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 명절에 북한 평양의 식당에서 북한 주민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설 명절에 북한 평양의 식당에서 북한 주민들이 음식을 먹고 있다. ⓒphoto 조선일보

북한에 있을 때 나는 평양음악무용대학에서 무용을 전공했다. 하고 싶어서 한 무용은 아니었지만 제법 무용가로서 실력을 인정받았다. 그렇게 대학을 졸업하고 1년이 안 된 20대 중반에 결혼을 하게 됐다. 구체적인 직책을 밝힐 수는 없지만 내가 당시 시집을 간 시댁은 북한의 고위층이었다. 집은 궁궐처럼 넒은 마당을 가진 단독주택이었다.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난 나는 졸지에 고위층 집안의 일원이 되어 풍족한 생활을 누릴 수가 있게 됐다. 지금 많은 이들이 내게 신데렐라의 꿈을 이뤘는데 왜 탈북을 했냐고 반문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풍족한 생활 속에서 점점 마음의 빈곤함을 느껴갔다. 탈북 여성들의 힘겨웠던 삶과 비교하면 풍요 속의 빈곤을 겪었다는 내 얘기가 복에 겨운 말처럼 들릴 수도 있다. 하지만 고위층의 일원으로서 내가 겪은 그들의 모습을 통해 북한의 빈부격차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느꼈으면 한다.

특히 설 명절이 되면 시댁은 각종 산해진미로 넘쳐났다. 북한에서 고위층의 설은 오히려 남한의 웬만한 부자보다도 먹을 것 등 모든 것이 풍족했다. 시댁은 김일성 살아생전에 자주 직통전화가 걸려오는 집이다 보니 전화 한 통이면 안 되는 일이 거의 없었다. 내가 북에 있던 당시(1985~1996)는 1월 1일을 설 명절로 지내고 있을 때였다. 음력설을 인정하기는 했지만 간부들의 진짜 명절은 신정이었고, 그 당시 구정은 명절이라는 느낌이 들지 않을 정도로 조용했다. 1월 1일이 되면 우선 시아버지는 새벽 5시에 당중앙위원회에 설 인사를 먼저 해야 한다고 집을 나섰다. 그만큼 고위층 사이에서는 높은 이에게 인사를 드리는 게 매우 중요했다. 시아버지는 철도를 담당하였기에 새해 첫 열차 출발은 꼭 참석해야 했다.

설 명절 진상품들은 한 주 전부터 집에 배달이 되기 시작했다. 당시 39호실제품(당에 올리는 제품을 지칭)들의 견본품부터 집에 가져오는데 그 종류는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말이 견본품이지 배달된 물품들은 시댁에서 거의 챙겼다. 그 견본품들은 일반 주민들은 구경하기 힘든 물건들이 대다수였다. 각종 최고급 옷감들, 명품 시계, 일본에서 들여온 남녀 속옷들은 물론 각종 진귀한 식재료들도 많았다.

노루는 산 채로 가져오고 팔딱거리는 산천어는 나무상자로 몇 상자였다. 노루는 피가 약이라고 산 채로 신선하게 쓰라고 가져왔다. 산천어 역시 피를 보양제로 먹기 위해 가져오는데 아직 살아 움직이는 산천어들을 잡아서 꼬리 부분을 칼로 베면 한 숟가락 정도의 피가 나왔다. 시어머니 혼자 보양을 위해 거의 먹었다. 비위가 약한 사람들은 입에 대기도 힘든 동물 피를 건강을 위해서라면 아낌없이 먹는 시댁 식구의 모습을 자주 봤다.

사향과 웅담과 같은 각종 약재도 빼 놓을 수 없는 품목이다. 물론 다 자연산의 최고급 제품들이다. 그리고 바다에서 건져 올린 싱싱한 해산물들도 일품이었다. 싱싱하고 색이 선명한 털게와 대게를 비롯해 한 마리가 15㎏ 이상으로 큰 왕문어가 배달됐다. 대하도 빼놓을 수 없는 품목인데, 아직도 한국에 와서 그때 본 새우보다 크고 싱싱한 것은 본 적이 없을 정도다. 남한에서도 쉽게 구하기 힘든 이런 진귀하고 신선도가 높은 해산물들을 고위층들은 너무나도 쉽게 접하고 있었다.

북한 정부가 설날이면 국민들에게 공식적으로 배포하는 설 선물들도 있었다. 고위층 같은 경우에는 중앙당 간부들은 부장급과 일반 지도원급으로 먼저 급수를 나눴다. 나눠진 급수대로 해당 배급차량이 다니면서 가정마다 오곡식량, 육류, 어류와 채소 등이 공급된다. 우리 시댁처럼 한 부서 전체를 담당한 고위층은 국가가 공식적으로 공급하는 식품들은 거의 다 남에게 나눠 준다. 왜냐하면 국가가 주는 것은 상대적으로 신선도가 떨어지기 때문이다. 앞서 말한 당에 올리는 진상품들이나 전국 각지에서 배달되어 오는 산해진미를 먹기에도 바쁘기 때문이다.

설음식 준비는 출장요리사가

설이면 지방의 각 지역에서도 시댁이 주문한 각종 특산품들이 올라왔다. 붉은 갓김치를 함경북도 무산에서 공수해 왔다. 붉은 갓으로 담근 갓김치는 항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시아버지가 특히 좋아했다. 양강도에서는 고추장과 된장이 배달돼 왔다. 개성에서는 요리사가 직접 집에 와 보쌈김치를 만들었다. 냉면과 온면은 함흥에서 소문난 요리사가 시댁에 와서 뚝딱 만들어냈다. 북한의 고위층들은 출장요리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집으로 불러들이고 있었다. 외국을 좀 다니는 간부들은 와인을 비롯한 양주들을 꺼내 마시며 설날에도 서양 분위기를 내는 경우가 많았다. 시댁은 토속적인 음식을 좋아한 편이라 주로 설이면 한식 위주의 전통음식을 많이 차렸던 것 같다.

나는 설을 떠올리면 맛있는 음식을 먹던 기억보다는 항상 술상을 차렸던 기억밖에 나지 않는다. 왜냐하면 큰 집안의 며느리로서 설날 아침부터 밤 12시가 될 때까지 10번에 가까운 술상을 차렸기 때문이다. 각종 선물을 안고 설날 인사하러 오는 각양각층의 손님들에게 무조건 술상을 차려서 거하게 대접해야 했다. 술상에 곁들이는 음식은 다양했다. 꿩 육수로 만든 만둣국은 필수이고 신선로, 각종 회무침 등이 놓였다. 또한 대게 찜과 보쌈김치는 빼놓을 수 없는 시댁의 단골 메뉴였다. 시댁 식구들은 면발이 질긴 것이 특징인 따뜻한 농마국수를 술과 함께 곁들여 즐겼다. 대게 살을 곱게 발라서 오이에 무쳐 새콤하게 겉절이처럼 먹기도 했다. 높은 간부급들이 손님으로 찾아오면 신선로를 만들어 대접해야 했다. 며느리들은 요리를 하진 않았지만 술상에 메뉴들을 서빙하기에 바빴다. 요리는 출장요리사들이 담당해 주문하는 메뉴들을 순식간에 만들어 냈다. 고위층의 설은 가족과 함께 오붓하게 보낸다기보다는 고위층끼리 모여 함께 술을 마시거나 각종 진귀한 음식들을 나눠 먹는 날이었다.

그렇게 설이 지나면 시아버지는 며느리들 보고 고생했다고 달러를 줬는데, 우리는 그 돈을 주로 쇼핑하는 데 썼다. 외화상점에 가서 수입품들을 사거나 평양 최고의 사우나인 창광원에 가서 찜질을 하며 명절증후군을 극복했다. 설이 지나서야 남편이랑 외출도 함께 할 수 있었다. 내가 기억하는 북한의 설은 참으로 이중적이다. 누군가는 고위층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호의호식하고 나머지 사람들은 질이 낮은 국가 배급품이라도 받기 위해 애쓰기 때문이다.

북한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있다. 나는 비록 고위층 집안의 며느리로서 풍족한 생활을 누렸지만 이런 북한의 이중적인 실태는 시간이 흐를수록 나의 생각을 바꿔 갔다. 고위층은 날마다 설날 같은 풍요를 느끼지만, 이와 상반된 많은 사람들은 설날 하루만이라도 풍족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간부들은 나라의 전기 사정이 아무리 어려워도 집에서 사시사철 더운물을 사용한다. 전용하우스에서는 온갖 신선한 채소들을 매일 공급해 먹는다. 사실상 북한의 고위층들은 일 년 365일 풍요가 넘치는 설날이다. 그래서 나는 늘 설이 다가오는 이맘때가 되면 마음이 아프다. 민족 대명절인 설의 진정한 풍요가 남한을 넘어 북한의 모든 이에게 전달되는 그날이 속히 오길 바란다.

방소연

남북하나 통일예술단장·자강도 강계

방소연 남북하나 통일예술단장·자강도 강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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