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여행은 소중하고 특별한 기억으로 남는다. 하지만 중학교 교사로서 아이들을 인솔하고 가는 여행은 더 특별하다. 생각해 보라. 천방지축 혈기왕성한 40명의 아이들과 함께하는 2박3일을. 아무리 기억을 뒤져봐도 이보다 더 특별할 순 없다.

내가 10년 전에 근무하던 학교는 남자중학교였다. 1학년 담임을 맡은 어느 해, 나는 학생들을 인솔하여 수련회를 가게 되었다. 중간고사 다음 날로 일정이 잡혀 다들 홀가분하게 여행을 가겠구나 생각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벌어졌다. 수련회 첫날부터 열감기 환자들이 속출한 것이다.

수련원에서 첫날 일정을 마친 뒤 몇몇 남교사는 학생들 취침지도로 복도에서 날밤을 샜고 담임 둘은 수련활동 중 다친 학생과 열이 심하게 나는 학생 서너 명을 데리고 인근 병원 응급실에서 보호자 역할을 해야 했다. 남은 여교사 4명에게는 응급실 갈 정도는 아니지만 열이 나서 힘들어 하는 학생들을 간호하는 임무가 주어졌다. 수련원의 간호담당 교관은 열이 심한 7명의 학생들을 열이 내릴 때까지 계속 닦아주라는 지시를 하고는 퇴근했다.

입술이 마르고 얼굴이 벌건 아이들은 아직도 초등학생처럼 작고 여렸다. 하지만 그래도 남자들이라 속옷 차림으로 여자 선생님들 앞에 누워 있는 것이 민망할까봐 선생님들은 더욱 더 ‘엄마 버전’으로 아이들을 돌봤다. “민수는 배트맨 팬티 입었네, 선생님 아들은 스파이더맨 팬티만 입는데” “장호는 공부하느라 밥도 굶었나 보다. 선생님 아들은 5학년인데 배가 이따만 한데”…. 이런저런 얘기를 하면서 우리 반, 옆 반 가리지 않고 밤새 아이들 몸을 닦아주었다. 아침이 되자 다행히 아이들 열이 내려 무사히 수련회를 마칠 수 있었다.

며칠 뒤 손주를 직접 키우신다는 한 할머니가 학교를 찾아왔다. “아픈 아이를 돌봐줘서 고맙다”며 어려운 형편에 음료수를 사갖고 오셨다. 아이들을 돌봐준 선생님들의 진심이 전달된 걸까. 엄마도 없이 할머니 손에 크는 아이가 새삼 모성애를 느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 해 학생들을 인솔하여 일본 수학여행을 갈 기회가 생겼다. 문화 탐방과 자매결연 학교 방문이 목적이었는데 남학생 40명을 데리고 부산에서 배를 타고 가는 일정이었다. 출발 전 몇 번에 걸친 오리엔테이션으로 교육을 단단히 시켰음에도 남학생 40명과의 여행은 ‘고난의 행군’ 그 자체였다. 아이들이 밤에 갑판에 혼자 올라갔다가 사고라도 당할까봐 방을 돌면서 날밤을 샜다. 아침에 일본에 도착해 먼저 내린 아이들 방을 점검하니 교복을 비롯하여 지갑, 속옷 등 흘려놓고 간 것들이 한 가득이다.

그 이후 일정도 악전고투였다. 어디서 모이자고 하면 꼭 한두 명이 사라지기 일쑤고, 덥다고 차에서 버티는 놈들을 잡아끄느라 실랑이를 벌여야 했다. 호텔에 와서도 만화책 산다, 간식 산다며 밖에 나간 아이들을 찾아다니느라 발품을 팔아야 했다. 마지막 날은 목검이 문제였다. 관광지 입구 기념품점에서 한둘이 목검을 사더니 급기야 40명이 다들 목검을 하나씩 들고 서로 툭툭 치면서 장난을 치기 시작했다. 사고라도 날까 싶어 목검 40개를 걷어서 선생님들이 짊어지고 배를 타야 했다.

그렇게 말썽 피우던 놈들이 가끔 ‘스승의 날’에 나타난다. 어엿한 대학생이 돼 선생님들을 찾아와 옛날 그 여행 얘기로 함께 웃고 떠든다. 결국 ‘쌤’들은 자신이 떠나보낸 아이들의 기억을 먹고 사는 존재들이다.

강재남

서울 중계중학교 교사

강재남 서울 중계중학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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