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광수 교수. 지난해 2월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photo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기자
마광수 교수. 지난해 2월 서울 이촌동 자택에서 촬영한 사진이다. ⓒphoto 조준우 월간조선 객원기자

26년 전 서울 신촌에 한 남자가 살았다. 낮에는 인기 교수로 강단에 섰지만 밤이 되면 독신의 외로움을 견뎌야 하는 신세였다. 남자는 어휘력을 총동원해 자신이 원하는 여인의 형상을 만들었다. 긴 손톱엔 새빨간 매니큐어를 바르고 미니스커트 아래로 뾰족한 하이힐을 신은 여대생이 펜 끝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이름은 ‘사라’. 사랑의 신 에로스가 사라의 손에 입을 맞추자 그녀의 화장은 더 짙어졌고 주렁주렁 걸친 팔찌는 더 큰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갑자기 사라를 주목하게 된 사람들은 그녀와 남자를 데려가 각각 교도소에 가뒀다.

이야기의 남자 주인공은 마광수(65) 연세대 국문학과 교수. 마 교수는 오는 8월 대학 강단을 떠난다. 정년퇴직이다. 스물아홉이라는 팔팔한 나이에 단 교수 직함이었다. 1992년 ‘즐거운 사라’ 사건으로 구속되고, 해직과 복직, 휴직을 반복하며 교수 자리를 잃을 뻔한 적도 여러 번이다. 마 교수 스스로 “정년퇴직하는 게 기적”이라 평가할 정도다. 명예교수직도 받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연세대 측은 “징계를 받은 적이 있는 교원은 명예교수가 되기 힘들다”고 설명했다.

마 교수는 대면 인터뷰를 고사했다. 수화기 너머로 어찌할 수 없는 짙은 우울감이 전해왔다. 줄담배를 태우며 연기를 응시하고 있을 그의 모습이 눈에 선했다. 지난해 봄 이촌동 자택에서 인터뷰를 할 때나, 이후 전화로 안부를 나눌 때도 이 정도로 쇠약한 목소리는 아니었다. 특유의 ‘쿨한’ 자조(自嘲)나 정중한 말투는 여전했지만….

당시 사건의 일지를 요약하면 이렇다. 1992년 10월 29일 마 교수는 검찰 수사관에게 연행됐다. 강의 중인 교수를 검찰이 직접 긴급체포한 초유의 사태였다. 혐의는 ‘음란물 제조’. 긴급체포가 무색하게도 ‘즐거운 사라’(이하 ‘사라’)는 1990년에 월간지 ‘여성자신’에 매달 실린 연재소설이었다. 두 달 뒤인 12월 28일 열린 1심 재판에서 징역 8개월에 집행유예 2년이 선고됐다.

1993년 열린 항소심은 한 편의 촌극(寸劇)과 같았다. 검찰이 내세운 감정인 민용태 고려대 교수와 변호인 측 감정인 소설가 하일지씨는 “‘즐거운 사라’는 음란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당시 수사 검사였던 김진태 검사(검찰총장 역임)와 민 교수 사이의 법정 공방은 지금 읽어도 흥미진진하다. 민 교수는 ‘시학’(아리스토텔레스), ‘이방인’(카뮈), ‘춘향전’ 등 다양한 텍스트를 인용하며 ‘사라’를 변호했다. 문학작품을 잘 모르는 일반인이 이해할 수 있도록 풀어서 설명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이런 문장이다. “문학이 꿈의 산물이라고 한다면 문학세계에서 일어나는 허구적 사실에 직접 법을 적용한다는 것은 월권이다. 가령 내 아내가 나와 성행위를 한 뒤에 자면서 꿈속에서 다른 남자와 성행위를 한다 해도 그걸 간음죄로 고발할 수 없다.”

재판부와 검찰은 2차 감정인을 법정에 세웠다. 안경환 서울대 교수와 이태동 서강대 교수다. 이들은 입을 모아 “‘사라’는 문학작품이 아닌 음란물”이라고 주장했다. 특히 이태동 교수는 “어떤 비정상적인 청소년이 이 책을 읽고 (사라의) 성행위를 반복적으로 실천한다면 범죄행위를 할 수 있는 가능성도 없지 않다”고 말하기도 했다. 재판부는 이들의 증언을 받아들였다. 항소심은 기각됐다. 안경환 교수는 훗날 노무현 정권에서 국가인권위원회 위원장을 역임했다.

마 교수와 그의 변호를 맡았던 한승헌 변호사는 항고를 했다. 1995년 대법원은 최종적으로 항고를 기각하고 원심을 확정했다. 21년이 흐르고 사라를 둘러싼 풍경이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했다. 그때 그 시절 사라의 주변을 서성대던 남자들은 지금도 그녀를 기억하고 있을까.

심재륜 “여전히 사라는 유죄라 생각”

사라를 떠올리며 가장 먼저 생각난 사람은 심재륜 전 고검장이었다. 심재륜이 누구인가. ‘소통령’ 김현철씨를 구속하고, 10대 조폭과 전쟁을 벌이고, 부동산 투기범을 소탕하는 등 특별수사부에서 ‘거악 전문’으로 검사 생활 대부분을 보낸 인물이다. 그런 그의 수사일지에 마광수라는 이름이 있다. 2012년 월간조선에 연재한 ‘국민검사 심재륜의 수사일지’에서 심 전 고검장은 ‘자신이 직접 마 교수를 수사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썼다. ‘이건 해도 너무하다는 생각과 내가 너무 보수적인 것 아닌가? 하는 생각이 줄곧 부딪쳤다. 이런 것까지도 과연 우리 사회가 예술 혹은 문학이란 이름으로 끌어안아야 하는지, 다른 이들의 의견이 듣고 싶었다. 아니, 정직하게 말해서 책의 퇴폐성과 외설성에 공식적으로 법의 잣대를 들이대고 싶었다. 그 책과 저자를 사건의 대상으로 삼아 정식으로 수사하고 싶었다.’

심 전 고검장은 김진태 당시 특수2부장에게 수사 지휘를 맡겼다. 심 전 고검장은 지금도 마 교수와 사라를 음란하다고 생각할까. 전화를 걸어 직접 물었다. 수화기 너머 심 전 고검장의 목소리는 단호했다.

“마광수 선생은 할 말 없을 겁니다. 소설을 처음부터 읽어봤습니까? 그 소설이 도덕적으로도 나쁜 게 교수와 불륜을 벌이는 건 물론이고 엄한 아버지를 성적 대상으로 보고 있어요. 김진태 검사도 처음엔 ‘자기는 문학도로서 수사할 수 없다’고 했어요. 책을 한번 읽어보더니 ‘맡겠다’고 했어요. 심지어 발행인까지 구속했잖아요.”

심 변호사는 수사의 배경으로 ‘시대 상황’을 언급했다.

“당시 ‘영점하의 새끼들’(박승훈)이나 ‘가장 장미여관으로’(마광수) 같은 퇴폐소설이 많이 나왔어요. 점점 점입가경이었어요. 즐거운 사라 사건이 경고가 된 겁니다.”

민용태 “사라는 反가부장적 질서 상징”

교수로서는 거의 유일하게 법정에서 사라를 변호했던 민용태 교수의 의견은 어떨까. 정년퇴임 후 시인으로 활동 중인 민용태 교수에게 전화를 걸었다. 사라를 기억하는지 물었다. “마 교수야 당연히 그렇겠지만, 저에게도 그 시절은 떠올리기 괴로운 기억으로 남아있습니다. 법정에서 증언한 후 학교에 시말서도 여러 번 냈어요. ‘고연전’을 거기에 붙일 줄 누가 알았습니까. 음란한 작품 쓰지 말라는 경고도 받았어요. 제가 쓴 것도 아닌데 말이에요.”

‘사라를 옹호하는 마음은 지금도 변함없다’고 민 교수는 말했다. “한국 사회는 극단적으로 위선적인 사회입니다. 예술도 격식과 허위에 찌들어 있었어요. 마 교수는 위선을 파괴하려 나름대로는 의도적으로 음란했던 겁니다. 지금도 생각납니다. 법정에서 검사가 ‘심각하게 음란한 부분’을 발췌해 줄줄 읊으면서 이래도 음란이 아니냐고 했어요. 제가 그랬어요. ‘최현배 선생이 쓴 국어사전에 ‘씹구멍’이라는 단어가 나온다. 그러면 그 사전은 음란물인가.”

민 교수는 사라를 ‘가부장적 질서’에 저항하는 상징으로 볼 수 있다고 했다. “심청의 아버지는 딸을 팔아 뺑덕어멈과 놀아납니다. 이 나라는 가부장적 질서에 희생되는 심청을 기립니다. 소설 첫부분에서 사라는 아버지에 대한 증오와 반항을 말해요. 반가부장적 질서를 의미한다고 봅니다. 마지막 부분을 보면 사라가 아무 남자의 이름도 기억하지 못한다고 쓰여 있어요. 마음의 평온을 찾았다고도요. 사라의 성적 행위가 해탈을 위한 수련 과정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겁니다.”

마 교수가 맞서야 했던 것은 사법부만이 아니었다. 연세대학교는 1심 선고가 있자마자 마 교수를 직위해제했다. 대법원 판결 후인 1995년엔 면직을 했다. 마 교수의 옆에는 학생들이 있었다. 구속될 당시 마 교수의 수업을 듣고 있던 학생 수는 약 2000명. 그는 인기 교수였다.

연세대 학생들은 기민하게 움직였다. 구속된 지 한 달 만에 ‘마광수 교수 필화사건 백서’가 나왔다. 서명운동을 벌이고 서초동 법원으로 몰려가 시위를 했다. 1995년에는 공판기록과 성명서 등 관련 글을 모아 ‘마광수는 옳다’라는 두꺼운 책도 펴냈다. 영화감독 윤여창씨는 당시 연세대 국문과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다. 백서를 만드는 등 마 교수 구명운동에 앞장섰다. 그에게 사라와 마 교수는 어떤 존재일까.

“마 교수님은 표현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려준 분입니다. 한국 사회의 문화적 자산이에요. ‘성적 욕구가 있으면 있다고 인정해라. 그게 자유주의다’라고 말한 것뿐입니다. 마 교수님께 배우는 동안 그분이 일상에서 부적절한 행동을 하는 걸 본 적이 없어요. 누구보다 자기관리를 잘하신 분입니다. 사생활도 깨끗하고요. 돌아보면 당시 마 교수님의 예측이 실현됐잖아요. 손톱을 다듬고 문신을 하고, 성문화는 더욱 다양해지고요”

윤 감독은 “기독교를 믿는 교수집단과 사회주의 리얼리즘 진영 양쪽이 모두 마 교수를 공격했다”고 회고했다. 한마디로 마 교수 비판에 좌우가 따로 없었다는 말이다. 당시 지식인 사회는 마 교수에게 다른 잣대를 들이댔다. ‘도덕주의’. 이념의 잣대보다 더욱 통과하기 어려운 잣대였다. 윤 감독은 “마광수 사건 당시보다 한국 사회는 더욱 퇴보한 것 같다”고 덧붙였다.

“우리 사회엔 아직도 위선적인 도덕주의자들이 가득해요. 밤에는 룸살롱 다니면서 낮에는 그걸 박쥐처럼 숨기고 있어요. 박유천 사건이나 홍상수 감독 사건을 보세요. 성에 관련된 일이 불거지면 몰려들어 맹비난을 퍼붓잖아요.”

역시 학창 시절에 마 교수의 수업을 들었던 김성수 연세대 학부대학 교수는 마 교수의 학문적 성과를 언급했다. “박사학위 논문으로는 처음으로 윤동주 시인을 다루셨지요. 윤동주의 시를 개성적이고 독창적으로 해석해낸 최초의 연구 성과였습니다.”

사실 마 교수의 학문적 성과는 대중에 거의 안 알려져 있었다. 지난 3월 영화 ‘동주’가 개봉한 후 잠깐 재조명되긴 했다. 마 교수는 윤동주의 시에서 ‘부끄러움’을 처음으로 발견했다. 현재 중·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의 윤동주 해설은 마 교수의 논문을 풀어놓은 거라 보면 된다.

‘사라’의 운명은 어떻게 됐을까. 사라는 여전히 창살 안에 갇혀 있다. ‘즐거운 사라’는 아직 금서다. 이에 대한 정부 부처의 설명은 엇갈린다. 문화관광부 출판인쇄산업과의 김일환 과장은 이렇게 답했다. “대법원이 최종적으로 판단을 내렸기 때문에 판매금지를 풀 수 있는 방법은 없다. 다만 당시와 같은 판매금지 처분은 현재로서는 사실상 작동하지 않는다. 마 교수가 다시 책을 출판한다면 판매금지는 적용되지 않는다고 봐야 한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에서 음란 정보를 전담하는 청소년보호팀의 관계자는 “대법원에서 최종 판단을 내린 사안이다. 만약 마 교수가 홈페이지에 ‘사라’를 올리고, 이에 대한 신고가 들어온다면 심의를 거친 후 삭제될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마 교수에게 사라는 어떤 존재일까. 그녀와의 ‘만남’을 후회하는지 물었다. 전화기 너머로 망설이는 기척이 전해왔다. 거의 모든 질문에 막힘없이 답하곤 한 그였다. 괜히 물었다 싶을 즈음 다시 목소리가 들렸다. “당시엔 무심하게 쓴 거지. 대단한 걸 써서 한국을 뒤집어놓자고 쓴 게 아니에요. 이제 저는 잊혔어요. 젊은 사람들이 절 모르잖아요. 어느 전설적인 돌아이가 있었다더라 하는 정도로만 알지요. 우리 사회엔 아직도 검열이 너무 심해요. 제2의 마광수도 안 나왔잖아요.”

1980년대와 1990년대 연세대를 다니면서 마 교수의 수업을 들은 사람들은 지금 오십줄에 들어섰거나 사십대 후반이다. 학교를 떠난 지 20년이 훌쩍 넘은 이들이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다. “젊은 시절 마광수 교수의 수업을 한 과목이라도 들었다는 게 자랑스럽다. 대학 운동권 일각에 주체사상이 파고들던 그 시점에 우리는 마 교수의 강의를 통해 인간의 본능, 성적 판타지, 에로티시즘에 처음으로 눈을 뜰 수 있었다. 마 교수가 아니었으면 그때 이념의 감옥에서 헤어나지 못했을 것이다. 지나고 보니 마 교수의 강의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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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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