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사회’라는 책을 세상에 내놓은 지 2년 정도가 지났다. 당시만 하더라도 ‘분노사회’라는 규정에 주목하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대부분 생경하고 낯설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지금은 달라졌다. 우리 사회를 분노, 원한, 증오로 규정하는 일은 아주 당연하고 보편적인 것이 되었다. 우리 안에 축적된 분노는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고, 첨예한 갈등 구조를 만들고 있다. 특히 ‘증오’나 ‘혐오’라고 부를 수 있는 현상이 젊은층을 중심으로 가속화되면서 세상을 뒤흔들고 있다.

최근 서울 강남역에서 발생한 묻지마 살인사건은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던 여성혐오 문제를 본격화하고 있다. 하지만 ‘이 사건이 정말 여성혐오 범죄인가, 아닌가’ 하는 문제는 그리 중요한 것이 아니다. 핵심은 여성혐오로 인해 축적되어온 여성들의 분노이며, 이번 사건은 그러한 분노가 표출되는 데 도화선 역할을 했을 따름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은 살인을 저지른 범죄자의 심리가 무엇인가가 아니다. 여성 차별적인 구조, 즉 가부장적 구조 내에서 차별당해온 여성들의 분노와 그 분노가 표출되는 양상 자체다.

이번 사건에서 가장 분노를 느끼며 거리로 나서고 있는 주체는 젊은 여성이다. 그들은 가정에서 부모 세대의 성차별을 목격해왔고, 같은 세대의 남성들로부터는 흔히 ‘된장녀’로 요약되는 여성혐오를 당해왔다. 뿐만 아니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SNS 등을 통해 이어지는 수많은 여성의 고백과 증언에 따르자면 거리에서, 학교에서, 직장에서의 성희롱과 성폭행은 실제로 일상화된 위험이었다. 서울 번화가의 한복판에서 벌어진 이번 참사 앞에서, 수많은 여성이 과거와 현재의 기억을 되새기며 공포와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이번 사건을 단순히 가해자인 남자와 피해자인 여자의 구도 안에 가두는 것은 곤란하다. 더 깊이 각인돼 있는 현실을 간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방점은 ‘남자에게 살해당하는 여자’가 아니라 ‘여성혐오를 공유하는 사회 전반’에 찍혀야 한다. 우리 사회는 길거리에서 남자가 여자를 살해하는 사회이기 이전에, 여성혐오가 일상과 미디어 등을 통해 광범위하게 공유되는 사회이다. 다시 말해, 이번 논란의 핵심은 길거리에서 강력범죄 문제가 개선되어야 한다는 당연한 사실이 아니라, 분노를 양산하고 있는 ‘한국의 가부장적 사회구조’가 되어야 한다. 이 구조는 최근 젊은 남성과 여성들에게 매우 복합적으로 작동하면서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혐오하고 증오하게 만드는 ‘폭력의 그물망’을 형성하고 있다.

여혐은 총체적 문제의 징후

N포세대로 묘사되는 젊은층의 절망적인 경제 현실은 분노사회의 한 원인이다. 청년세대 상당수가 결혼과 출산을 미루거나 포기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려 있다. 상위 계층이 아니면 감당할 수 없는 가정생활의 총체, 즉 브랜드 아파트와 자동차, 자식의 사교육, 빈번해진 외식과 여행 등의 신기루 앞에서 젊은층은 기성세대를 증오하며 그 다음에는 서로를 증오한다. 삶에서 마땅히 누려야 할 사랑을 포기하게 되면서, 사랑의 자리에 증오를 새겨넣는 것이다.

암울한 경제적 현실에 더해, 가부장적 사회에서 요구되는 ‘남성과 여성의 전통적 역할’이라는 관념은 더 큰 좌절과 갈등을 만들어낸다. 남성은 여전히 가정의 경제 전반을 책임져야 할 강박을 느낀다. 현실은 변했는데 ‘경제력 있는 남자’는 여전히 우월하고 지향해야 할 남성상으로 자리 잡고 있다. 여성이 느끼는 좌절감도 만만치 않다. 여성은 여전히 특정 나이대가 지나면 서둘러 시집 가서 아이를 낳아야 할 생물학적 존재로 여겨진다. 게다가 출산휴가나 육아정책의 미흡으로 결혼 이후 가정으로 회귀해야 하는 현실에 내몰리고 있다.

또한 가부장적 사회의 집단적 위계문화, 흔히 ‘군대문화’라고 지칭되는 수직적 집단문화는 젊은층에 대한 이중적 억압으로 작용한다. 선배나 상사 등 ‘윗사람’은 사회에서의 권력과 자본을 통해 ‘갑질’의 일환으로 아랫사람에게 폭력을 행사하며, 아랫사람이 이성이라면 성폭력이나 성희롱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이 폭력이든 성폭력이든, 결국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주로 기성세대가 젊은 세대에게 저지르는 폭력이라는 점에서는 다르지 않다. 젊은 남성과 여성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구조의 희생자가 된다.

이처럼 여혐 문제, 정확히 말해 ‘젊은 여성 혐오’ 논란은 대한민국 사회의 총체적 문제를 드러내는 징후다. 이 문제가 더욱 비극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증오의 주체이자 혐오의 대상이 남성과 여성이라는 이름으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집단 갈등 중에서 남성과 여성은 삶 속에서 가장 덜 분리되어 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기독교와 이슬람교, 보수와 진보, 백인과 흑인 등의 갈등에 비해 남성과 여성은 훨씬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로 삶 속에 밀착되어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남성과 여성은 한 가정을 이루며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에 속해 있다. 특히 젊은 남성과 여성의 대립은 그러한 운명을 ‘앞두고’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더 안타깝고 비극적이다.

증오의 낭떠러지에서…

폭력적 가부장 질서에서는 남성과 여성이 모두 폭력에 노출되어 있다. 억압적인 위계질서, 집단주의 문화는 가정에서부터 회사, 학교 등에 이르기까지 폭넓게 퍼져 있다. 이는 가부장제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는 이들이 ‘생물학적 남자’라서보다는 ‘가부장적인 남성’이라서 그런 것이다. 여기에는 가부장적 위계질서와 집단문화를 재생산하는 ‘생물학적 여자’도 포함된다. 남자와 여자의 성역할에 대한 차별적 관념에서부터, 모든 종류의 약자를 나와 동등한 인간으로 취급하지 않는 현상, 나아가 섹시 아이돌로 상징되는 상품화된 성 문화 속에서 우리 모두는 자유롭지 못한 ‘가부장적 남성’으로 존재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 모두의 내부에 존재하는 ‘심층적인 남성’, 즉 가부장제의 흔적을 인식하고 마주하지 못하는 한, 분노는 외적이고 집단적인 구분에 갇히게 된다. 우리 집단과 상대 집단을 나누어, 상대 집단을 일방적 가해자로 지목하고 모든 병폐의 원인으로 낙인찍는 ‘집단 증오의 방식’만이 범람하게 되는 것이다. 인류 역사는 이러한 상호간의 집단 증오가 언제나 가장 참혹한 결과를 불러온다는 것을 증명하고 있다. 우리 사회 역시 예외일 수 없다.

현재 우리 사회의 분노는 엉뚱한 방향을 향하고 있다. 가부장적 구조에서 함께 희생되고 있는 옆 사람을 향해 수평적으로 해소되는 양상이다. 그러나 분노는 우리를 위에서부터 억누르고 있는 구조와 문화, 사회 자체를 향해야 한다. 남성과 여성의 문제에서도 마찬가지다. 우리 모두가 구조의 희생자라는 자각이 필요하다. 특히 여성의 경우 상대적 약자로서 더 중층적인 폭력에 노출돼 있다는 사실까지도 잊어선 안 된다.

남성과 여성은 실로 가장 친밀한 위치에서, 서로의 삶을 형성하고 함께 살아가야 할 운명을 공유하고 있다. 나아가 잘못된 구조와 사회에 저항할 수 있는 최선의 우군이기도 하다. 이미 우리 모두는 서로 더 몰아세우지 않아도 충분히 몰아세워져 있다. 증오의 낭떠러지만 남아 있는 이 자리에서, 우리는 함께 손을 잡고 빠져 나와야 한다.

정지우 인문학칼럼니스트·’분노사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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