서 통칭되는 편이지 ‘구’로서 특색을 가진 곳은 별로 없는 것이 안타까웠습니다. 지방자치 시대에 주민들 내부에서 역사 문화의 정체성을 갖는 것은 주민 간의 통합을 위해서 매우 중요합니다.”

이 구청장은 도봉구만의 역사 문화 정체성을 만들고자 취임 초기부터 도봉구 일대의 역사적 자산을 직접 찾아다녔다. 그러던 중 가인 김병로, 고하 송진우, 위당 정인보 등 당대 최고 지성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인물들이 창동에 많이 거주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위인들이 살았던 집터를 일일이 확인해서 표석을 만들었다. 이 구청장은 시의원을 역임하던 2004년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딴 가인초등학교의 이름을 짓기도 했다. 도봉구에 새로 건립되는 초등학교를 김병로 선생의 호를 따서 짓자고 명명을 추진했던 것이다.

가인 김병로 길은 5년간 사용된 후 도로명주소심의위원회의 심의를 거쳐 연장 여부가 결정된다. 도봉구 측은 큰 변수가 생기지 않는 한 도로명주소 연장이 무리 없이 진행될 것으로 보고 있다. 이동진 구청장은 지역의 역사적 인물을 기억할 수 있는 사업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갈 계획이다.

“앞으로도 도봉구의 역사적 인물들을 발굴해내고 그분들을 기억할 수 있는 다채로운 사업을 계속해 나갈 생각입니다. 이러한 사업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우선 주민들이 어느 정도 역사적 인물과 우리 지역 간의 연관성을 인식할 수 있어야 하겠죠. 주민들이 직접 참여하며 지역의 위인들을 기억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나갈 것입니다.”

도봉구는 가인 김병로 길 이외에도 ‘김수영 길’ ‘함석헌 길’ ‘간송 전형필 길’ 등 3명의 인물에 대해서도 명예도로명을 부여했다. 또한 ‘도봉 현대사 인물길 코스’와 ‘역사 문화 관광길 코스’ 등을 만들어 지역 주민들이 바른 역사관과 시대적 가치를 공유할 수 있는 탐방코스도 마련했다.

명예도로명 부여의 법적 근거는 도로명주소법 제8조의 2 및 같은 법 시행령 제11조의 5 제2항이다. ‘도로명이 부여된 도로 구간의 전부 또는 일부에 대하여 도덕성, 사회헌신도, 공익성 등이 우수한 사람의 이름을 명예도로명으로 부여 가능’하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연세대학교 사학과 이재원 교수는 이러한 사업을 추진할 때 깊은 고민이 동반되어야 함을 강조했다.

“현재처럼 이데올로기적 대립이 첨예한 가운데 역사적 평가를 도외시하고 이데올로기적 잣대를 들어 평가하는 것은 분명 문제가 될 것입니다. 어떤 인물을 거리 이름으로 사용할 때 신중해야 할 것이고, 무엇보다도 정치가나 정치 이데올로기가 배제된 가운데 심도 있는 역사가들의 역사적 평가에 근거하여 인물을 선택해야 합니다.”

역사학자 E.H. 카는 역사를 “현재와 과거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정의했다. 기억되어야 할 역사적 인물을 발굴하고 그들을 기리는 명예도로명주소를 부여하는 것은 자치단체 차원에서 이뤄지는 과거와의 뜻깊은 교감이다. 역사를 기억하는 자치단체 도봉구의 행보가 주목받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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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달해 인턴기자·연세대 신문방송학과 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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