왼쪽부터 쌍송국수 3대 사장 김민균씨와 어머니 임명금씨, 부인 조성미씨.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왼쪽부터 쌍송국수 3대 사장 김민균씨와 어머니 임명금씨, 부인 조성미씨.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수화기 너머 목소리가 무뚝뚝했다. 통화할 새도 없이 바쁘다고 했다. 하는 일 방해 않고 점심때 잠깐 시간을 얻기로 하고 인터뷰 약속을 했다. 충남 예산읍 천변로에 있는 쌍송국수 3대 사장 김민균(35)씨를 만나러 나선 것은 지난 9월 2일. 서울에서 오전 8시에 나서 쌍송국수에 도착한 시각은 오전 10시30분이었다. ‘여기가 예산 70년 전통의 쌍송국수’라는 빛바랜 간판이 보였다. 김민균 사장의 조부가 6·25전쟁 직후 이곳에서 방앗간을 하면서 국수 가락을 뽑은 것이 쌍송국수의 시작이었다. 3대째 한자리에서 햇볕과 바람에 자연건조한 수제국수를 70년이 넘게 만들고 있다. 예산국수가 유명해진 것이 바로 쌍송국수 때문이다.

낡은 일본식 목조건물 1층과 2층에 하얀 국수 가락이 줄지어 늘어선 채 바람과 몸을 섞고 있었다. 찰랑거리는 국수 가락을 헤치고 들어가자 좁은 제면소 안에 세 사람이 보였다. 김민균씨와 아내 조성미(34)씨, 김씨의 어머니 임명금(55)씨. 선풍기가 돌고 있는 내부는 더웠다. 70년이 넘다 보니 건물 구석구석에 세월의 더께가 앉아 있었다. 세 사람이 어찌나 분주하게 움직이는지 말을 붙이기도 어려웠다.

좁은 공간은 확실한 분업 체계로 나뉘어 있었다. 김씨는 반죽한 밀가루를 두루마리 화장지처럼 롤러에 감아서 국수 뽑는 기계로 넘긴다. 국수 가락이 회초리처럼 생긴 시누대(대나무 가지)에 걸쳐 나오면 임씨는 1층과 2층을 오가며 건조대에 널어놓는다. 아내 조씨는 포장, 판매 담당이었다. 3가지 공정이 톱니바퀴 맞물리듯 돌아갔다. 말 한마디 않고도 손발이 척척 맞았다. 묵언수행하듯 움직이는 세 사람을 보고 처음엔 ‘화가 났나, 바쁜데 취재 와서 못마땅한 건가’ 괜한 눈치가 보였다.

모든 공정은 사람 손이 들어가다 보니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하루에 처리하는 물량은 20㎏ 밀가루 20~30포대 분량. 한 포대에 1.5㎏ 국수 15개 정도가 나온다고 하니 하루 300~450다발이 만들어진다. 조씨가 집안일로 빠진 날은 모자가 모든 일을 처리해야 한다. 오후엔 국수 건조와 주문 물량을 택배로 보내느라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고 했다. 제면소에서 몇 걸음 떨어진 국숫집 2곳이 쌍송국수를 사용하는 집이라고 했다. 그중 16년 됐다는 ‘밀밭칼국수’에서 늦은 점심을 먹으면서야 겨우 얼굴을 마주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김민균씨가 가업을 잇기까지

국수를 뽑는 일은 아침 7시부터 시작해 오후 1시30분이 돼서야 끝났다. 아버지인 고 김성산 2대 사장은 똑같은 물량을 소화하기 위해 새벽 3~4시에 일어나 밤 10~11시까지 일을 해야 했다. 공정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인 것은 김씨다. 외동아들인 김씨는 가업을 이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국수밖에 모르는 아버지의 등만 보고 자랐으니 국수라면 지겨웠다. 대학에서 인터넷 비즈니스를 전공하고 서울에서 무역회사를 다니던 김씨가 예산으로 내려온 것은 2011년. 아버지가 간경변증으로 세상을 떠나면서다. 아버지의 고된 노동을 달래준 유일한 친구가 술이었다. “네가 맡아야지.” 유언처럼 남긴 아버지의 바람도 그의 발목을 잡았다.

쌍송국수는 아버지대부터 입소문을 타고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아버지가 2007년 텔레비전 프로 ‘생활의 달인’에 출연한 이후엔 없어서 못 팔았다. 주문 물량이 몇 달치가 밀릴 정도였다. 아버지 장례를 치르고 김씨가 주문장을 보니 4000만원어치분의 주문이 밀려 있었다. 쌍송국수는 밀가루 냄새가 나지 않고 면발이 쫄깃하다는 것이 오랜 고객들의 평이다. 3대로 가업이 이어지는 동안 단골도 3대로 이어지고 있다.

“주문 고객에게 전화를 돌리고 사정 이야기를 했죠. 환불을 해드리겠다고. 그런데 대부분 국수로 보내달라고 하는 겁니다. 기다리겠다고. 하는 수 없이 아버지가 벌여놓은 일만 수습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했죠.” 거의 반 강제로 가업을 잇게 됐다는 것이 김씨의 말이다. 김씨가 반죽에 전분가루를 섞으면서 말했다. “면발이 쫄깃한 건 전분 함량이 높아서 그래요. 기계로 만들면 전분을 넣는 것이 한계가 있어요. 전분만 많이 넣는다고 쫄깃한 건 아니고 날씨에 따라 적절한 비율이 있어요. 햇볕, 바람에 건조되는 시간 동안 숙성이 되면서 쫄깃함이 더해지는 거죠.” 김씨는 아버지가 45년 동안 이뤄놓은 것을 지키고 있을 뿐이라고 했다.

어머니 임명금씨의 국수 인생

“멍멍이고생했쥬. 시집올 때 국숫집 한다 그래서 국수만 팔면 되는 줄 알고 멋모르고 왔쥬.”

임씨는 35년 동안 남편 옆에서 무거운 국수 다발 옮기느라 손목도 허리도 성한 곳이 없다. 수십 년 하던 방식을 고집하는 어머니와 공정을 개선해 보려는 아들은 숱하게 싸웠다. 아들은 아픈 어머니가 좁은 2층 계단을 오르내리다 넘어지는 것을 보다 못해 계단을 없애고 리프트를 설치했다. 지난해 임씨가 다리 수술 하는 틈을 타 아들은 국수 가락 뽑는 기계를 새로 들이고 작업 동선을 확 뜯어고쳤다. 건조장도 늘렸다. 아들이 옆에 있어서 든든하겠다고 하자 임씨가 말했다.

“어렵쥬~. 아들이 안쓰러워 더 하게 되고 아들은 엄마 고생한다고 더 하려고 하고. 남편 밥은 편한데 아들 밥은 어려워유.”

작업 공정은 반죽과 건조로 간단해 보이지만 면발을 좌우하는 요인은 수십 가지가 넘는다고 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날씨이다. 날씨에 따라 반죽을 하는 소금물의 염도, 건조 시간이 달라진다. 계절은 물론 그날 날씨에 절대적으로 좌우될 수밖에 없다. 비가 오면 공치는 날이니 밀린 물량 생각하면 마음은 더 바빠진다. 소금간은 경험 많은 임씨가 주로 한다. 건조도 햇볕에만 말린다고 되는 것이 아니다. 햇볕에 먼저 말린 후 반 건조 상태에서 그늘로 옮겨 놓았다가 다시 햇볕에서 말리는 것을 2~3일 동안 반복해야 한다. 순서대로 세 번씩 옮겨야 하니 임씨는 하루 종일 국수 가락이 걸쳐진 시누대를 들고 1, 2층으로 종종걸음을 쳐야 한다. 너무 말라도 안 되기 때문에 시간을 놓치면 안 된다.

“습도가 높으면 염도를 높여야지 잘못하면 가락이 축 늘어져유. 봄, 가을이 잘 마르긴 한데 봄에는 뛰어다녀야 해요. 화장실 갈 시간도 없다니께. 소금도 젤 많이 들어가요. 그래서 봄 국수는 빨래 빨 듯 흐르는 물에 씻어야 해. 염이 많아도 안 마르고 염이 적으면 허풍선 뛰듯 날리고, 쉬운 것 같은데 어려워요. 바람도 적당히 불어야지 많이 불면 정신없어. 어제도 바람이 불어 한 포대 분은 날아갔슈.”

70여년 한자리를 지켜온 쌍송국수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에서 국수가 마르고 있다.
70여년 한자리를 지켜온 쌍송국수의 일본식 2층 목조건물에서 국수가 마르고 있다.

연구원서 국숫집 며느리 된 조성미씨

“국수 길이요? 잘 모르는데요. 하루 물량요? 글쎄요. 아무 생각 없이 해야 하는 일이거든요. 생각하면 못 해요.”

조씨가 다 마른 국수 가락을 시누대에서 걷어 손으로 툭툭 네 토막을 내더니 종이에 둘둘 말았다. 칼로 자르는 것이 아닌데도 길이가 일정했다. 자칫하단 부서지기 때문에 힘 조절이 중요하다. 1년 동안 시어머니 어깨 너머 눈으로 익히다 시작했다고 한다. 처음엔 실수도 많았다는데 이제는 국수 가락이 그의 손에 착착 붙었다. 이야기를 하는 도중에도 조씨의 손은 쉴 새 없이 움직였다.

이곳 국수 포장은 아주 투박하다. 아무 글씨도 써 있지 않은 얇은 종이에 말아 빈 밀가루 포대에 넣어 비닐 끈을 묶으면 그만이다. 한 포대에는 12개가 들어간다. 면의 종류는 소면, 중면, 칼국수면, 메밀면이 전부이다. 주로 나가는 것은 일반 국수보다 약간 두꺼운 중면이다. 택배 판매는 반 포대, 한 포대 단위만 받고, 방문 판매는 낱개도 한다. 이날도 국수를 사러 찾아온 사람이 꽤 많았다. 멀리서 차를 타고 오는 단골이 대부분이었다. 그나마 평일이라 방문 손님이 적은 편, 주말은 외지 손님이 끊이지 않는다고 했다.

5년 전 가업 승계를 고민하는 김씨의 어깨를 민 것은 조씨였다. 호텔경영학을 전공하고 경제연구소에 다니던 조씨는 결혼과 함께 남편의 손을 잡고 예산으로 내려왔다. 두 아이를 낳아 기르면서 짬짬이 일을 도와주기 시작한 것이 이제는 없으면 안 되는 국숫집 며느리가 됐다.

쌍송국수 3대 사장, 큰 꿈을 꾸다

김씨는 이제 목표가 생겼다. 지난해부터 일이 재미있어지기 시작했다. 3대로 이어지면서 언론들이 앞다퉈 찾아오고 유명세를 타는 만큼 쌍송국수에 대한 책임감도 커졌다. 그의 목표는 주5일제. 즉 맛과 품질은 그대로 유지하고 대량 생산을 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는 것이다. 그는 내년 제면소 이전을 계획하고 있다. 현재 건물은 한참 전에 팔아 세를 내고 있는 상태다. 70여년 만의 대이동이다. 매년 주문은 늘어나는데 현재의 작업장에서는 소화하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미 현재의 2배 넓이 작업장은 마련해 놓은 상태다. 최고의 국수로 우리나라 국수시장을 제패하고 싶은 꿈도 꾸고 있다.

가장 큰 목표는 아버지의 맛을 그대로 지키는 것이다. 국수를 좋아하지 않았던 그는 처음 서울에 올라가 국수를 사먹고 깜짝 놀랐다고 한다. “국수를 안 좋아해 집에서 아버지의 국수만 먹었거든요. 국수는 모두 그 맛인 줄 알았죠. 근데 처음 사먹은 국수가 너무 맛이 없는 거예요. 하나도 쫄깃하지도 않고.”

아버지 국수의 비결 중 하나는 좋은 밀가루를 쓰는 것이다. 밀가루의 가격은 천차만별이다. 20㎏ 한 포대에 9000원짜리 수입산부터 3만원에 가까운 것도 있다. 같은 일등품이라도 한 포대에 6000원까지 차이가 난다고 한다. 쌍송국수는 아버지대부터 사용하던 일등품을 고집하고 있다. 밀가루 값은 아버지 때보다 3배 가까이 뛰었지만 국수 가격은 1000원을 올려 4000원을 받고 있다. 그만큼 마진율이 낮다. 좋은 재료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생산량을 대폭 늘리는 것밖에 없다는 계산이다. 그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어머니를 쳐다보며 말했다. “5년 동안 연습 많이 했쥬?”

내년 제면소를 이전하면 침과 파스로 버티고 있는 어머니를 쉬게 하는 것도 그의 목표 중 하나이다. 만일 아들이 아버지의 뒤를 잇겠다고 하면 어떻게 하겠느냐는 물음에 그가 답했다.

“하고 싶다고 시키는 게 아니라 아들이 사정사정해서 일을 배우고 싶어할 만큼 쌍송국수를 키울 겁니다.”

황은순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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