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목으로 심은 벚나무가 16년 만에 꽃 터널을 만들 만큼 자랐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묘목으로 심은 벚나무가 16년 만에 꽃 터널을 만들 만큼 자랐다.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산 아래보다 1~2주 늦게 만개한 벚꽃이 집 입구에 꽃 터널을 만들었다. 개 세 마리가 벚꽃 길을 뛰어나와 낯선 손님을 경계하며 짖어댔다. 20그루 가까이 늘어선 벚꽃 길 옆으로 또 다른 길이 집으로 이어졌다. 자갈 길을 따라 펼쳐진 정원에 색색 꽃들이 한창이다. 조팝나무, 수선화, 튤립, 민들레, 황매화를 비롯해 노랑, 분홍의 야생화들이 앞다퉈 봄볕을 즐기고 있다. 작약, 데이지, 아이리스, 양귀비, 수국 등도 정원 여기저기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다.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칠현산 자락에 자리 잡은 이곳은 ‘한국의 타샤’를 꿈꾸는 도예가 지숙경(52)이 16년에 걸쳐 만든 비밀의 정원이자 도예공방인 ‘지요’이다.

미국의 대표 동화작가인 타샤 튜더(1915~2008)는 56세 때 버몬트주 산골로 들어갔다. 18세기풍의 목조주택을 짓고 그의 손으로 일궈낸 99만㎡(30만평)의 정원은 미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원으로 꼽힌다. 미국을 넘어 세계적으로 타샤의 삶을 꿈꾸는 사람들은 많지만 실제로 행동에 옮기는 사람은 드물다. 지숙경씨는 자신의 도전에 대해서 “무모해서 가능했다”고 말하며 웃었다.

지난 4월 12일 서울에서 자동차로 두 시간 가까이 걸려 지요의 정원에 도착했다. 차를 세우고 갤러리가 붙어 있는 프로방스풍 목조주택에 들어서기까지는 눈 둘 곳이 많아 시간이 걸렸다. 감탄사를 내뱉기 바쁜 취재진을 맞으며 지씨가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제가 정원에 대해서만큼은 겸손하지 않습니다.” 척박한 땅을 낙원으로 만든 타샤도 똑같은 말을 했다. 산골 오지의 고추밭을 사서 5000㎡(1500평)에 이르는 정원을 일궜으니 그의 자부심도 이유가 있어 보였다. 현관에 놓인 테이블 위에 ‘타샤의 정원’을 소개한 책 네 권이 꽂혀 있었다. 넓은 창으로 마을 풍경이 수채화처럼 들어왔다.

아일랜드식탁이 놓인 주방은 손님 수십 명을 치러도 될 만큼 널찍했다. 주방 옆문으로 나가자 큰 감나무 옆으로 작은 계곡이 산으로 연결됐다. 산에서 고라니가 내려와 텃밭 농사를 망치는 바람에 고민이라고 그가 하소연했다. 야외 테이블에 그가 농사를 지은 채소들로 만든 음식이 올라왔다. 아침에 캐왔다는 냉이를 버무린 부침개에 부추무침, 쌈채소, 겉절이 등 건강한 텃밭이 그대로 식탁에 올라온 듯했다. 그가 식탁에 앉으며 말했다.

“봄 부추는 보약이에요. 아무도 안 주고 혼자 먹는대요. 처음 1~2년은 여기 앉아 있으면 그런 생각이 들었어요. 내가 무슨 팔자를 타고 나서 이런 복을 누리나.”

이곳에 들어오기 전 그의 삶은 180도 달랐다. 까칠한 도시여자로 잘나가는 커리어우먼이었다. 도예는 배운 적도,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화려한 도시의 삶을 버리고 자연 속에서 그가 찾은 것은 무엇인지 들어봤다. 방문객에게는 더없이 평화롭고 여유로워 보이지만, 그에 대한 대가도 톡톡히 치렀을 것이다. 타샤의 삶을 통해 그가 배웠듯이 도예가이자 정원사이자 농부이자 요리사가 되기까지, 그의 삶이 또 누군가에게는 용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밭에서 캔 야채로 차려낸 밥상.
밭에서 캔 야채로 차려낸 밥상.

프로방스풍 주택 앞에 갤러리를 만들었다.
프로방스풍 주택 앞에 갤러리를 만들었다.

그는 숙명여대에서 정치학을 전공했다. 미국 애리조나대학에서 석사를 마치고 박사과정을 밟다 귀국했다. 영자신문 기자로 시작해 클래식 공연 기획, 광고대행사에서 30대 초반을 보냈다. 6년간 세 곳의 직장을 바꾸면서 치열하게 살았지만 그가 내린 결론은 ‘조직생활은 나와 맞지 않다’는 것이었다. ‘아닌 것은 절대 아니다’, 타협 없는 성격은 특히 윗사람의 불의를 참지 못했다.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을 찾았다. “오랜 꿈이 목수였어요. 목공소를 찾아갔는데 상대도 안 해 주대요. 목공 프로그램이 있는 청소년직업훈련소를 찾아갔죠. 담당자가 비행청소년 교육장이니 주부 취미교실에 가보라는 겁니다. 나는 취미가 아니라 직업을 원하는데.”

목수 말고 자연에서 할 수 있는 일이 뭘까. 고민하던 차에 김기철 도예가를 만났다. 그에게 장작가마의 예술을 가르쳐준 스승이다. 김기철 선생의 문하생이 되어 곤지암 작업실로 출근했다.

“처음엔 도예보다 뒷산에 가서 콩밭 매고 나물 캐는 일이 훨씬 재미있었어요. 흙 주무르는 시늉만 하고 실컷 놀았죠. 그렇게 1년을 보내고 나니 도자기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어요.”

스승은 철없는 제자를 말없이 기다려줬다. 유약을 바르지 않고 조선 소나무 장작가마에서 구워낸 작품은 가스가마에서 온도 맞춰 구워내는 작품과는 달랐다. 소나무 재가 만들어낸 무늬도, 불의 기운도, 흙의 조화도 사람의 손이 닿지 않은 영역이다. 얄팍한 손재주나 욕심이 빚어낸 것과는 비교할 수가 없다. 가스가마는 실패율이 낮은 반면 장작가마는 성공률이 20%밖에 안 된다. 그래서 가마에 불을 때기 전 고사를 지내는 것이다. 처음에는 막걸리 마시기 위한 핑계라고 여겼던 그도 이제는 두 손을 모으고 ‘가마 귀신’을 향해 진심으로 빌게 된다고 했다. 자연이 가르쳐 준 겸손이다.

점점 편리한 가스가마로 대체되고 있지만 스승처럼 그도 고집스럽게 소나무 장작가마를 고수하고 있다. 안성 산골로 들어온 이유도 가마터를 위해 비탈진 땅을 찾아서였다.

“서울에 있던 10평(33㎡) 아파트를 탈출하면서 정리한 돈을 들고 경기도 일대를 쫓아다녔어요. 1년쯤 다녀보니 안목이 생기대요. 2년 만에 이 땅을 만났는데 너무 좋은 거예요. 땅 주인한테 속마음 안 들키려고 손으로 가리고 웃었잖아요. 하하.”

산비탈은 가마터에 딱 적당했다. 감이 주렁주렁 열린 감나무가 특히 마음을 끌었다. 부모님은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는 부산에서 여유 있는 사업가의 늦둥이 막내딸이다. 결혼할 나이도 훌쩍 넘긴 딸이 혼자 산골로 들어가겠다니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어느 날 어머니가 전화기에 대고 물었다. “행복하나? 그럼 됐다.” 그 후 어머니는 전폭적인 지지를 해주고 있다.

여자 혼자 고추밭에 집을 짓는 과정은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짐작이 간다. 전국을 헤매 흙을 구하고 장작가마 네 기를 들였다. 그 옆에 한 칸짜리 작은 황톳집도 지었다. 처음엔 자동차 바퀴가 빠질 정도로 길도 땅도 엉망이었다.

“김기철 선생님이 오셔서 이런 오지를 어떻게 찾았느냐고 놀랄 정도였어요.”

지숙경 작가처럼 장작가마를 지키는 도예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지숙경 작가처럼 장작가마를 지키는 도예가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

꿈과 현실 사이

아침이면 오븐에 구운 크로아상을 먹으며 신문 읽기, 그가 집을 지으면서 상상한 장면이었다. 꿈과 현실은 전혀 달랐다. 일단 너무 무서웠다. 외딴집에 여자 혼자 산다는 것을 노출시키지 않으려다 보니 신문은커녕 가스통도 직접 사다 날랐다. 저녁이면 바깥 소리에 온 신경을 집중하느라 음악소리도 키울 수가 없었다. 전망 좋은 큰 방 대신 작은 방에 누워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옷 갖춰 입고 밤을 견뎠다. 그 두려움을 떨쳐내기까지 1년 반이 걸렸다.

또 다른 문제는 풀과의 전쟁이었다. 풀 뽑고 몇 걸음 옮겨 뒤돌아보면 다시 풀이 자라 있을 정도라고 했다. 꽃을 심기 시작한 것도 사실 풀을 죽이기 위해서였다. 터널을 만들 만큼 자란 벚나무도 16년 전에는 작은 묘목이었다. “이제 정원이 제 모습을 갖춘 거죠. 정원이 제 역할을 하려면 10년은 넘어야 하거든요.”

그의 정원은 최대한 자연에 맡긴다. 반듯이 깎고 다듬는 인공미는 질색이다. 정성과 시간을 들일 뿐, 살고 죽는 것은 식물들의 몫이다. 작품 만드는 틈틈이 흙과 씨름하며 시행착오를 겪다 보니 세월이 스승이었다. 쭈그리고 앉아 허리 병이 생길 정도로 호미질을 하면서 가꿔낸 그의 정원은 그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의 쉼터가 되고 있다.

‘지요의 정원’은 열성팬들이 있다. 그에게 도자기를 배우는 제자들이다. 개중엔 도자기보다 그의 밥이 목적인 사람도 많다. 대부분 전문직이나 기업의 임원들로 자연의 위로에 목마른 도시인들이다. 그들이 주물럭거려 놓은 작품은 모아 두었다가 봄, 가을 두 차례 장작가마에 넣는다.

정신없이 바쁜 계절이지만 올해는 한가하다. 한 해도 거르지 않았던 봄 가마를 건너뛰었다. 요즘 그는 고민이 많다. 한 번 가마 때는 비용만 500만원 가까이 든다. 그럭저럭 견뎌왔는데 올해 처음으로 비용이 부담스러워졌다. 작품 판매가 예전 같지 않다. 경기가 어렵다는 것을 산골서도 체감한다.

그는 바깥에 자신을 알리는 일에는 게을렀다. 장작가마를 붙들고 흙에 진심을 담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힘들 땐 풀 베기를 하면 걱정이 사라졌다. 무념무상, 호미질은 그가 추천하는 최고의 힐링법이다. 자연이 주는 위로가 이렇게 클 줄은 몰랐다고 한다. 그 자연은 작품에 그대로 스며들었다. 나뭇잎 모양의 수반이 되고 튤립 모양의 화병이 됐다.

방송·잡지들이 취재를 하겠다고 나섰을 때도 “작가가 무슨…” 큰소리 치며 거절했다. 명함을 달라는 사람들에게도 “흙 만지는 사람이 무슨 명함”이냐며 무시했다. 정신적 사치였나, 때늦은 반성도 하는 중이다. 도시 탈출을 꾀하지 않았다면 그의 삶은 어땠을까. 남보다 혜택을 많이 누리는 직업이었지만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불편했다는 그는 자연의 의연함을 닮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대단한 것을 만들어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 과정에서 얻을 수 있는 소소한 행복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황은순 차장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