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러스트  이철원
일러스트 이철원

나는 지난해 10월부터 인생학교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맞다. 알랭드 보통의 그 인생학교다. 내가 맡고 있는 강의는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이다. 앞으로 치고 나가기에도 바쁜 세상에 ‘혼자 있는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이라니.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이 강의를 들을까. 그리고 혼자 있는 시간은 그들에게 무얼 해줄 수 있을까.

그전에 내가 왜 이 강의를 맡았는지부터 말해야겠다.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계속 성장하는 삶을 살고 싶었다. 내게 그 길은 혼자 보낸 시간에서 많이 찾아졌다. 그 얘기를 나누고 싶었다. 우리 한국 사람들이야말로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퇴직을 해서 혼자 지내는 시간이 많지만, 나는 회사에 다닐 때도 보통의 직장인들에 비해 혼자 지내는 시간을 많이 가졌다. 두어 달씩의 긴 여행들도 있었고, 몇 차례 조직에서 떨어져 나와 혼자 지낸 시간도 있었다. 그러니까 29년의 꽤 긴 회사 생활을 했지만 29년의 중간중간 나는 회사에 없었고 혼자 떠돌았다. 나는 그런 시간을 보내며 또 다음 몇 해를 살아갈 생각과 에너지를 얻곤 했다. 그중에서도 2006년 산티아고 순례는 내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시간이자 경험이다.

마흔 중반이었다. 여자라는 봉우리를 웬만큼 넘어섰다 싶으니 나이 듦이라는 봉우리가 앞을 가로막았다. 시간이란 줄어들기만 할 뿐 결코 늘어날 수 없으니 남은 인생은 추가 수입 없이 통장 잔고만으로 사는 삶과 같다고 여겼다. 그런 만큼 하루하루를 충만하게 보내고 싶었지만 실제는 그것과 거리가 멀었다. 몸은 예전 같지 않고, 감각도 떨어지고 후배는 치고 올라 오는데 일은 재미없었다. 이 고비만 넘기면 될지, 얼마나 더 일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길이 보이지 않았다. 일단 멈추고 숨을 고르며 길을 찾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회사로부터 일 년의 안식년을 얻었다. 나는 다시 혼자가 되기로 했다.

분명한 것은, 우리는 평생 자기 자신과 살다 간다는 거다. 부모도 형제도 자식도 어느 순간에는 헤어진다. 배우자와도 스물네 시간 같이 있지 않는다. 죽는 순간까지 떨어질 수 없는 존재가 바로 자기 자신이다. 그래서 나는 진짜 평생의 파트너인 내 자신과 의논했다. 무엇이 하고 싶은지, 아니, 무엇이 두려운지, 무엇을 감당할 수 있는지, 무엇을 포기할 것인지를.

산티아고 순례길이 가르쳐준 것들

이건 매우 은밀한 물음이어서 답이 쉬이 나오지 않았다. 꽤 긴 시간을 혼자 보내며 묻고 되묻자 어렵사리 속마음이 드러났다. 산티아고 순례 중이었는데, 나이 듦에 무릎 꿇고 싶지 않다는 것, 그대로 주저앉고 싶지 않다는 소리가 내 깊숙한 곳에서 터져 나왔다. 그뿐 아니었다. 뜻밖에도 내 안에 감사하는 마음이 가득 차 올랐다. 이십몇 년 전에 회사는, 무엇이 될지 안 될지 알 수 없는 스물네 살 아가씨를 뽑아 기회를 주고 키웠다. 고비 때마다 붙잡아 준 선배들도 여럿이었다. 물론 나도 열심히 했지만 혼자 한 게 아니었다. 지극히 당연한 이 사실이 내가 있던 자리를 떠나니 비로소 보였다. 돌아가고 싶었다. 내가 받은 것들을 후배들에게 돌려 주기 전에는 아직 회사를 떠날 때가 아니었다. 돌아가자, 가서 후배들 옆에 있자, 도움이 된다면 무슨 일이든 하자!

할 일을 알았으니 마음은 다시 고요해졌고 길이 보였다.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갔고 그 후 6년을 더 일하다 2012년 12월에 퇴직했다. 신입사원으로 들어가 29년을 일한 곳이었지만 서운한 마음 없이 그만둘 수 있었다. 모자란 능력이나마 모두 쏟아부었으므로 더 잘하지 못한 것에 대해서도 미련이 없었다. 스물넷에 입사해 오십을 넘겨 퇴직할 때까지 슬럼프와 도전은 수시로 찾아왔지만 갈림길이 나올 때마다 혼자 시간을 보내며 내게 물어 답을 구했고 그렇게 얻은 결론을 따라 확신을 갖고 나의 길을 갔다.

2015년 우리 사회에도 ‘혼자’라는 화두가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 같다. 지난해 많이 출판되고 팔린 책들이 그걸 알려준다. 온라인 서점 알라딘에서 ‘혼자’라는 키워드로 검색해 보면 ‘혼자 있는 시간의 힘’ ‘내가 혼자 여행하는 이유’ ‘새벽에 혼자 읽는 주역 인문학’ ‘혼자의 발견’ ‘나는 왜 혼자가 편할까’ 등 혼자를 주제로 한 책이 많이 나온다. 죄다 2015년에 출간된 책이다. 이 중에서도 사이토 다카시의 ‘혼자 있는 시간의 힘’은 2015년 베스트셀러 중 하나인데 이 책이 많은 사람들의 마음에 가 닿은 이유로 장은수 민음사 전 대표는 두 가지를 꼽는다. “소셜미디어에 한없이 자신을 공개하고 살아가야 하는 요즘 같은 시대일수록 사람들은 자신을 지키고 싶어한다는 점, 원치 않지만 혼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혼자 사는 삶을 감당할 방법을 정신적으로 도와주고 있다는 점”이다. (프레시안·‘베스트셀러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3’ 중에서)

이 의견에 전적으로 동의하면서 나는 우리가 왜 혼자 있는 시간을 가져야 하는지 한 가지 이유를 더 보태고 싶다. 한 마디로, 甲으로 살고 싶다면 혼자 있는 시간을 적극적으로 가질 것을 권한다. 乙 위에 서는 甲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그보다 훨씬 중요한 자기 인생의 甲으로 살 수 있는 비결이 혼자 있는 시간에 들어있다.

甲은 주도권을 쥐고 자기 뜻대로 한다. 불법을 저지르는 것이 나쁜 것이지 주도권을 쥐는 것이 나쁜 건 아니다. 그런데 뜻밖에도 우리는 지레 甲이 되기를 포기하고 乙의 인생을 산다. 자신이 중심에 서려면 먼저 원하는 바가 뚜렷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을 중심으로 생각하고 행동할 수 있다. 한데 사람들 대부분은 자신이 무엇을 원하는가에 별로 관심을 두지 않는다. 대신, 안테나를 온통 바깥을 향해 뻗고 세상의 기준을 좇는다. 자기 인생의 주도권을 세상에 내주는 거다. 어느새 우리는 자기 인생에서조차 乙이 되어 세상을 甲으로 모시며 산다.

한데 만약 주위 사람들이 다 이렇게 살고 있다면 이상하다고 느끼기 어렵다. 특히나 한국은 매우 집단적인 문화다. 이래서 우리에겐 혼자 있는 시간이 필요하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것은 자신이 속한 집단에서 빠져 나와 낯선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도 같다. 떠나 보면, 익숙했던 것들이 달리 보이고, 사느라 바빠 별로 마주하지 못했던 자신과도 제대로 만나게 된다. 자신이 다시 인생의 주인이 되고 자기 인생의 甲이 되는 시간이다.

중요한 건 이런 일은 대개 혼자 보내는 시간에 이루어진다는 거다. 혼자 시간을 보내는 가장 좋은 방법 중의 하나는 걷는 것이다. 좀 오래 집중적으로 혼자 걷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후배들이 고민 상담을 해오면, 특히 결혼한 남자 후배들에게는 꼭 부인에게 허락을 구하고 며칠간 혼자 걷는 시간을 가지라고 권한다. 홀로 한참을 걷다 보면 평소에는 분주한 일상에 가려 잘 보이지 않던 자신의 본마음이 보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던 마음에 길이 보일 거라고 말해준다. 나야말로 그런 체험을 통해 길을 찾았으므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요즘이야말로 혼자서 시간을 보내기에 좋은 때다.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최인아 전 제일기획 부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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