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2007년 여름, 57세의 남자는 청바지를 입고 알록달록 색동모자를 눌러썼다. 66㎏이던 체중은 47㎏으로 줄었지만 남자는 패션감각을 잃지 않았다. 헐렁해진 옷은 수선집에 가서 줄여 입었고, 깡마른 몸으로 쏟아지는 시선을 분산시키기 위해 모자에 더 힘을 줬다. 위암 4기. 생존율 10%라는 진단을 받고서도 남자는 평정심을 잃지 않았다. 아무 일 없는 듯 일상을 유지했다. 위의 4분의 3 이상을 절제하는 대수술을 하고, 항암치료를 여섯 차례 받으면서도 매일 출근하고, 사람들을 만나고, 공연장을 찾았다. 비슷한 예후의 환자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지만 놀랍게도 남자는 서서히 치료됐다. 의사를 만나는 횟수가 점점 줄어갔다. 2개월 후 다시 오라던 의사는 3개월, 6개월, 1년 후 오면 된다고 했다. 그리고 5년 후인 2012년, 완치 판정을 받았다. 의사는 그에게 “이제 암으로는 그만 오셔도 됩니다”라며 “(살아 남아줘서) 감사합니다”고 인사했다.

㈜코모스유통 이봉기(66) 대표 얘기다. 코모스유통은 255년 전통의 독일 필기구 브랜드 ‘파버카스텔(Faber-Castell)’의 한국 지사이기도 하다. 지난 1월 22일 서울 용산구에 있는 코모스유통 사무실에서 만난 그는 혈색이 좋았다. 사업이 잘되시냐는 질문에 “컬러링북 열풍에 힘입어 고맙게도 순항 중”이라고 말했다. 사무실 곳곳에는 개성 있는 미술품과 조형물이 눈에 띈다.

기업인으로서 그가 걸어온 행보는 입지전적이다. 말단사원으로 입사해 1980년대 파버카스텔을 처음 들여온 후 사업체를 독립하고, 프랑스 사무용품 ‘마패드(Maped)’, 이탈리아 프리미엄 필기구 ‘비스콘티(VISCONTI)’ 등의 한국 유통권을 따냈다. 무역업에 종사하면서 사람 만나는 일이 잦지만 술과 골프를 하지 않는다. 대신 예술가와 문화행사에 아낌없는 후원을 한다.

그와 30분이라도 대화를 해본 사람이라면 ‘남다르다’ ‘특이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편견을 부수는 말과 행동이 한둘이 아니다. 먼저 패션감각. 머리 끝부터 발끝까지 무엇 하나 평범한 게 없다. 이날 입은 수트는 동대문 광장시장에서 원단을 골라 광장시장 지하에 있는 맞춤양복점에서 맞춘 것이다. 안경과 손목시계, 청바지가 셀 수 없이 많고, 구두 역시 수제화다. 말 한마디, 물건 하나마다 자신만의 스토리가 분명하다. 게다가 칠순을 바라보는 나이인데도 웬만한 젊은이 못지않은 얼리어답터다. 페이스북을 초창기부터 사용해 일명 ‘페친’이 수천 명에 달한다. 일주일에 한 번 이상 공연장을 찾으며, 외국인 친구나 젊은이들과 템플스테이를 자주 한다. 이런 면모 때문에 언론 인터뷰 제안이 많지만 그는 잘 응하지 않는다. 이번 주간조선 ‘말기암을 극복한 사람들’을 위해 인터뷰 요청을 하자, 그는 흔쾌히 응했다. “이 주제라면 해주고 싶은 말이 정말 많다”는 이유였다.

그는 “나는 암을 극복한 게 아니다”라며 “완치라는 표현은 적절치 않다”고 말한다. “암세포를 잠복시킨 것이지, 치료한 것이 아닙니다. 내 몸을 잘 관리하지 못하면 재발하고 전이하죠. 완치 판정을 받은 2~5년 사이 사망률이 높다는 통계도 있습니다.” 그가 암 완치 판정을 받은 지 4년째, 지금도 “내 몸을 소중히 사용하려 노력한다”고 했다. 이 대표는 자신이 암을 이겨낸 가장 큰 비결은 ‘일상을 유지한 것’으로 꼽는다. “암을 대하는 미국 환자와 한국 환자의 태도는 확연히 다릅니다. 미국 환자들은 대부분 암 진단을 받고서도 일상을 유지하지만, 한국 환자들은 삶을 정리하는 경우가 많죠. 정리는 왜 하나요. 스스로 병을 악화시키는 지름길이에요.”

아침에 눈 뜰때마다 벅찬 감동

이 대표는 항암치료를 받으면서도 매일 출근했다. 항암치료 중 고통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몸이 땅속으로 꺼질 듯 기운이 없었고, 암세포들이 온몸 구석구석을 공격하는 듯 아픔이 몰려왔지만 그럴수록 일상을 유지하려 했다. 그가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부분이 있다. 바로 음식이다. 그는 철저한 채식주의자가 됐다. 현미 위주의 잡곡을 많이 먹고 버섯과 두부 등 식물성 단백질을 좋아한다.

두 번째로 꼽는 비결은 ‘긍정적 사고’다. 그는 “암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한다. “세상 모든 것에는 긍정적 기운과 부정적 기운이 있습니다. 사람도, 공간도 그렇지요. 어떤 곳에서 어떤 사람을 만나는지에 따라 긍정적 기운이 채워질 수도, 부정적 기운이 채워질 수도 있어요. 마치 주유와 같아요. 자동차에 어떤 기름을 넣느냐에 따라 차의 성능이 달라지듯, 어떤 기운을 채우느냐에 따라 사람의 에너지도 달라지지요.” 그에게 긍정의 에너지를 심어준 일등공신이 또 있다. 바로 클래식이다. 40년 넘게 이어온 그의 클래식 사랑은 전문가 수준이다. ‘클래식 전도사’를 자처하는 그를 통해 클래식 매니아가 된 지인이 수십 명이다.

세 번째 비결로는 ‘의사를 믿고 신뢰한 것’을 꼽는다. 그의 집도의는 이건욱 서울대 교수, 주치의는 방영주 서울대 교수였다. 이 대표는 암 진단 순간부터 철저히 의사를 믿고 신뢰하고 따랐다. “암에 걸리니 주변에서 ‘카더라’라는 말을 듣고 각종 민간요법에 의지한 약을 보내 오더군요. 나는 하나도 먹지 않았습니다.” 30년 넘게 독일과 이탈리아 등 유럽을 무대로 사업하면서 몸에 밴 서구식 합리주의가 이런 태도 형성에 영향을 끼쳤다. 그러면서도 그는 “의사는 치료사가 아니라 가이드”라고 말했다. 의사는 병을 치료할 수 있는 길만 안내해 줄 뿐, 직접적인 치료는 결국 환자 자신의 의지에 달렸다는 것이다.

암을 이긴 후 그는 하루하루가 낯설고 경이롭다고 했다. “스포츠로 치면 정규시간이 끝난 후 추가시간을 사는 셈”이라는 표현도 썼다. 그는 ‘내일 아침 눈을 뜰 수 있을까?’ 생각하며 잠자리에 들고, 아침에 눈뜨면 또 하루가 주어졌다는 생각에 벅찬 감동을 느낀다고 한다. “인간은 누구나 시한부 인생을 살죠. 영원히 사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저는 20대부터 ‘어떻게 살 것인가’ ‘어떤 삶이 행복한가’를 고민했어요. 남들 눈에는 뒤처져 있는 것처럼 보였겠지만 백세시대에 나는 역전했다고 생각합니다. 삶을 구체적으로, 주체적으로 살려는 태도가 암을 이긴 숨겨진 힘이 아닐까 합니다.”

그는 동안(童顔)이다. 겉으로는 50대 중반 정도로 보인다. 병색이라곤 찾아볼 수 없고, 피부도 팽팽하다. “현대과학의 힘을 빌리셨냐”는 짓궂은 질문에 “얼굴 때문에 병원을 찾은 적은 없다”고 답했다. “나이는 물리적 숫자가 아니다. 마음 상태다”라는 것이 그의 지론. 그는 마지막으로 이런 말을 남겼다.

“죽지만 않는다면 암은 한번 걸려볼 만합니다.”

이봉기 대표가 암을 이긴 비결

1. 일상을 유지하라. 암 진단 후 삶을 정리한다든지 공기 좋은 산으로 들어가기보다 아무 일도 없는 듯 일상을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나는 곧 죽을 사람’이라고 자포자기하면 병이 악화된다.

2. 긍정적으로 사고하고 호기심을 잃지 마라. 암은 죽을 병이 아니라는 신념을 갖는 것이 중요하다.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긍정적 에너지를 뿜는 장소를 찾고, 긍정적 기운을 주는 사람을 만나라. 매사에 호기심을 잃지 않는 것도 삶의 의욕을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된다.

3. 음식과는 타협하지 마라. ‘암 환자는 암으로 죽지 않는다. 못 먹어서 죽는다’라는 말이 있다. 잘 안 먹히더라도 수시로 먹어라. 나는 회사 근처로 집을 옮기고 들락거리면서 하루 7~8끼를 조금씩 자주 챙겨먹었다. 단, 의사가 권하는 식이요법대로.

4. 의사를 믿고 신뢰하라. 한국 암 환자 중에는 의사를 믿지 않고 스스로 의사처럼 구는 경우가 많다. 나는 의사의 지시를 철저히 따랐고, 그렇게 하면 분명히 나을 것이라고 믿었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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