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가 딸의 기숙사 무브인을 도와주고 있다. ⓒphoto 하버드대
아버지가 딸의 기숙사 무브인을 도와주고 있다. ⓒphoto 하버드대

시무룩한 표정의 두 아이가 스테이플스(미국 최대의 문구 및 사무용품 수퍼스토어) 매장 가운데서 인상을 찌푸린 채 고개를 숙이고 서 있다. 그 사이로 아이들의 아빠가 쇼핑카트에 가득히 문구류를 싣고 경쾌한 발걸음으로 춤을 추면서 노래를 부른다. 앤디 윌리엄스의 유명한 ‘일 년 중 가장 신나는 시간(It’s most wonderful time of the year)’과 함께.

크리스마스 시즌을 알리는 노래가 아니다. 방학이 끝났고 이제 다시 학용품을 준비해야 하는 ‘백 투 스쿨(Back to School)’ 시즌임을 알리는 스테이플스의 유쾌하면서도 성공적인 광고이다. 여름방학 내내 아이들에게 시달린 미국 부모의 홀가분한 기분과 다시 학교로 돌아가야 하는 아이들의 괴로운 표정을 유머러스하게 잘 표현하고 있다.

8월의 미국은 백투스쿨을 준비하는 달이기도 하지만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이 대학교 기숙사로 이사를 가야 하는 무브인(Move In) 달이기도 하다. 대개 5월 말 6월 초에 고등학교를 졸업한 아이들은 약 3달 동안 그야말로 무한의 자유 시간을 가진다. 그들을 간섭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해야 할 숙제도, 여름 캠프도, 읽어야 할 책도 없다. 그저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그러다가 아침저녁으로 찬기운이 느껴지는 8월 하순이 오면 부모도 아이도 서서히 분주해진다. 대학 진학은 새로운 배움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그것보다 더 절실히 와 닿는 것은 비로소 집을 떠나 독립적인 생활을 시작한다는 점이다. 집에서 멀리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는 그렇다치고, 집에서 가까이 있는 학교에 진학하는 경우도 예외가 아니다. 왜냐하면 미국 대부분의 대학은 신입생들의 기숙사 생활을 필수적으로 요구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집을 떠나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아이들을 떠나보내는 부모에게도 상당한 도전이다.

룸메이트와의 기숙사 생활은 생활예절을 배우는 장이 된다. ⓒphoto 버클리음악대
룸메이트와의 기숙사 생활은 생활예절을 배우는 장이 된다. ⓒphoto 버클리음악대

고등학생인 18세까지 미국의 학생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아무것도 없다. 학교의 모든 활동에는 반드시 부모의 동의가 필요하고, 운전면허증이 없는 아이들이나 면허증이 있어도 차가 없는 아이들은 어디를 가고 싶어도 태워주는 사람이 없으면 꼼짝도 할 수 없다. 흔히 영화에서 보는 것처럼 미국 아이들이 굉장히 반항적이고 제멋대로인 것 같지만 실상은 그것과는 거의 정반대다. 대부분 미국의 청소년들은 부모나 다른 보호자의 보호 아래 순수하게 보낸다. 이런 아이들이 그 울타리를 벗어나 스스로를 돌봐야 하는, 어른의 첫걸음이 바로 이 기숙사 무브인이다.

무브인을 준비하는 부모는 자식의 분가(分家) 수준에 해당하는 스트레스를 받는 것 같다. 미우나 고우나 같이 지내던 자식이고 언제나 내가 닿을 수 있는 위치에 있던 아이들과의 관계가 청산되는 것이다. 힐러리 클린턴의 자서전을 보면 당시 대통령이던 클린턴이 외동딸 첼시의 기숙사 무브인을 감당하지 못해 뒷짐을 쥐고서 왔다갔다 하는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다. 이런 정서적 어려움만 겪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혼자서 생활할 수 있는 온갖 준비를 다 해줘야 한다.

그래서 이때쯤이면 백화점이나 주요 생활용품 매장에서는 대학생용 종합 패키지를 판매하는 곳이 많다. 침대보와 베개 등 침구류, 전자레인지와 냉장고 등 1인용 가전제품, 청소용품, 목욕용품, 간단한 가재도구 등 거의 한 살림을 차릴 수 있는 것들을 준비해야 한다. 빠질 수 없는 것이 바로 동전 세탁기 사용법이다. 집에서 세탁기를 사용해본 경험이 없는 아이들이 많기 때문이다. 기숙사에는 동전 세탁기나 학교에서 지급하는 아이디 카드로 사용할 수 있는 세탁기가 비치되어 있다. 1학년들은 대부분 이 세탁기를 처음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9월의 인스타그램에는 세탁기를 처음 사용하는 신입생들의 자랑스러운 사진들이 넘쳐난다.

아이들은 아이들대로 긴장한다. 엄마 아빠의 잔소리에서 해방된다는 느낌과 함께 그래도 자신을 보호해주던 장벽이 사라진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느낀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그런 긴장과 초조는 얼굴에 그대로 묻어난다. 고등학생 때까지 여름방학이면 캠프활동 등으로 일주일씩 집을 떠나 있어 보기는 했지만 대학 기숙사 생활은 그것과는 차원이 다른 생활이다. 집을 떠난다는 것과 함께 지금까지는 방문을 걸어 잠그고 그 안에서 자기 마음대로 생활할 수 있었지만 이제부터는 비좁은 방에서 전혀 모르는 친구와 방을 나눠 써야 하는 것이다.

대개 미국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동전 세탁기를 사용하게 된다. ⓒphoto 아칸소주립대
대개 미국 학생들은 대학에 입학하고 나서야 동전 세탁기를 사용하게 된다. ⓒphoto 아칸소주립대

그 친구가 남부 어느 주에서 온 친구일 수도 있고, 몬태나의 조그만 도시 출신일 수도 있으며, 외국에서 유학온 친구일 수도 있다. 너무 소리를 질러서도 안 되고, 늦게까지 불을 켜서도 안 되고, 너무 지저분하게 해서도 안 된다. 그런 생면부지의 친구와 절반의 공간을 어떻게 나눠야 하는지를 통해 비로소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선의 존재를 깨닫는다. 간섭하지 않기와 간섭받지 않기, 그것을 위한 기본적인 생활 예절을 고통 속에서 배우는 과정이 1학년 기숙사 생활이다.

그래서 이런 긴장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각 학교에서도 매우 진지하게 신입생 맞기에 나선다. 무브인 데이가 되면 이미 그 긴장의 과정을 거쳐간 3~4학년 선배들이 각 기숙사별로 배치되어 방 안내, 짐 들어주기, 쓰레기 버리기, 생활 안내 등 기숙사에 잘 적응할 수 있도록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무브인이 끝나면 기숙사별로 조그만 이벤트가 끊임없이 진행된다. 이런 이벤트에는 신입생을 거의 강제로 참여하도록 하는데 그런 과정을 통해 서로 얼굴을 익히고, 동질감을 느끼며, 집을 떠난 외로움을 극복하고 학교 생활에 잘 적응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한 학년이 끝나고 집에 돌아와야 할 때에는 기숙사를 무조건 비워야 한다. 그것은 기껏 준비해갔던 그 많은 물건들을 전부 다시 가지고 나와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들어갈 때야 부모의 도움으로 쉽게 챙겨 갔으나 가지고 나올 때는 스스로 전부 다 해야 한다. 생전 해보지 않은 이삿짐을 꾸려야 한다. 이 이삿짐을 모두 가지고 올 수 없으니 박스를 어딘가에 보관해야 한다. 그런 다음 새학기가 시작되면 맡겨놓은 박스를 다시 찾아와서 새로 배정된 방에 풀어야 한다. 물론 박스 픽업, 보관, 딜리버리를 해주는 업체들이 대학 주변에는 꽤 있다. 이런 무브인과 패킹을 4년 동안 되풀이한다. 대학은 학생들에게 학문만을 가르치는 곳이 아니라 기숙사 생활을 통해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필요한 기본 소양을 길러주는 곳이기도 하다. 미국의 젊은이들은 이렇게 책임 있는 어른으로 성장해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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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욕 통신
황효현 경기텍스타일센터 뉴욕사무소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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