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2일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현장을 찾은 외국인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2일 강남역 10번 출구 추모현장을 찾은 외국인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고 있다. ⓒphoto 뉴시스

5월 21일 토요일 오후, 서울 강남역 10번 출구. 20대 남성 세 명이 담배를 피우며 출구 앞에 모여 있는 수십 명의 여성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색색의 포스트잇에 글귀를 써넣어 붙이는 사람들이며, 국화꽃을 내려 놓고 기도하는 사람들. 분노를 억누르지 못한 채 일행에게 뭔가를 강하게 주장하는 사람도 있었고, 아무 말 없이 안타까움에 눈물을 닦는 사람도 있었다. 담배에 불을 붙이던 남성이 말했다. “저게 다 무슨 일이래.” “솔직히 저건 심하지 않냐.” 한 남성이 담배꽁초를 던지며 말했다. “저거 다 메갈년들이야.” 여성 온라인 커뮤니티 사이트 ‘메갈리아’를 비하하는 말이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각자 대화를 나누고 있던 20대 여성이 ‘메갈년’이라는 말을 듣고 확 다가왔다. “방금 뭐라고 했어요?” 옆에 있던 여성이 이어 말했다. “메갈년이라고 했어요?” 처음 그 단어를 꺼냈던 남성이 여성들 쪽으로 발길을 옮겼다. 옆에 있던 남성들이 말렸다. “참아, 참아.” 이미 남녀들 사이에서 “뭐라고?” “내가 못할 말 했나?”라는 말이 오가고 있었다. 두 팔이 잡혀 끌려 나가면서도 남성은 계속 말했다. “누릴 거 다 누리고 살면서.” 남성들이 사라질 때까지 두 여성은 한참 그들을 노려봤다.

주말의 강남역은 흥겨움이 감도는 곳이다. 그러나 이날은 달랐다. 비통함과 분노가 이 주변을 가득 채웠다. 지난 5월 17일 새벽 1시 무렵, 20대 여성이 강남역 인근 건물 공용화장실에서 30대 남성이 휘두른 흉기에 수차례 찔려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난 뒤의 일이다. 경찰에 붙잡힌 이 남성은 범행 동기로 “평소 여성에 무시당해 왔다”고 말했다. 곧바로 이 사건은 네티즌들에 의해 여성혐오범죄(femicide)로 간주되었고, 사건이 일어난 근처 강남역 10번 출구에 추모의 행렬이 이어졌다. 포스트잇에 추모의 글을 적어 지하철역 출구에 붙이고, 국화꽃을 놓고, 촛불을 켜는 사람들이 끊임없이 몰려들었다.

“살女주세요. 넌 살아男았잖아.” “당신은 저였을 수 있었습니다.” “이건 여성혐오 살인이다.” 수백 장의 포스트잇이 나붙고 추모 열기가 더해지자 곧 반발이 일었다. “이건 여성혐오 살인이 아니다.” “너희들은 거꾸로 남성혐오를 하고 있다.” “너희는 잘못된 추모를 하고 있다.” 이번 사건 전만 해도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볼 법한 싸움이 오프라인에서 시작됐다.

싸울 준비가 된 사람들

이 싸움은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벌써 길게는 5년, 짧게는 1년이 된 묵은 싸움이다. 드러나지 않았지만 혐오 논란은 특히 젊은 네티즌들을 중심으로 중요한 이슈로 자리 잡아 왔다. 수면 위로 드러난 이 싸움을 제대로 알고 원인과 대안을 찾아보려면 이 싸움의 시작에 대해서 먼저 알아야 한다. 이를 위해서 강남역 추모 현장으로 다시 가 보자.

강남역 10번 출구에서는 실제 몸싸움도 일어났다. 가장 충돌이 심했던 5월 21일 토요일에는 오후 2~3시부터 곳곳에서 다툼이 일어났다. “이건 여성혐오 범죄가 아니다”라고 주장하는 남성 두세 명이 시위를 벌이자 이에 항의하는 여성들이 목소리를 높였다.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진 남성들끼리 말다툼을 하기도 했다. 밤이 되자 카메라를 빼앗고 사진을 지우라고 목소리를 높이다가 “꺼져라” 등 거친 욕설을 주고받기도 했다. 밤이 깊어지자 “자살해”라는 욕설도 들렸다. 누가 누구에게 소리를 지르는지도 알 수 없이 목소리만 높아졌다.

충돌은 갑작스럽게 진행됐다. 서로 말을 주고받다가 점점 목소리가 커지는 그런 종류의 싸움이 아니었다. 사람들은 싸울 준비가 돼 있었다. 부딪히면 곧바로 목소리를 높이는 식이었다. 앞서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10~20m는 떨어져 있던 곳에서 남성 3명과 여성 2명이 충돌할 뻔한 상황도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다. 단순히 의견의 차이로 논쟁을 벌이는 수준이 아니었다. 충돌한 이들은 서로를 진심으로 혐오하고 있었고, 혐오하는 이들로 인해 자신들이 피해를 본다고 ‘분노하고 있었다’.

전조(前兆)가 없이 갑작스럽게 분노할 수 있는 이유는, 강남역 현장에 나온 이들이 오래전부터 여혐과 남혐 이슈에 대해 분노를 쌓아왔기 때문이었다. 시작은 여성혐오가 먼저였다. 몇 년 전부터 남성 중심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는 군대와 결혼 이슈에 대해 “남성이 역차별받고 있다”고 주장하는 일이 계속됐다. 아예 남성연대라는 시민단체를 만들었던 한 남성이 투신 퍼포먼스를 하다 사망하는 일까지 발생했다. 처음에는 이른바 ‘역차별’에 대한 문제 제기만 나왔지만, 곧 일간베스트저장소(일베)를 중심으로 강한 여성 비하적 발언이 쏟아졌다. ‘김치녀’ 같은 단어는 예사고, 여성의 성기에 빗댄 욕설도 거리낌 없이 온라인상에서 내뱉어졌다.

지난해 메르스(중동호흡기증후군) 사태 때 홍콩에서 메르스 증세를 보인 한국 여성 2명이 홍콩 당국의 격리 조치를 거부했다는 뉴스가 나오면서 상황은 더욱 심각해졌다. 온라인 커뮤니티 DC ‘메르스 갤러리’에서 “역시 김치년 종특(종족 특성을 줄인 말로 일반화할 때 쓰는 말)” 같은 비하 발언이 계속되자 이곳을 박차고 나온 여성들이 새로운 공간 ‘메갈리아’를 만들었다. ‘메갈리아’란 메르스 갤러리와 소설 ‘이갈리아의 딸들’을 합친 말이다. 메갈리아의 특성은 ‘미러링’이다.

온라인 커뮤니티에서 미러링(mirror-ing)이란 상대방의 말이나 행동을 마치 거울에 비추듯 대칭시켜 하는 것을 일컫는다. 일베에서 ‘김치년’이라고 욕하면 메갈리아에서는 ‘한남충’(한국 남자에 벌레 충(蟲)을 붙인 말)이라고 되받아치는 형태다. 여성 성기에 빗댄 욕설에는 남성 성기에 빗댄 욕설로 응수한다. 여성혐오 발언이 어디에선가 나오면 곧바로 달려가 “한남충은 답이 없다”고 쏟아낸다. 데이트 강간, 이별 살인 사건이 터지면 ‘씹치남’(욕설과 김치남의 합성어)을 욕하는 글이 올라오고, 군대와 결혼 문제가 얽히면 ‘메퇘지’(메갈리아에 돼지를 합성한 말)를 욕하는 글이 이어진다. 일베 등 여성혐오 사이트가 유행한 지 3~4년, 메갈리아가 탄생한 지 1년. 꽤 오래 묵히고 삭힌 분노인 셈이다.

스시녀·갓양남·씹치남에 메퇘지

여혐이든 남혐이든 혐오하는 이들은 서로를 미러링한다. 왜 여성은 군대를 가지 않느냐는 혹은 군대를 다녀온 남성에게 사회적 보상이 없다는 군대 문제, 결혼할 때 집값을 왜 남자만 부담해야 하느냐는 혹은 출산·육아 및 시댁과 관련된 결혼 문제, 직장 내 차별, 더치페이, 성희롱과 임금 차별, 각종 사건까지 비슷한 방식으로 비슷한 다툼을 해왔다. 실제로 주고 받는 싸움이 아니라 실체가 불분명한 온라인상의 상대와 싸우는 것이다. 처음에야 온라인상의 일부만 참전하는 싸움이었을지 몰라도 이제는 다르다.

이들에게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여성혐오, 남성혐오가 한국 여성과 남성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몇몇 여성혐오 사이트에서는 외국 여성 중 특히 일본 여성, 속칭 ‘스시녀’를 찬양하는 분위기가 상당수 있다. ‘스시녀’란 김치녀와 달리 남성에게 순종적이면서도 데이트 혹은 결혼 부담을 한쪽으로 미루지 않고, 여성이라고 의무를 회피하지 않으면서도 나서지 않는 일본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일본 가정식은 기본이 5첩 이상.” “호텔비도 5 대 5로 낸다.” “회식 안 빠진다, 업무 마인드 굿.” “내가 거지인데도 보듬어준다.” “절대 남친한테 대들지 않는다.”

‘스시녀’에서 보듯이 혐오하는 이들은 대개 상대 집단을 일반화한다. 김치녀라는 용어도 그렇다. ‘모든 한국 여성은 이렇다’라고 몇 가지 속성을 정해두고, 하나의 속성에만 어긋나도 분노를 쏟아낸다. 한 커뮤니티에 올라온 글을 보자. 사귀기 전까지는 소박하고 털털한 줄 알았던 여자친구가 단 한 번도 더치페이를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다. 댓글이 달렸다. “역시 김치… 욕하지 않으려고 해도 할 수 없네.” 결과적으로는 ‘헬조선’ 혹은 ‘탈(脫)조선’ 담론과도 이어진다.

여기에서 중요한 점은 대개 여성혐오·남성혐오 이슈는 각 입장의 피해가 더 크다는 것을 강조한다는 데 있다. 예를 들어 한 남성이 ‘남성이 더 많이 피해 보고 있다’는 문장에 공감하면서, ‘여성들이 자신들의 권리만 주장해서’ ‘여성들에게 유리한 제도만 만들어서’라는 등의 이유를 찾게 된다면 여성혐오에 빠질 가능성이 높다. 다시 말하자면, 혐오 이슈는 피해 증거를 끊임없이 발굴하면서 강화된다. “남성이 건강보험료를 더 많이 낸다” “남성에게는 없는데 여성들은 여성전용주차장을 가지고 있다” “여성 비키니는 선정적인데, 남성 수영복은 선정적이지 않다” 등 한번 혐오가 시작되면, 결코 줄어들지 않는다. 피해 사실을 기반으로 한 혐오는 분노만 키울 뿐 해결책을 가져다 주지 못한다.

처음에는 이런 이슈가 한두 군데 온라인 커뮤니티에서만 언급됐다. 그러나 최근에는 커뮤니티의 속성과 규모를 가리지 않고 언급되는 것이 특징이다. 심지어 소속감이 뚜렷한 폐쇄적 커뮤니티에서도 혐오 이슈는 자주 언급된다. 서울대학교 온라인 커뮤니티 ‘스누라이프’에 올라온 글을 보자. 5월 22일에 게시돼 일정 이상의 추천 수를 받아 ‘베스트 게시물’로 등록된 게시물 수는 126개. 이 중 90개의 글이 이번 사건과 여혐·남혐에 대한 비난과 비판의 글이다. 개중에는 논리적으로 이번 사건과 혐오 현상을 분석하려는 글도 있지만 “민족성이 더럽다”거나 “페미나치(페미니스트+나치)나 살인자나 근본은 같다”는 식으로 수위 높은 비난을 하는 글도 많다.

비단 서울대만이 아니다. 아예 한 고려대생은 외부 커뮤니티에 고려대 온라인 커뮤니티인 ‘고파스’의 여성혐오 글들을 고발한다며 게시물들을 모아 올리기도 했다. 요즘 페이스북에는 재학생이 익명으로 글을 올릴 수 있는 ‘대나무숲’ 페이지가 각 대학별로 개설돼 있는데, 이곳에서도 꾸준히 등장하는 주제가 혐오 관련 주제다.

이제 더 이상 “온라인에서만 싸우지 현실에서는 다들 잘 지내”라는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다. 20~30대 남성 중에서는 소개팅을 할 때부터 더치페이를 하지 않는 여성을 다시 만나지 않는 사람도 생겨났다. 여성들 역시 일베나 이런 유의 여성혐오 사이트를 하는 남성을 걸러내는 방법을 서로 공유하기도 한다. 한국여성정책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남성 1200명과 여성 300명 중 김치녀 등 “여성혐오 표현을 알고 있다”는 응답자는 95%에 달했다. 이런 여성 비하 표현에 “공감한다”고 말한 남성 응답자는 54.2%로 절반이 넘었다. 이들 중 “여성혐오 게시글이나 댓글을 달아봤다”고 답한 응답자도 21.3%나 됐다. 온라인에서 시작한 혐오 이슈가 이제는 현실의 가치관에도 영향을 끼치고 있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보면 이번 살인사건이 혐오범죄인지 아닌지 판가름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한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공용 화장실에 대한 안전대책 또한 마찬가지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 이면에 숨겨진 혐오 이슈의 원인을 바로 분석해야 해결책을 찾을 수 있다고 지적한다.

김효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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