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이 못 쳐들어오는 이유는 남한의 중2가 무서워서다’라는 우스갯소리가 있을 정도로 중학교는 예측불허의 시기라고 한다. 어느 날 갑자기 어떤 엉뚱한 일을 저지를지 어디로 튈지 전혀 알 수가 없다는 것이다. 학생의 문제로 학교에 방문한 부모들의 반응은 엇비슷하다. “우리 아이가 전에는 안 그랬는데 갑자기 이상하게 변했어요.” 자녀의 문제를 부모의 무관심이나 잘못된 양육방식이 아니라 성장과정에서 오는 문제로만 돌리려는 부모의 변명 아닌 변명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나는 ‘곡돌사신(曲突徙薪)’ 이야기를 해준다.

곡돌사신은 ‘굴뚝을 구부리고 굴뚝 가까이에 있는 땔나무를 다른 곳으로 옮긴다’는 뜻으로, 화근을 미리 치움으로써 재앙을 미연에 방지한다는 의미를 내포한다. 한나라 유향(劉向)이 편찬한 ‘설원(說苑)’에 실린 이야기는 이렇다. 길 가던 나그네가 어떤 집에 들러 하룻밤 머무르게 되었다. 나그네는 그 집의 굴뚝이 너무 곧게 세워져 있고, 이따금 불길이 새어 나오고 있는 데다가 굴뚝 옆에 땔나무가 잔뜩 쌓여 있는 걸 발견했다. 나그네는 주인에게 “얼른 굴뚝을 구부리고 땔나무도 멀리 옮겨 놓지 않으면 불이 날지도 모른다”고 충고했지만 주인은 나그네의 말을 귀담아듣지 않았다. 며칠 뒤 바람이 심하게 부는 날 나그네의 말대로 그 집에 불이 났다. 다행히 동네 사람들이 달려와서 도와준 덕에 주인도 목숨을 구하고 큰 피해 없이 불을 끌 수 있었다. 주인은 이웃 사람들의 노고에 대한 보답으로 잔치를 베풀었다. 그러나 굴뚝을 고치고 땔나무를 치우라고 말해준 나그네의 공로를 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주인도 나그네의 고마움을 몰랐다.

이 이야기에 대해 생각해 보자. 왜 그 집을 매일 볼 수 있는 주인과 동네 사람들은 화재의 위험성을 몰랐을까. 지나던 나그네의 눈에는 한눈에 보이는데 말이다. 주의를 듣고도 위험을 알아채지 못한 주인과 동네 사람들은 안목이 낮고 위험에 대해 둔감한 사람들이었을까. 늘 그렇게 지내왔기에 익숙해져서 무관심하고 소홀해진 것은 아닐까.

학생들 역시 마찬가지다. 별다른 변화가 없어 보여도 문제의 조짐이나 성장을 향한 의욕이 일상에서 슬쩍슬쩍 엿보인다. 항상 주의 깊게 학생들의 행동을 관찰하고 자녀와 대화하다 보면 이런 조짐을 발견할 수 있다. 부모님이 보는 자녀가 전부가 아니다. 선생님이 보는 학생, 친구들이 보는 친구로서의 모습은 또 다를 수 있다. 이 모습들을 다 알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기에 부모가 대화를 통해 자녀의 변화를 읽어내야 하는 것이다.

학생들이 원하는 것은 일방적인 설교가 아니다. 대화를 통해 소통하고 자신의 마음을 이해해주는 것이다. 아이들과의 대화 속에는 대수롭지 않아서 ‘쓸데없는 걱정’이라고 흘려버릴 수도 있는 이야기 속에 변화의 단초들이 꽤 있다. 그런 단초들을 읽어낸다면 나중에 놀라고 후회하는 일이 없을 것이다. 분명 ‘중2병’이니, ‘요즘 아이들 이해할 수가 없다’는 말은 안 하게 될 것이다. 다시 말해 자녀들과 나누는 진심 어린 대화가 미리 굴뚝을 고치고 땔나무를 옮겨 화재를 예방하는 길이다.

오봉학

서울 동성중학교 상담교사

오봉학 서울 동성중학교 상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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