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탈북민의 70%를 차지하는 탈북 여성들은 억척스러운 경향이 있다. 자유와 생존을 위해 사선(死線)을 넘어선 그들은 원하는 것을 위해 적극적으로 나서는 성향이 강하다. 이들의 출신지역을 보면 이런 성향을 미뤄 짐작할 수 있다. 탈북 여성들은 함경북도의 무산, 회령 등 국경 근처의 두메산골 출신이 많다.

탈북민 출신 제1호 인문학 강사인 최금희(41)씨는 그동안 기자가 만난 탈북 여성들과는 달랐다. 최씨는 북한에서 손꼽히는 대도시인 함북 청진시의 지식인 집안에서 태어났다. 1남4녀 중 늦둥이 막내로 태어난 최씨는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했다. 평양의 한 명문대에 입학해 건축학 공부도 했다. 대학진학률이 10%에 불과한 북한에서 평양의 대학에 입학할 수 있는 여성은 흔치 않다. 지난 5월 25일 서울 여의도의 한 커피숍에서 최씨를 만났다.

“석사 학위밖에 없는 제가 ‘인문학’을 가르친다는 것은 너무 거창하죠. 사실 대학원 지도교수님께도 제가 강연을 한다는 말씀은 못 드렸어요.”

2001년 탈북한 최씨는 6년간 중국에 체류하다 2007년 한국에 들어왔다. 이듬해 정착한 대구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지난 4월부터는 대구 중구의 ‘박물관 이야기’라는 카페에서 인문학 강연을 하고 있다. 러시아 문학과 한국의 현 세태를 연결 지어 재미있게 풀이하는 강연이다. 가령 톨스토이의 ‘부활’에 나오는 상류사회와 하류사회를 한국 사회의 ‘갑’과 ‘을’로 연결 지어 설명하는 식이다.

북한과 중국을 거치며 겪은 최씨의 경험도 강연에 감칠맛을 더한다. 매주 화요일마다 진행하는 이 강연의 한 달 수강료는 5만원이다. 많을 때는 수강생 30여명이 한 번에 몰리기도 한다. 최씨는 “‘글뒤주’가 되지 않기 위해 인문학 강연을 시작했다”고 했다. ‘글뒤주’는 글을 많이 읽어 머리에 채워넣기는 하나 실생활에 활용하지 못하는 사람을 조롱하는 북한말이다. 백면서생(白面書生)과 비슷한 말이다.

최씨는 대구에 정착한 뒤 북한에서 끝내지 못한 공부를 다시 시작했다. 어릴 때부터 문학을 좋아해 중문과에 입학했다. 경북대 중어중문학과를 졸업한 후 같은 학교 대학원에서 러시아 문학을 전공했다. 러시아 문학을 더 공부하고 싶어 모스크바 국립인문대학에 유학도 다녀왔다. 학비는 중국어 통·번역 아르바이트와 과외를 해 충당했다. 지금은 탈북 과정에서 만난 중국 남성과 결혼해 함께 대구에서 살고 있다. 최씨의 남편은 대구의 한 공단에서 기술자로 일하고 있다.

최씨는 학자 집안에서 태어났다. 최씨의 아버지는 북한에서 내로라하는 화학공학자였다. 최씨가 14살일 때 세상을 떠났다. 올해 팔순이 되는 그의 어머니는 의사였다. 북한은 배급사회이기 때문에 의사라고 특별히 생활이 여유롭지는 않다. 하지만 환자를 치료하면 농부는 옥수수나 콩을, 어부는 생선 등을 답례로 갖다주기 때문에 일반적인 배급생활자에 비해서는 생활이 윤택한 편이다. 최씨의 친척 중에서도 현재 대학교수 등 학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이 있다.

유복한 어린 시절을 보낸 최씨도 ‘고난의 행군’은 피할 수 없었다. ‘고난의 행군’은 1990년대 중·후반 북한에 닥친 극심한 흉년기에 김정일 정권이 이를 타개하기 위해 내건 구호다. 당시 수많은 사람들이 굶어죽고 수십만 명이 중국 등으로 탈북했다. 최씨 역시 ‘고난의 행군’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학업을 중단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최씨는 “중국에 가면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를 듣고 두만강을 건넜다. 그의 나이 26세 때였다. 최씨는 “금방 돌아올 수 있을 거라 생각해 가족에게 알리지 않았다”고 했다.

지식인 집안에서 자란 최씨에게 지식은 곧 생존을 위한 힘이었다. 원래도 책을 좋아했지만, 최씨가 결정적으로 학업을 이어가야겠다고 생각한 것은 탈북 과정에서 겪은 경험들 때문이다. 최씨는 2007년 몽골 수도 울란바토르를 통해 한국에 들어왔다. 중·몽 국경에 있는 난민수용소에는 다른 탈북 여성들도 함께 수용돼 있었다. 약소국 출신인 데다 불법으로 입국한 여성은 몽골 장교들에게 만만한 존재였다. 일부 장교들은 탈북한 여성들에게 무례하게 대했다. 하지만 누구도 최씨를 함부로 대하지는 못했다. 함께 탈북한 사람들과 러시아어를 할 수 있는 장교 사이에서 유일한 통역사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최씨는 인민학교(현 소학교·초등학교에 해당) 4학년 때부터 7년간 배운 러시아어로 웬만한 대화는 모두 할 수 있었다. 최씨는 장교들에게 생활하면서 어려운 점을 말하고 탈북민 중 환자가 있으면 그들의 상태를 통역해 군의관에게 알렸다. 최씨는 “지식이 힘이란 것을 그때 절실히 느꼈다”고 했다. 최씨는 현재 한국어·영어·중국어·러시아어 등 4개 국어를 구사할 수 있다.

책벌레 최금희

북한에는 의외로 도서관이 많다. 웬만한 구(區)에는 도서관이 하나씩 있다. 장서도 충실하다. 김정일의 지시로 1980년대부터 각 도서관마다 세계문학전집이 보급됐기 때문이다. 특이한 점은 사서가 도서관 이용자에게 독서감상문을 제출하도록 시킨다는 점이다. 최씨는 “감상문이 부실하면 다시 써내도록 시키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어려서부터 소설을 좋아한 최씨는 책에 파묻혀 살았다. 특히 영국이나 미국·러시아 등 서구권 문학을 좋아했다. 책은 주로 지역의 학생도서관에서 빌려 봤다. 한국 책처럼 삽화가 있는 화려한 책은 아니지만, 웬만한 세계 유명 문학작품들은 대부분 번역돼 있다는 것이 최씨의 말이다. 최씨는 책을 빌려오면 밤새도록 읽었다. 이불 속에서도, 화장실에서도 최씨는 책을 읽었다. “공부 안 하고 책만 본다”며 어머니가 책을 뺏어서 숨길 정도였다.

최씨의 독서 습관은 같은 책을 여러 번 읽는 것이다. 지금도 최씨는 자신의 강연을 듣는 시민들에게 같은 책을 최소 2~3번은 읽을 것을 조언한다. 고전은 독자의 마음에 따라 읽을 때마다 새로운 느낌을 주기 때문이라는 것이 최씨의 설명이다. 그는 “강연을 위해 쓰는 고전들을 최소 40~50번 읽었다”고 했다. 최씨 강연에 단골로 등장하는 톨스토이의 ‘부활’이나 ‘안나 카레리나’는 한글 번역본 기준으로 1000쪽을 넘나드는 대작이다.

최씨의 소원은 청진의 고향 집에 두고 온 오빠의 문학작품을 되찾는 것이다. 문필가인 최씨의 오빠는 집에서 혼자 시나 수필을 쓰곤 했다. 조용한 성격의 오빠가 작품을 널리 공개하거나 발표하지는 않았지만, 수준이 상당했다는 것이 최씨의 설명이다. “통일이 된다면 북한의 문학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어요. 문학작품은 시대를 보는 거울이라고들 하잖아요. 북한의 문학작품은 북한 사람들의 생활이 어땠는지를 알 수 있는 귀중한 자료가 될 거예요.”

배용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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