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옥(왼쪽). 김순권.
김영옥(왼쪽). 김순권.

올해 광복절을 맞아 새로 독립운동가로 인정되면서 대통령표창을 받은 김순권 선생(1886~1941). 그는 불세출의 전쟁영웅이자 인도주의자인 김영옥 대령의 아버지이자, 브로드웨이의 살아 있는 전설로 꼽히는 세계적 예술가 윌라 김의 아버지이다. 인천 출신인 김순권은 경신학교(경신중·고교의 전신)를 졸업하고 1903년 미국으로 망명, 숙부 김경함 선생과 함께 독립운동가가 됐다.

김순권은 대한인동지회와 대한인국민회 회원으로서 미국 로스앤젤레스를 중심으로 활약했다. 대한인동지회는 이승만 대통령이, 대한인국민회는 도산 안창호 선생이 각각 미국에 세운 독립운동단체였다. 대한인동지회 대표를 지낸 김순권은 자기보다 아홉 살 많은 이승만 대통령에게는 아우 같은 독립운동 동지이자 측근이었다.

재미동포 사회에서 발행된 신한민보 1923년 6월 14일자에 따르면 김순권은 당시 남캘리포니아 한인사회에서 가장 부유했으나, 그의 자녀들은 당시 가족이 아주 가난하게 살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가 수입 대부분을 독립운동자금으로 내놨기 때문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 하던 시절 로스앤젤레스에 가면 김순권의 집에 머물곤 했다. 두 가족이 가까워 이승만 부부는 김순권 부부의 둘째 딸을 입양하려고도 했다. 김영옥은 생전에 나와의 인터뷰에서 이런 증언을 했다. “1·4후퇴 직후인 1951년 3월 부산에 도착한 다음날 임시 경무대로 이 대통령을 예방했을 때 어머니는 물론이고 내 형제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꼽으면서 안부를 묻고는 전선으로 가더라도 항상 안부를 전하라고 했다.” 이때 김영옥이 이승만 대통령을 예방한 것도 어머니가 “한국에 가면 이승만 대통령을 꼭 찾아뵙고 인사드려야 한다”고 당부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김순권의 집은 대한인동지회 소속 독립운동가들의 아지트여서 대한인동지회 회원들은 주말이면 김순권의 집에 모여 독립 이야기로 밤을 지새곤 했다. 김순권은 이승만 대통령의 측근이면서 도산과도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도산이 무력항쟁을 통한 독립을 중시하던 시절 군자금 조달을 위해 설립한 북미실업주식회사가 파산했을 때 청산절차도 김순권 등이 주도했다. 김순권이 도산과도 가깝다는 것을 알던 이승만은 1932년 도산이 일경에 체포됐을 때 도산 부인에게 보내는 위로전보를 김순권 앞으로 타전해 전달을 부탁하기도 했다.

김순권이 함께 독립운동을 했던 동지 가운데는 이승만·안창호 외에 임병직·김종림·이순기 등도 있다. 임병직은 훗날 이승만 정부에서 외무장관·유엔대사 등을 지냈다. 김종림은 도산과 함께 흥사단 창설멤버이자 재미동포 백만장자 1호로 평가받던 인물이다. 임정이 공군력을 앞세운 독립전쟁을 위해 1920년 미국에 창설한 비행학교의 재정을 도맡고 총재까지 역임했다. 이순기는 한민족 최초 올림픽 금메달 2연패(다이빙)의 주인공인 이비인후과 의사 새미 리 박사(미국 거주·96세)의 아버지인데, 1925년 임정이 임시대통령 이승만을 탄핵 면직시켰을 때 김순권 등과 함께 임정 의정원에 서한을 보내 이 조치가 잘못됐다고 항의하기도 했다.

김순권은 미국으로 가기 전 수원 태생인 노라 고와 법적 혼인은 했으나 같이 살지는 않았다. 노라 고는 신학을 전공하고 경성성경학교에서 수년간 강단에 섰으니 이들 부부는 당시 조선의 대표적 인텔리였던 셈이다.

노라 고는 미국에서 신학 공부를 더 하고 조선으로 돌아와 교수가 되기 위해 1916년 유학길에 올랐다. 노라 고가 도미 직후 동포들을 대상으로 강연을 했다는 기록도 그가 평범한 여성이 아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김순권과 노라 고는 미국에서 가정을 이뤘는데 로스앤젤레스에서 대형 편의점을 운영하면서 불과 수년 만에 남캘리포니아 한인사회에서 가장 부유하게 될 수 있었던 것도 이들의 근면함과 함께 높은 교육수준으로 인한 유창한 영어 덕택이었다.

김순권의 자녀들. 오른쪽 첫 번째 소년이 김영옥, 그 옆 소녀가 윌라 김.
김순권의 자녀들. 오른쪽 첫 번째 소년이 김영옥, 그 옆 소녀가 윌라 김.

이들은 슬하에 4남2녀를 뒀는데 이 가운데 장남과 장녀가 세계적 인물이 됐다. 장녀 윌라 김(한국 이름 김월나·미국 거주·99세)은 한국에서는 생소한 이름이나 토니상 2회, 에미상 2회 수상에 빛나는 세계적 의상 디자이너로 오드리 헵번, 줄리 앤드루스, 레너드 번스타인, 사뮈엘 베케트 등과 함께 ‘세계 무대예술가 명예의전당’에 이름이 들어 있다. 오페라·뮤지컬·발레·연극 등을 위한 순수예술의상 디자이너(코스튬 디자이너)로 한국으로부터는 보관문화훈장을 받았다.

장남 김영옥 대령(1919~2005)은 최근 수년 사이 한국에도 널리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한 인물이다. 김영옥은 미국 육군장교로 2차대전에서는 독일군을 상대로, 또 6·25전쟁에서는 중공군을 상대로 불패신화의 주인공이 됐으며 프랑스·이탈리아·한국의 최고무공훈장을 받았다. 6·25가 한창이던 1951년 5월 말~6월 초 유엔군 3차 반격 당시 중부전선에서 60㎞의 북상을 이끈 주역이었다. 미국 역사상 최초의 유색인 야전대대장이라는 기록도 세웠다. 최일선을 지키면서도 전쟁고아 500명을 돌보기도 했다. 1963~1965년 한국군 군사고문 시절에는 국군 최초 미사일부대 창설, 한국 방어계획 개편, 청와대 경비부대 정비, 서울 방어시스템 정비 등 한국이 경제발전에 매진할 수 있도록 군사적 방패가 됐다.

김영옥이 31년간의 군생활을 뒤로하고 예편하자 미국 정·재계의 러브콜이 이어졌으나 그는 이를 마다했고 대신 가정폭력 피해여성, 고아·입양아, 노인, 청소년, 빈민 등 인종을 초월해 사회적 약자를 돕기 위해 33년 여생을 바쳤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공립중학교인 ‘김영옥중학교’는 미국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여진 중학교이며, 캘리포니아주립대학교(Univ. of California, Riverside) 부설 ‘김영옥재미동포연구소’ 역시 미국 최초로 한국인 이름이 붙여진 대학 기구이다. 그는 ‘msn.com’에 의해 미국 최고 전쟁영웅 16명 가운데 유일한 유색인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현재 미국 정부는 김영옥에게 미국 최고시민훈장인 대통령자유훈장을 수여하기 위한 최종 검토를 진행 중이며, 프랑스는 2차대전 당시 그가 피 흘려 나치와 싸웠던 브뤼에르 또는 비퐁텐 지역에 영원히 그를 기리는 조형물 건립을 검토 중이다.

김순권은 아들 김영옥이 2차대전 와중에서 미군에 징집돼 훈련받던 1941년 5월 그렇게도 갈망하던 조국의 독립을 보지 못한 채 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부인 노라 고는 신학교수가 되겠다는 자신의 꿈을 접고 남편의 독립운동을 뒷바라지하면서 딸을 세계적 예술가로, 아들을 전설적 전쟁영웅이자 위대한 인도주의자로 키운 20세기의 신사임당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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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우성 김영옥평화센터이사장·재미언론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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