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photo 양수열 영상미디어 기자

2006년, 50세 권호진씨는 잘나가는 CEO였다. 말단사원으로 입사한 에이스화재보험에서 ‘월급쟁이 신화’로 불리며 한국지사장까지 맡았다. 회사에서는 한국어보다 영어 업무가 더 많았다. 널찍한 집무실에다 개인 비서가 있었고, 회사에서 제공한 고급 세단자동차에 전용 기사까지 있었다. 고액 연봉도 보장됐다. 회사에서든 집에서든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그가 지나가면 직원들이 바짝 긴장했고, 그의 말 한마디가 최후 결정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시쳇말로 손가락 하나 까닥하지 않는 삶이었다.

2016년, 60세 권호진씨는 서울 서초구청 최고령 막내공무원이다. 부서 내에서 그는 ‘귀요미’ ‘우리팀 마스코트’로 불린다. 직급도 말단이지만, 그의 부서 일자리경제과에서도 막내라 그야말로 ‘막내’처럼 행동한다. 직장 선배들에게 깍듯이 인사하고, 밥을 먹을 때도 자연스럽게 ‘묻어’간다. 근태가 나쁘거나 기획안이 시원치 않으면 40대 팀장한테 야단을 맞기도 한다.

2014년 9급 공무원시험에 합격한 권씨는 올 12월 퇴직을 앞두고 있다. 딱 2년간의 시한부 공무원 인생. 이를 위해 그는 2년 가까이 공무원 공부에 매달렸다. 얼마 전에는 그 비결을 담은 ‘공무원 합격 자신만만 공부법’도 냈다. 책은 ‘이 나이에도 나처럼 하면 누구나 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57세 공무원 도전, 58세 합격

그 행간이 궁금했다. 왜 공무원시험에 도전했는지, 퇴직 후 10년간 공백의 시간은 어땠는지, 최고경영자에서 말단공무원으로 지내는 기분은 어떤지, 과연 지낼 만한지, 만약 그렇다면 그 노하우는 무엇인지…. 작년 하반기에 개봉돼 유독 한국에서만 인기를 끈 영화 ‘인턴’도 떠올랐다. 30대 여성 CEO 줄스(앤 해서웨이 분)의 회사에 70대 인턴 벤(로버트 드 니로)이 입사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를 그린 영화에서 벤은 ‘웰 에이징’의 화신 같은 존재였다. 연륜과 지혜가 가득하지만 섣불리 나서서 가르치려 하지 않는 ‘벤’은 한국 관객들에게 ‘우리도 저런 노인을 만나고 싶다’는 열망을 갖게 했다.

권씨에게 인류가 한 번도 가 보지 않은 ‘100세 시대의 인생 2막’을 잘 여는 법을 묻고 싶었다. 특히 나이 어린 상사들과 잘 어울리는 비결을 알고 싶었다. 청년 세대와 시니어 세대와의 조화, 세대차이 극복이야말로 100세 시대 행복의 첫 요건이기 때문이다. 지난 8월 말, 서초구청 부근 카페에서 만난 그는 운동화 차림이었다. 면바지에 배낭 하나 걸쳐 메고 나타난 그는 동안(童顔)이었다. 많이 잡아야 50대 초반 정도로 보였다. 그가 인터뷰 장소로 소개한 곳은 실속형 프랜차이즈 커피전문점. “회사에서 가까워서 종종 가는데, 조용하고 좋아요”라며 안내했다.

“9급 공무원이 돼서 출근한 첫날, ‘내 나이를 잊자’고 다짐했습니다. 직무와 직급만 생각했죠. 여기에서 저는 막내입니다. 막내로서 행동을 합니다. 먼저 물어보지 않는 이상 인생에 대해 함부로 말하지 않아요. 직장 선배들은 직장 경험이 저보다 더 많으니까 선배로 대접합니다. 물론 어린 상사들이 예의 없는 행동을 할 때도 있고, 별나게 구는 선배도 있습니다. 저도 인간이니까 당연히 기분은 나쁘지요. 하지만 막내답게 순종합니다. 허허.”

겉으로 보기에 그의 삶은 퇴보했다. 적어도 지위나 숫자상으로는 그렇다. ‘최고경영자’에서 ‘말단직원’이 됐고, 월급 또한 CEO 시절의 10분의 1도 안 된다. 하지만 ‘행복도’ 면에서는 지금이 훨씬 행복하다고 한다.

“세간의 기준으로는 과거의 삶이 성공한 삶이고, 출세한 삶이지요. 하지만 저는 지금이 더 행복합니다. 훨씬 주도적이고 적극적으로 살게 됐거든요. 또 한국 대표로 임명된 날보다 공무원 시험에 합격한 날이 더 행복했습니다. 대표는 타인에 의한 지목이지만, 공무원 합격은 온전히 혼자만의 힘으로 이뤄낸 것이니까요. 설령 불합격했더라도 후회는 안 했을 겁니다. 그때 공부한 지식이 머리에 쌓였을 것 아닙니까. 그만큼 치매가 늦어지겠지요.”

현재 권씨의 직함은 일자리경제과 사회적경제팀 주무관. 사회에서의 경험을 적극 살린 일을 하고 있다. 그가 최근 추진 중인 일은 크게 두 가지다. ‘오감만족 사회적경제장터 서초 건강한마켓’(이하 ‘서초 건강한마켓’)과 ‘시니어와 청년이 함께하는 사회적 경제 아카데미’. 둘 다 권씨가 적극적으로 참여해 따낸 사업이다. ‘서초 건강한마켓’은 서초구 관내 및 서울시 우수 사회적경제기업, 푸드트럭과 디자인제품기업 등을 모집해 서초구청광장에서 선보이는 프로그램으로 연내 총 3회에 걸쳐 진행되고, ‘사회적 경제 아카데미’는 청년 20명, 시니어 20명에게 사회적 기업에 대해 교육하는 한편, 취업과 창업이 필요한 청년과 시니어들에게 도움을 주기도 한다. “청년실업도 심각하고 시니어도 시니어 나름대로 암담합니다. 이 두 그룹을 연결해 청년의 아이디어와 중장년의 지혜를 엮어 보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기획하게 됐지요.”

뇌는 퇴화하지 않는다

2006년 명예퇴직 당시 그는 딱 50세였다. 고액연봉자에다가 명예퇴직금도 남부럽지 않게 받아 큰 무리만 안 하면 여생 동안 먹고살 만했다.

그러다 두 가지가 공무원시험 도전의 불씨를 댕겼다. 하나는 그의 둘째 아들이다. 고3 수험생 옆에서 아빠 노릇을 하던 권씨는 어느 날 슬쩍 물었다. “연령제한도 폐지됐는데, 아빠도 공부해서 공무원시험 한번 볼까?” 아들은 펄쩍 뛰었다. “공무원 되는 게 그렇게 쉬운 줄 아세요? 아빠 세대와는 달라요. 아빠가 공무원시험 합격하면 나는 서울대, 아니 하버드대도 가겠어요.” 또 하나는 주변인들의 시선이다. 가족들과 주변 사람들이 ‘삼식이’인 자신을 왠지 무시하는 것 같았다. 가족들은 아니라고 해도 괜한 자격지심에 아무것도 아닌 일로 예민해지곤 했다.

야심만만하게 9급 공무원에 도전, 첫해 공무원 시험에서 그는 낙방했다. 만만히 본 대가였다. “처음에는 취미처럼 공부했죠. 집에서 공부하고 싶으면 하고, 친구 만나고 싶으면 만나러 나가고. 하지만 역시 쉽지 않더군요. 엉망인 시험 성적을 받아들고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그때부터 본격적으로 수험생 모드에 돌입했다. 먼저 공부 공간을 바꿨다. 집 대신 도서관으로. 집 주변에 있는 도서관이 문을 여는 아침 9시에 입실해 밤 9시까지 공부했다. 밥 먹는 시간, 쉬는 시간을 제외하고 하루 꼬박 10시간씩 공무원시험 공부에 매달렸다. 50대 중반에 도전한 공무원시험, 머리 회전은 잘 될까? 그는 “그럴리가요”라며 “껄껄” 웃더니 답했다. “40년 만의 공부였어요. 진짜 안 외워지더군요. 하지만 뇌과학자들에 따르면 아주 열심히 몰입하고 집중하면 전성기 때의 90%까지 회복할 수 있다고 합니다. 그 말을 믿고 도전했죠. 진짜 되더군요. 90%까지는 아니더라도 70% 정도는 회복한 듯합니다. 한 3개월 걸린 듯해요. 뭐든 변화에 적응하기까지 3개월은 필요한 듯합니다.”

사람들은 공무원에 도전하는 권씨를 의아해했다. 어렵게 공부해봤자 달랑 2년 근무한 후 퇴직해야 하고, 연금도 못 받는데 왜 그리 목매느냐고. 혹자는 젊은이들 일자리 뺏는 것 아니냐며 비난하기도 했다. “내 자신한테 도전해 보고 싶었습니다. 젊은 사람들과 경쟁하는 게 좋았고요. 근무기간이 길면 도전하지 않았을 겁니다. 그것이야말로 젊은이들의 일자리를 뺏는 것이니까요. 그저 도전 자체가 좋았고, 새로운 일을 해보고 싶었습니다.”

절대로 사업하지 말라

올 12월 그는 두 번째 퇴직으로 또 기로에 서게 된다. 이후 어떤 계획이 있을까? 의외로 그는 “별도의 계획은 없다”며 담담하게 말을 이었다.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행복한 인생을 살 자신은 있습니다. 터닝포인트를 겪었기 때문입니다. 다른 직장을 구할 수도 있고, 책을 썼으니 또 다른 책을 집필할 수도 있고, 제 경험을 살린 특강을 할 수도 있죠. 다양한 경험을 통해 준비를 해뒀으니 기회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는 “은퇴자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며 “사업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당부했다. 그는 퇴직 후 영어학원을 운영한 적이 있다. 딱 1년간 운영하다 승산이 없다고 판단, 과감하게 접었다. 적자는 안 봤지만 발전 가능성이 안 보여 결단을 내렸다고 한다. “계속했으면 노후파산을 했을지도 모릅니다. 퇴직자가 사업으로 성공할 가능성은 매우 희박합니다. 아이디어만으로는 어렵죠. 사업 하는 사람들의 사고방식과 직장인들의 사고방식은 아예 다릅니다. 평생 직장생활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사업을 하면 십중팔구 망합니다. 사업 하려는 열정과 에너지가 있으면 차라리 나처럼 공무원 공부를 하세요. 승산이 더 큽니다.”

말이 쉽지, 50대에 공무원시험 도전은 쉬운 일이 아니다. 또 공부 잘하는 사람들만의 영역처럼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권씨의 생각은 다르다. “머리 좋은 것과 공무원시험은 아무 상관이 없다”고 잘라 말한다. 공무원시험은 ‘시험을 위한 시험’이기 때문에 상식과 지식이 거의 통용되지 않고, 그저 시험 교재로 성실히 공부하면 누구나 다 합격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하나, 정년퇴직이나 명예퇴직 후 다른 직장을 적극적으로 구해 보라고 한다. 한두 번 시도하다가 포기하지 말고 40번, 50번 도전하면 분명히 길이 열린다는 것이 권씨의 조언이다. 국가나 지자체 차원에서 재취업에 많은 노력을 하기 때문에 찾아보면 기회가 많다고 힘주어 말한다.

권호진씨 역시 퇴직 당시에는 아무런 준비도 돼 있지 않았다. 갑자기 맞닥뜨린 은퇴 후 2막의 인생 앞에서 허둥대고 좌절도 많이 했다. 그후 10년이 지난 현재, 자신만의 분명한 ‘은퇴 후 행복한 인생 비결’에 대한 노하우를 갖게 됐다.

“한국에서 퇴직은 사형선고나 마찬가지입니다. 은퇴한 사람은 과거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면 자살 충동을 느끼게 됩니다. 은퇴와 동시에 과거의 나를 잊어야 합니다. 그러지 않으면 행복할 수 없어요. 행복은 오는 것이 아니라 찾는 것이니까요. 무엇보다 혼자만의 시간을 잘 보내는 법을 알아야 해요. 친구가 만나주는 것도 한두 번이거든요. 저는 혼자 있는 시간에 서점에서 책도 보고, 먹고 싶은 것 찾아 먹고, 아이쇼핑도 자주 합니다. 강남역 주변의 옷가게 구경도 재밌어요. 지금 입은 바지와 카디건도 제가 산 겁니다. CEO 시절엔 상상도 못한 일들이에요. 선택의 여지가 많다는 건 그만큼 행복의 가능성도 많다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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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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