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23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여성혐오범죄라고 주장하며 퍼포먼스를 펼쳤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3일 서울 서초경찰서 앞에서 여성들이 시위를 벌이고 있다. 이들은 ‘강남역 살인사건’이 묻지마 범죄가 아니라 여성혐오범죄라고 주장하며 퍼포먼스를 펼쳤다. ⓒphoto 뉴시스

“이 사건은 ‘여성혐오 범죄인가 아닌가’의 이분법적 사고로 보면 안 된다. 이 둘은 분리된 게 아니다. 정신병자의 망상이 초래한 범죄인 동시에 여성혐오에 기반한 묻지마 범죄이기도 하다. 정신병자의 망상이 어떻게 형성되는지를 따져봐야 한다. 혐오는 의지적 요소와 비의지적 요소가 동시에 작용하기 때문이다.”

지난 5월 18일에 발생한 서울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에 대한 이나영 중앙대 사회학과 교수의 말이다. 이 사건이 촉발한 성별 간 전쟁 양상이 예사롭지 않다. 여혐론자 대 남혐론자 간 언어폭력에 그치는 수준이 아니다. 일부 온라인 사이트에서만, 그것도 일부 과격분자 사이에서만 와글와글했던 여혐논쟁이 수면 위로 급부상했다. 하나의 사회현상으로 자리 잡는 양상이다. 온라인을 넘어 오프라인으로 뛰쳐나왔고, 일부 과격분자들의 이슈에서 일반 대중의 이슈로 표면화되고 있다.

개인의 문제로 치부해선 안 돼

여혐 관련 글은 구글에서만 5월 26일 현재 93만4000개. 불과 12시간 사이 3000개의 글이 늘었다. 기사도 많지만 블로그나 카페, 댓글을 통해 주고받은 논쟁이 상당수다. 새롭거나 논쟁다운 논쟁은 드물다. 결론 없는 소모적 싸움이 대부분이다. 감정적이고 격하다. 작정하고 전쟁터에 나온 사람들 같다. 하나같이 분노로 가득하다. 흥미로운 것은 그들 대부분이 왜,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는지 모른다는 것이다. 그저 잔뜩 화가 나 있고, 그 화와 분노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그들은 왜, 무엇 때문에 분노하고 있나. 그 분노의 뿌리는 무엇일까. 분노의 뿌리를 뽑을 수는 없는 것일까. 강남역 사건의 여혐논쟁에서 촉발된 여혐론자 대 남혐론자의 전쟁에서 감정을 걷어내고 현상 자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전문가들은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을 한 개인의 문제로 치부하면 안 된다고 입을 모았다. 그저 조현증 환자가 저지른 범죄로 몰아가면 제2, 제3의 유사범죄가 끝없이 나타날 수 있다고 경고한다. 이나영 교수는 이번 범죄를 ‘절망범죄’로 규정했다. “절망범죄는 사회구조적 차별 때문에 쌓인 분노를 사회적 약자에게 표출하는 방식이다. 여기에서 희생자는 여성이나 노인, 어린이 등이다. 그저 여성이라서, 노인이라서, 어린이라서 위험한 환경에 노출될 수밖에 없다는 얘기다. 이번 사건을 개인의 문제로만 환원시키는 것은 위험하다. 병을 안고 있는 환자만 제거하면 평화롭고 평등한 사회가 되나. 아니다. 이 문제를 더 공론화해야 한다. 단순한 봉합으로는 안 된다.”

‘절망범죄’의 근본 원인은 사회구조적 문제에 있고, 그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노력 없이는 유사범죄가 끊임없이 양산될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승자독식의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사회구조적 벽에 가로막혀 절망하고 좌절하며 분노하는데, 최근의 절망범죄에는 그런 사람들의 분노가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정신분석학자들의 의견도 비슷하다. 이나미 서울대 의대 겸임교수(이나미 심리분석연구원장)는 “조현증 환자의 망상은 시대의 영향을 받게 마련”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간첩이 많이 출몰하던 시절에는 ‘간첩이 나를 따라온다, 중앙정보부가 나를 감시한다’는 조현증 환자가 많았다. ‘여성이 나를 무시하는 것 같았다’는 망상도 마찬가지다. 여성혐오라는 시대적 이슈가 반영돼 있다. 조현증 환자가 어떤 환경에 있었는지, 왜 분노를 키웠는지 사회구조적 맥락에서 살펴봐야 한다.”

서천석 서울신경정신과 원장의 관점도 유사하다. 경찰이 이 사건의 원인을 여성혐오가 아니라 정신질환(조현병)으로 결론 지은 발표에 대해 서 원장은 자신의 페이스북에 이를 반박하는 장문의 글을 올렸다. 서 교수는 이 범죄를 ‘분명한 여성혐오범죄’로 규정하면서 “정신병을 가진 사람임은 분명하지만 정신병의 증상은 사회적 맥락에 있다”는 논지를 폈다. 그러면서 그는 “여성혐오 의식의 확산으로 범죄의 가해자들이 스스로를 정당하다고 여기니 범죄의 잔인성은 증가하며 모방범죄도 늘어난다”면서 “여성혐오 의식이 정신병의 증상으로까지 발전하고 있다면 그 심각성을 인정하고, 사회 전반에서 이런 의식이 자리 잡지 못하도록 구조적 개혁을 하고 의식의 변화를 추구해야지 지금 뭐를 하고 있나”라고 꼬집었다.

지난 5월 2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붙어 있다. ⓒphoto 뉴시스
지난 5월 24일 오전 서울 중구 시청 지하 1층 시민청에 강남역 살인사건 피해자 여성을 추모하는 글들이 붙어 있다. ⓒphoto 뉴시스

한국의 여성혐오는 다르다

그렇다면 왜 여성혐오가 사회적 이슈로 부상했을까. 여성혐오는 한국에서는 불과 3~4년 전에 본격적으로 등장했지만, 사실 새로운 개념이 아니다. 여성혐오는 역사적으로도 오래된 이슈이고, 일본이나 서구권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나는 현상이다. 하지만 최근 한국에서 나타나는 여성혐오의 양상은 좀 더 복잡하다. 혐오의 대상으로서의 여성은 ‘약자로서의 여성’이기도 하지만 ‘경쟁상대로서의 여성’이기도 하다. ‘군대도 안 가면서 줄어드는 일자리를 빼앗아가는 존재’로 비쳐지는 것이다.

여기에는 대한민국의 압축성장이 낳은 시대적 맥락이 숨어 있다. 젊은 남성들에게 최근 젊은 여성의 캐릭터는 불편하고 낯설다. 여성이 본격적으로 사회에 진출한 시기는 20~30년 전부터다. 젊은 남성이 성장과정에서 목격한 성인 여성은 가부장제의 여성이 많았다. 남성에 종속돼 있고, 남성의 특권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존재로서의 엄마 같은 여성. 그런 여성은 아버지가 누리는 가부장제 질서를 당연시했다. 하지만 최근 젊은 여성은 다르다. 취업시험에서 남성 못지않은 성적을 거두고 엄마 세대가 여성으로서 겪어야 했던 부당한 차별에 당당하게 문제제기를 한다.

이나미 교수는 이런 맥락이 성 대결을 낳은 원인 중 하나로 본다. 그는 현재를 ‘사랑 부족의 시대’로 규정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남자와 여자가 만나서 사랑을 해야 하는 시기에 경쟁만 시키니까 서로를 경쟁상대로 보게 된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자신이 피해자라고 생각한다. 가진 것은 생각하지 않고, 안 가진 것만 부각하면서 ‘내가 갖지 않은 것을 저 사람이 가졌다’는 피해의식을 갖는 것이다. 젊은 남성은 아버지 세대와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젊은 여성은 서구사회의 여성과 비교해서 상대적 박탈감을 겪는다.”

‘노오력’으로 안 되는 노답사회

여혐의 본질은 분노사회다. 쌓이고 쌓인 우리 사회의 구조적 문제가 곪아서 터진 것이다. 저성장 시대에는 과거 아버지 세대가 누렸던 기회가 확연히 줄어든다.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상황 앞에서 청년 세대는 깊은 좌절을 겪는다. ‘여성혐오’로 대표되는 청년 세대의 ‘혐오’ 내지 ‘증오’는 청년실업률의 급증과 맥을 같이한다. ‘헬조선’ ‘노답사회’ ‘혐오’ ‘충(蟲)’이 유행어가 된 시기와도 맞물린다. 최근 온라인상에서는 ‘헬조선’보다 더 흔하게 회자되는 말이 있다. 바로 ‘노오력’이다. 젊은층이 만든 이 신조어는 아무리 노력해도 답이 없는 상태인데, 그것을 계속 개인의 자질과 태도로 몰아가는 기성세대의 사고방식을 비꼬는 말이다.

취업대란, 청년명퇴, 저출산과 고령화, 치솟는 주거비와 자살률, 부의 양극화, 취약한 사회안전망…. 최근 젊은층이 맞닥뜨린 이 사회의 맨얼굴이다. 소위 ‘노오력’으로 안 되는 것 투성이 사회에서 그들은 좌절과 분노를 겪는다. 이런 상황에서 자신의 스트레스를 풀 수 있는 가장 손쉬운 방법은 희생양을 찾아 그들에게 책임을 덮어씌우고 혐오하는 것이다. 누군가를 혐오하고 ‘벌레(충)’로 규정해 비난하고 미워하는 것은 쌓인 분노를 표출하는 한 방식이다.

결국 여성혐오와 남성혐오라는 이름으로 격렬하게 싸우는 이들은 둘 다 피해자다. 서로가 서로를 적(敵)이자 가해자로 몰아세우지만 진짜 적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이나영 교수는 “시장경제의 실패에서 연유한 국가 경제의 실패가 이런 다층적인 실패를 몰고 왔다”면서 남성과 여성은 서로에게 으르렁거리기 이전에 누구에 대한 어떤 혐오인지를 냉철하게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고 지적한다. “여성의 가해자는 남성중심적인 조직과 남성을 잠재적 가해자로 만들어내는 사회구조이며, 남성의 가해자는 불평등하고 차별적인 경제구조에서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라는 것이 이 교수의 말이다.

시민사회의 징후

그러나 분노사회에서 촉발된 ‘거리의 외침’을 긍정적 징후로 보는 시각도 있다. 성숙한 시민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통과제의 중 하나라는 것이다. 이나영 교수는 강남역 10번 출구로 뛰쳐나온 여성들에 대해 “평범한 여성들이 주도한 시민운동의 하나로 봐야 한다”며 이렇게 말했다. “이 외침은 차별적 구조를 바꾸라는 외침이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숱한 성차별에 맞서는 외침이다. 오히려 늦은 감이 있다. 이 이슈는 더 논쟁적이고 더 폭발적으로 드러나야 한다.”

그러고 보니 절망범죄를 보는 시각이 조금씩 바뀌고 있다. 과거 연쇄살인범들이 여성들을 골라 죽였을 때, 대다수는 그 원인을 그의 가정환경 탓으로 돌렸고, 그런 시각을 의심 없이 받아들였다. 뉴스에서 쏟아지는 숱한 데이트폭력과 가정폭력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 원인을 사회구조적 문제로 보는 시각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달라지고 있다. 과거 특정 계층이 점하던 이슈를 다수의 시민들이 들고나온 것이다.

이 혐오전쟁은 젊은층의 성별 간 싸움이 아니다. 과거부터 존재해온 관습적 차별에 대해 던지는 본질적인 질문이자, 승자독식의 사회에 던지는 구조요청이다. 청년들이 집단 반응을 시작한 것이다. 그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기성세대는 이들의 움직임을 단순히 ‘노오력’이 부족한 세대의 투정으로 치부해버리면 안 된다. 관행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된 구조적 모순을 하나하나 뜯어볼 때다.

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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