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년 1월 1일에 촬영한 강유씨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큰사위, 부인, 강유씨, 둘째딸, 어머니, 큰딸과 손녀.
1995년 1월 1일에 촬영한 강유씨의 가족 사진. 뒷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큰사위, 부인, 강유씨, 둘째딸, 어머니, 큰딸과 손녀.

“날마다 설날이면 나는 좋겠네.” 이 말은 북한의 어린이들이 설날이 오면 설 경축연회장에서 김일성을 위하여 부르는 노래가사 중의 한 구절이다. 아마 북한에서 사는 모든 사람은 이 노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것이다. 어린이는 물론 어른들도 설 명절이 와야 목의 때를 벗길 수 있고 돼지고기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이것도 공급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집에서 빚은 술로 설을 지내기도 한다. 그래도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는 어린이들에게 설 명절이면 어김없이 벽돌과자가 공급됐다. 아마 남한에서는 벽돌과자라면 생소한 생각이 들 것이다. 벽돌과자란 밀가루와 옥수수가루를 절반씩 넣고 만드는 과자인데 설탕이 없어 사카린이나 단 풀물을 넣다 보니 발효가 되지 않아 벽돌처럼 딱딱해서 붙은 이름이다. 이가 없는 노인은 전혀 먹을 수 없을 정도로 딱딱하지만 아이들은 과자를 쉽게 맛볼 수 없으니 이마저도 좋아한다. 어른들은 벽돌처럼 굳은 과자를 이리저리 돌려가면서 뜯어먹는 자식을 보면서 많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러면서 비록 딱딱한 과자를 먹는 설이지만 ‘이제 한 해가 지나면 나아지겠지’ 하는 희망을 갖기도 한다.

지금 생각해 보면 철모르는 어린 아이들이 “날마다 설날이면 나는 좋겠네”라고 노래 부를 때 그것을 대견하게 여기면서 손뼉을 치고 있는 김일성은 어떤 생각이었을까 싶다. 설날이 오면 벽돌과자라도 받는다고 좋아하는 어린 아이들의 마음을 김일성은 죽기 직전에라도 알았을까.

벽돌과자가 보급되던 날

아이들은 설날이 와야 비록 하루였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어른들은 어른대로 술잔이라도 나눌 수 있으니 설을 간절히 기다렸다. 나는 북한에서 한의사로 지냈기 때문에 설날이면 우리 집에는 여러 곳에서 선물이 배달돼 왔다. 수산사업소에 배 타는 선장, 혹은 갑판장이 선원을 시켜 물고기를 보내 줬다. 그리고 농장에서는 작업반장이 콩이나 강냉이를 달구지에 실어 보내기도 했다. 이들 모두 평상시는 물론 왕진 가서 치료해주어 병을 완치하게 해주었다고 해서 은혜를 갚은 것이다. 내 주변에는 이런 사람이 한두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탈북하였을 때도 북에 남아 있는 우리 가족은 이런 분들의 도움으로 살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평범한 한 명의 의료일꾼에 지나지 않은 나에게도 설날이나 명절이면 선물이 오는데 당직에 있거나 행정 간부로 있는 사람들에게는 과연 얼마나 많은 선물이 들어왔을까 생각해 본다. 한편으로는 이런 선물은 고사하고 명절음식 공급도 못 받는 사람들은 어떤 마음으로 설을 보냈을지 마음이 아프다.

북한의 기업소나 직장에서는 설 명절을 앞두고 보름 전부터 준비를 한다. 내가 의사로 근무하던 종합진료소에서도 설이 되면 준비에 여념이 없었다. 그 당시 나는 설 명절에 공급할 물품을 정하는 후방사업을 책임지곤 했다. 국가에서 공급해주는 것은 각 가정당 술 한 병과 어린이가 있는 집에 1㎏ 정도의 선물과자를 주는 것이 전부였다. 그 외 설 준비는 직장 단위로 해야 했다. 종합진료소에는 의사, 간호사 43명이 근무하고 있었다. 그들이 설을 제대로 보내게 하려면 돼지고기와 수산물 그리고 채소도 준비해서 공급해야 했다. 그때만 하여도 기업소에는 후방사업기지가 있었는데 힘 있는 기업소들은 수산물 기지와 고기 잡는 배를 자체로 운영하기도 했다. 또 어떤 사업소에서는 염소목장과 수천 평의 땅에 강냉이를 심거나 콩을 심어 그것으로 직장 원들에게 명절 선물을 공급했다. 우리 종합진료소에서도 약초밭을 조성해 수백 평 되는 후방 기지를 조성하고 거기서 수확한 강냉이로 돼지고기를 구입했다. 그리고 직원들 가운데 세대주는 돼지고기 2㎏, 독신자에게는 1㎏을 주는 식으로 공급했다. 돼지머리와 족발과 내장으로 순대와 술안주를 만들어 설 전날에는 송년회를 가지기도 했다. 이렇게 진료소 구성원 모두가 모이는 날은 일 년에 설 명절 단 하루뿐이었다.

세뱃돈은 없어도 情은 넘쳤다

북한도 남한과 마찬가지로 가족들이 모여서 설을 보낸다. 그러나 남한처럼 외지로 나가 있는 자식들이 설을 보내려고 부모가 있는 고향으로 오지는 못한다. 교통도 발달하지 않았지만 자신이 살고 있는 지역을 벗어날 수 있는 통행증을 발급해 주지 않기 때문이다. 주로 거주하고 있는 가족 단위로 설을 조용하게 보내는 게 남한과는 구별되는 특징이다. 설날 아침식사를 하고 나면 직장에서 친구들이 세배를 하러 온다.

종합진료소에는 부모님을 모시고 있는 사람이 나하고 약국장으로 일하는 재일귀국동포 부선생뿐이었다. 우리 집에서 젊은층들이 모여서 아버지와 어머니께 세배하고 술과 설음식을 한 상씩 차려 나눠 먹었다. 물질적인 여유가 없기 때문에 남한처럼 세뱃돈을 주는 경우는 없다. 술을 한잔씩 나누고 나서는 진료소장, 보건과장, 당 비서 집을 차례로 돌면서 설 인사를 한다. 그게 내가 겪은 북한의 설 풍경들이다. 비록 돈은 없고, 이동도 쉽지 않았지만 사람들의 정이 있었고, 서로 인사를 나눌 줄 아는 여유는 가지고 있었다.

북한은 설이면 날씨가 영하 20도를 밑돌 정도로 추웠지만 사람들은 거리와 골목을 누비면서 설 명절을 보낸다. 이렇게 여러 집을 방문하다 보면 어떤 친구들은 취해서 걸음걸이가 비틀거리지만 어깨동무를 하며 서로를 의지했다. 아직도 북한에서의 설을 회상할 때면 가진 건 없어도 서로를 향해 활짝 웃을 수 있던 마음이 떠올라 따뜻해지는 느낌이다.

이제 올해로 벌써 십 년째 대한민국에서 설을 맞이하고 있다. 해마다 설날이 오면 마음은 여전히 두고 온 고향에 대한 여러 가지 추억과 그리움에 가슴이 아련히 젖어든다. 통일되기 전에는 가볼 수 없는 고향, 고향에서 살기에 지쳐 있을 가족들을 생각하면 아직도 눈시울이 붉어진다.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어찌하여 저 북한 땅은 변하지도 않는지 안타깝다. 곧 다가올 ‘설’을 앞두니 대한민국에 정착해서 처음 맞던 설날이 떠오른다. 첫 설날이라 눈에 보이는 대로 재료를 준비해 제사상을 준비했더니 무려 그 종류가 80여종이 되었다. 상다리가 휘어지게 올려놓아도 제사상에 준비한 것을 다 올리지 못했다. 결국 상을 아예 치우고 바닥에다 준비한 찬을 놓고 조상에게 처음으로 제사를 올렸다. 비록 바닥에 제물을 차렸지만 조상님들께서 남한에 와 처음으로 받는 이 풍성한 제사상에 만족했을 거라는 생각에 내심 기뻐했던 것 같다.

남한에서 설을 맞이하며 지금은 철벽 같던 이웃들과도 서로 소통하게 되고 차츰 이야기할 사람이 생겨 나는 기쁨을 느끼고 있다. 그리고 이제는 집에서 항시 먹는 그런 음식으로도 제사상을 쉽게 차리고 제사를 지내며 다른 이웃들과 별반 다르지 않은 모습으로 이곳에서 설을 보내고 있다. 아직도 설날이 오면 “날마다 설 날이면 나는 좋겠네”라는 노래가사가 귓가에 맴돈다. 하루 빨리 통일이 되어 진정한 설날을 남북한이 함께 맞이하는 날이 오기를 간절히 꿈꿔 본다.

강유

한의사·함경남도 홍원

강유 한의사·함경남도 홍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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