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4년 10월 권철현 한나라당 의원이 국정감사장에서 “금성출판사가 펴낸 고교 ‘한국근현대사’ 교과서가 민중사관에 입각해 쓰였고, 남한을 부정적으로 북한을 긍정적으로 서술했다”고 주장해 엄청난 사회적 파문이 일었다. 그때 나는 조선일보 문화부에서 학술 담당을 맡고 있었다.

당시 공방은 주로 정치권에서 벌어졌고, 교과서는 사회부 교육 담당 기자의 영역이었지만 교과서 내용의 분석은 문화부 학술기자의 몫이었다. 더구나 대학 학부와 대학원에서 한국사를 전공했고, 박사과정까지 수료한 터라 이 문제에 남다른 관심이 있었다.

2003년 국사 과목에서 한국근현대사 과목이 분리돼 검정 교과서 제도가 도입됐고, 검정 교과서들이 문제가 있다는 이야기는 얼핏 들었지만 특별한 관심을 갖지는 않았다. 권 의원의 문제제기가 있고 나서야 해당 교과서를 구해서 읽었다. 특히 현대사 부분은 좌편향이 매우 심하다고 생각됐다. 광복 후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점령군’, 소련군은 ‘해방군’으로 느껴지게 서술됐다. 남한의 새마을운동은 장기집권 수단이었고, 북한의 천리마운동은 사회주의경제 건설에 커다란 역할을 했다고 돼 있었다. ‘남한만의 정부가 세워진 것은 통일민족국가의 수립이 실패로 돌아갔음을 뜻하였다’ ‘일장기가 걸려 있던 그 자리에 펄럭이는 것은 이제 성조기였다’는 문장이 대한민국의 국사 교과서에 들어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다.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흡사한 교과서

도대체 어떤 사람이 썼길래 내용이 이럴까 궁금했다. 집필진은 교수 3명과 교사 3명이었다. 교사들은 모르는 사람이었고, 교수 중 두 명은 실력 있는 학자들이었다. 하지만 현대사 부분을 집필한 교수는 처음 들어보는 사람이었다. 학계와 언론계 경험을 통해 웬만한 한국사 전공 학자들은 이름 정도는 알고 있던 터라 고개가 갸우뚱했다. 이력을 찾아보니 역사교육 전공자였다. 한국현대사에 관한 연구를 거의 하지 않은 사람이 교과서를 썼다는 사실이 이해되지 않았다. 광복 후의 상황을 아는 학자라면 맥아더 연합군사령관 포고령과 치스차코프 소련군사령관 포고문을 나란히 싣고 학생들이 비교하도록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 교수는 사실(史實)에 무지하거나 다른 의도가 있거나 둘 중 하나였다. 어느 쪽이라도 자라나는 세대의 역사의식을 좌우하는 국사 교과서의 집필자로 부적합했다.

더 큰 문제로 생각된 것은 교과서의 내용이 20년 전 내가 대학과 대학원을 다닐 때 읽었던 현대사 관련 서적들, 예를 들면 ‘해방전후사의 인식’과 매우 비슷하다는 점이었다. 1980년대로서는 새로운 연구성과를 담은 책이었지만 그 후 많은 연구성과가 나오면서 낡은 책이 돼 버렸다. 특히 1990년대 이후 소련과 동구 공산주의가 붕괴되면서 공개된 수많은 자료들은 미국에 한반도 분단과 6·25전쟁의 책임을 묻는 수정주의 사관(史觀)의 위력을 크게 약화시켰다. 그런데 문제가 된 교과서에는 이런 새로운 시각이 전혀 반영돼 있지 않았다. 21세기에 살아갈 우리 아이들을 가르치는 교과서가 1980년대에 머물러 있는 것이었다.

이런 생각이 머릿속을 오가고 있을 때 진보적인 한국사 관련 학회들이 이 문제를 다루는 토론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초청받지는 않았지만 하고 싶은 말이 많았기 때문에 찾아갔다. 토론장에는 낯익은 사람들이 보였고, 금성출판사 교과서의 현대사 부분 필자도 눈에 띄었다. 사회자는 인사말을 통해 “성명서를 내자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이제 독재시대도 아닌데 성명서보다는 토론회가 적합할 것 같아 이 자리를 마련했다”고 했다. 아무런 문제가 없는 교과서를 야당과 보수 언론이 괜히 시비를 건다는 성토가 한동안 이어졌다.

나는 발언권을 얻어 해당 교과서를 읽은 소감과 문제라고 생각되는 점을 말했다. 단상의 발표자와 토론자는 내 말을 경청했다. 토론회장의 분위기가 이상하게 흘러간다고 생각했는지 강경파로 소문난 한 교수가 “당신이 소속된 신문 때문에 빚어진 일인데 왜 와서 엉뚱한 소리를 하느냐”고 일갈했다.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는 사회 각계와 언론의 거센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노무현 정권 5년 동안 아무런 수정 없이 100만부 가까이 교육현장에 배포됐다. 2008년 2월 이명박 정권이 들어서자 수정 요구가 빗발쳤고 결국 교육부는 그해 10월 36개 항목의 수정을 지시했다. 하지만 필자들이 수정을 거부하는 바람에 출판사가 수정하여 발간했고, 필자들은 소송으로 대응했다.

리영희의 중대한 오역(誤譯)

나는 금성출판사 한국근현대사 교과서 파동이 특정 집필자 때문에 빚어졌다고 생각했다. 좌편향 논란도 학계의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필자가 대학 때 읽었던 책들에 토대를 두고 교과서를 쓰는 바람에 빚어진 일이라고 여겼다. 또 그 교수가 전교조 해직교사 출신이라는 점이 그 교과서가 절반 정도의 학교에서 채택된 것과 무관하지 않다고 봤다. 하지만 국사학계가 그런 교과서를 만들 정도로 몰상식하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그 교수가 국사학계에 속하는 인물이 아니라는 점과 토론회장에서 내 발언에 대해 참가자들이 보인 반응이 그렇게 만들었다. 하지만 나의 이런 생각이 착각이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사건이 2011년 9월에 터졌다.

당시 교육부는 중학교 역사 교과서의 집필기준을 마련하고 있었다. 그런데 적지 않은 국사학자들이 ‘대한민국 정부가 유엔으로부터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았다’는 구절 가운데 ‘한반도의 유일한’이라는 부분을 빼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8년 12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린 유엔 총회에서 채택된 결의문은 유엔임시위원단 감시 아래 선거가 실시된 38선 이남 지역에 한정된 것이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합법성 범위는 한반도 전체가 아니라 남한이라는 주장이었다. 그들은 또 광복 후 정치사를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으로 서술하는 데 반대했다. 자유민주주의가 반공(反共)과 남북대립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했던 용어라는 이유였다. 역사 교육과정 개발의 자문 역할을 맡았던 교수들 중 상당수가 ‘자유민주주의’라는 용어의 사용을 반대하며 사퇴했다. 집필기준 마련을 담당했던 위원회는 ‘한반도의 유일한’이라는 표현을 삭제하자는 의견을 제출했다가 받아들여지지 않자 위원장이 사퇴했다.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에서 ‘한반도의 유일한’을 빼는 문제는 대한민국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매우 중요한 사안이다. 대한민국뿐 아니라 북한도 합법정부라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당시 유엔 총회 결의문을 한 번만 들여다보면 나올 수 없다. 결의문의 2항은 ‘Declare that there has been established a lawful government having effective control and jurisdiction over that part of Korea… that this is the only such government in Korea’라고 돼 있다. 이 문장은 “한반도의 그 부분(38도선 이남)을 효율적으로 통제하고 관할하는 합법적인 정부가 수립됐다.… 이것은 한반도에서 유일한 그런 (합법적인) 정부다”라고 해석된다.

그런데 리영희 한양대 교수가 1991년 한 기고문에서 마지막 문장을 ‘그 지역에서 그와 같은 유일한 정부’라고 번역하면서 유엔이 대한민국의 합법성을 인정한 것은 38도선 이남이라는 신화(神話)가 시작됐다. 앞 문장에 있는 ‘that part’를 슬쩍 뒷부분에 끼워넣은 것이다. 통역장교 출신이고 중앙일간지 외신부장을 역임해 영어에 능통한 사람이 어떻게 그런 오역(誤譯)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는 죽을 때까지 자신의 잘못을 바로잡지 않았다. 그는 2004년에도 한 강연에서 “이 나라는 엄청난 미신으로부터 출발했다. 그것은 대한민국이 유엔 총회에서 승인한 한반도 유일한 합법정부라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 같은 오역은 여러 사람이 거듭 지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국사학자들은 국사 교과서 논란이 있을 때마다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다. 2011년 9월에는 한 지방 국립대 교수가 그런 주장을 폈고, 한국사 검정 교과서 좌편향 논란이 불거졌던 2013년 12월에는 서울대 교수가 같은 주장을 담은 칼럼을 일간지에 기고했다. 한 사립대 교수는 자신이 집필한 검정 교과서에 그렇게 썼다가 교육부로부터 수정 명령을 받자 이를 거부하고 방송 인터뷰에서 거듭 같은 주장을 폈다.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식. ⓒphoto 조선일보
1948년 8월 15일 중앙청 광장에서 열린 대한민국 정부 수립 축하 기념식. ⓒphoto 조선일보

왜 자유민주주의에 거부감을 느끼나?

도대체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지 이해되지 않았다. 고등학생 정도의 영어 실력과 초보적인 논리적 사고력을 가진 사람이라면 쉽게 해석할 수 있는 영어 문장을 놓고 왜 이런 어처구니없는 소동이 계속되는 것일까. 그들이 원문을 보지 않은 것인가. 봤다면 해석할 실력이 없는 것일까,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 진실(眞實)을 최우선으로 생각해야 하는 학자들이 진실을 끝까지 외면하는 까닭은 무엇일까. 어느 경우든 이런 사람들에게 역사 교육을 맡겨놓아서는 곤란하다는 생각이 들기 시작했다.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하고 ‘민주주의’에 집착하는 이유도 궁금했다. 2007년 노무현 정부 때 마련된 집필기준에는 ‘민주주의’로 돼 있던 것을 이명박 정부 들어서 보수적 성격인 한국현대사학회의 건의를 받아들여 ‘자유민주주의’로 바꾸었다. 그 과정이 마음에 들지 않았을 수는 있지만 그것이 ‘자유민주주의’를 거부할 이유라고는 할 수 없었다. 오랫동안 한국 사회는 ‘민주주의=자유민주주의’로 받아들여 왔기 때문에 둘을 대립적으로 파악하는 것도 선뜻 이해되지 않았다. ‘자유민주주의’란 용어를 쓰면 사회민주주의를 포함할 수 없다고 주장하지만 사회민주주의는 자유민주주의의 하위 개념이라는 것이 정치학자들의 일반적 해석인 점을 감안하면 설득력이 떨어졌다. 그보다는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이라는 틀로는 1980년대 이래 좌파 사회에서 유행했던 ‘민중민주주의’를 담아내기 어렵다는 것이 진짜 이유가 아닐까 짐작이 갔다.

이런 짐작은 2년 뒤 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좌편향 논란이 불거졌을 때 유명 사립대 국사학 교수의 언론 인터뷰를 통해 확인할 수 있었다. 그는 광복 후 북한의 토지개혁에서 매매·소작·저당을 금지한 것을 ‘인민민주주의적 소유권’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했다. 대한민국 민법에 따르면 소유권은 ‘물건에 대한 전면적 지배권’이고 ‘사용·수익·처분 권리’를 핵심으로 한다. 매매와 저당이 금지된 불완전한 소유권을 ‘인민민주주의적 소유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은 학문적으로도 의문이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이런 주장이 교과서 서술에 들어갔다는 점이다. 교육부가 북한 토지개혁 때 소유권에 제한이 있었다는 사실을 서술하라는 수정 명령을 내리자 일부 출판사가 수정을 거부하면서 근거로 든 것이 바로 이 교수의 저서였다. 그 교수는 북한 토지개혁을 ‘근로농민적 토지소유권’이라는 개념으로 설명했는데, 이 개념은 1950년대 북한 학자의 연구서에서 빌려왔다는 사실이 다른 연구자에 의해 밝혀졌다. 결국 대한민국의 교과서를 북한의 개념틀로 서술하자는 것이었다.

국사학계 선후배들에게 묻고 싶은 것

더 충격적이었던 것은 2011년부터 새로 사용하기 시작한 한국사 교과서가 이전의 한국근현대사 교과서에 비해서 필진이 다양해졌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좌편향의 문제를 안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동안 몇 차례 국사 교과서가 사회적 논란이 되었고, 보수정권이 이어지면서 검정과 수정이 강화되는 바람에 노골적인 편향성은 줄었지만 곳곳에 미처 제거되지 않은 독침(毒針)들이 남아 있다.

정부는 지난 10월 12일 한국사 교과서의 국정 전환 방침을 발표했고, 국사학계는 한목소리로 국정화 반대에 나섰다. 국사학계가 명분론이 유독 강한 데다 “국사학자의 90%가 좌파”라는 여당 대표의 발언이 ‘국정화 반대’의 불에 기름을 부었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국정화에 대한 찬·반과는 별도로 나는 국사학계의 선후배들에게 묻고 싶다. 한국사 검정 교과서를 진지하게 읽어봤는지, 우리의 자녀들이 그런 책으로 우리 역사를 배우게 해야 하는지. 그리고 내가 그동안 갖게 됐던 의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현행 한국사 검정 교과서들의 좌편향 문제와 관련해서 새정치민주연합에 묻고 싶은 5가지 질문지를 만들어 출입기자를 통해 전달했었다. 그러나 야당은 “전문가들이 답할 문제”라며 답하지 않았다.

국사학계에 같은 질문지를 보내면 어떤 답이 올까. 이번 사태가 일어난 후 검정 한국사 교과서의 실상에 대한 제대로 된 토론회가 한 번도 열리지 않은 것은 몹시 아쉬운 일이다. 이제라도 그런 자리가 마련된다면 국사학계에 묻고 싶은 질문이 참 많다.

새정치민주연합에 던진 5가지 질문

1 일부 현행 한국사 검정 교과서는 북한이 김일성의 항일 업적으로 선전하는 ‘보천보전투’를 다루는 별도 박스나 사진, 본문을 싣고 있습니다. 그중 한 교과서는 김일성의 실명을 밝혔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2 한 교과서는 김일성 정권을 수립하는 1948년 8월 25일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에 남한 주민들이 비밀선거를 통해 참가했다고 서술했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3 일부 교과서는 1948년 12월 유엔총회에서 대한민국이 ‘유일한 합법정부’로 승인받은 범위가 ‘선거가 가능했던 38도선 이남 지역’이라고 주장했다가 교육부로부터 시정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4 8종 한국사 교과서에는 모두 노동운동가 전태일이 등장합니다. 반면 대표적 기업가인 이병철·구인회 등은 전혀 등장하지 않습니다. 정주영은 5종 교과서에 등장하지만 모두 경제와 관련해서가 아니라 남북 관계를 다룬 ‘소떼 방북’에 나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5 상당수 한국사 교과서는 북한 인권·핵 문제를 소홀히 다루고, 남북 관계를 양비론적으로 접근한다는 지적을 받습니다. 주체사상에 대한 서술도 3종 교과서가 교육부로부터 북한 주장을 그대로 소개하고 있어 학생들이 잘못 이해할 소지가 있다고 수정 명령을 받았습니다. 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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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민 조선일보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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