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미국 워싱턴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2017년 7월 개관하는 이민사특별전시회 한국관의 대표 인물로 빌 김(Bill Kim)이 선정되었다. 현재 샌프란시스코에 거주하는 빌 김(70)은 의류회사 키잔인터내셔널 회장으로 있으며, 한국 이름은 김시왕이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빌 김과 3년여에 걸친 인터뷰를 통해 최근 그를 한국관 대표인물로 선정했다. 빌 김은 이 사실을 외부에 알리지 않다가 지난 9월 초 귀국해 주간조선과의 인터뷰를 통해 이를 언론에 공개했다.

워싱턴DC 내셔널몰에 있는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내년 7월 1일 ‘매니 보이시스, 원 네이션(Many Voices, One Nation)’이라는 주제로 미국 이민사에 대한 특별전을 개최한다. 전시물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산하 국립미국사박물관 건물 2층 1000㎡ 규모의 공간에 설치되고, 2037년 6월 말까지 20년 동안 무료로 관람할 수 있다.

미국 한인 이민사 대표 인물 선정

이번 전시는 미국 근대 이민사를 새롭게 정리한다는 측면에서 의미가 크다. 특히 국립미국사박물관이 유럽 이외의 대륙에서 온 이민자들의 삶을 총체적으로 재조명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기존 이민사는 영국, 프랑스, 아일랜드 등 종교적 이유로 이민을 온 초기 개척자 위주였다. 하지만 지난 100년간 아시아, 남미, 아프리카 대륙에서 온 이민자가 급증함에 따라 이들을 현대 이민사에 편입하기 위한 작업을 지난 5년간 진행해왔다. 한인 이민사는 재미동포사회는 물론 미국을 찾는 관광객들에게 한국을 알리는 소중한 자료가 될 것으로 예상된다.

빌 김은 어떻게 한국관의 대표인물로 선정되었을까.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2013년부터 3년 동안 미국으로 이민 온 전 세계 사람들 가운데 성공한 인물을 선정해 이들이 소장한 옛 자료를 수집하는 동시에 인터뷰를 별도로 진행해왔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1846년 영국 과학자 제임스 스미스슨의 기부금으로 설립된 미국의 국립 박물관이다. 이민사 특별전시가 열리게 될 미국사박물관을 비롯해 우리에게 잘 알려진 자연사박물관, 항공우주박물관, 동물원 등 19개의 기관을 가진 세계 최대 규모의 종합박물관이다.

빌 김은 이민 초창기에 가져온 한복, 밥솥, 자개 밥상, 밥그릇, 숟가락, 영한사전, 영어문법책, 이민 초창기 사진, 고향 사진(경북 안동) 등 총 48점의 소장품을 박물관 측에 제공했다. 이와 함께 박물관 측은 모두 6차례에 걸쳐 빌 김과 아내 메리 김(이명순), 그리고 자녀들에 대한 인터뷰를 진행했다. 이명순씨의 본적은 북한 평양이다. 박물관 측은 빌 김의 회사인 키잔인터내셔널(Kizan International)을 방문해 그가 1978년 처음으로 제작한 남성용 바지도 소장품으로 기증받았다. 빌 김이 제공한 소장품과 인터뷰 자료는 모두 한국 이민사를 소개하는 섹션에 전시될 예정이다.

이번 전시에는 빌 김 이외에도 독일계 게르트루드 보일 콜럼비아 스포츠 회장, 중국계 잔 시에 스타즈 엔터테인먼트 그룹 창업자, 팔레스타인계 엘리 하라리 샌디스크 창업자, 칠레계 주앙 파블로 카펠로 P.A.그룹 창업자 등 미국에서 성공가도를 달리는 이민자 30여명이 포함됐다. 이들은 빌 김처럼 각국 이민자의 삶을 재조명하는 대표 사례로 소개된다.

기자는 지난 9월 2일 추석을 앞두고 고향 방문차 한국을 찾은 빌 김을 서울시내 한 호텔에서 인터뷰했다. 그는 “한국 언론과 갖는 첫 인터뷰”라면서 입을 열었다.

“초기 이민자 가운데 고생하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들이 걸어온 길을 조명하는 데 내가 대표 사례로 선정된 건 엄청난 영광입니다. 나보다 고생도 많이 하고 성공한 사람이 꽤 있는데, 스미스소니언에서 왜 나를 한국 이민을 대표하는 사람으로 선정했는지 아직 모르겠어요. 스미스소니언 측에 물어봤지만 선정 기준은 말해주지 않습디다.”

그의 말처럼 빌 김은 국내에서 무명(無名)에 가까운 인사다. 그가 살고 있는 샌프란시스코를 벗어나면 재미동포사회에서도 실제로 그는 많이 알려지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가 한인 이민사를 대표할 인물로 선정된 이유는 무엇일까. 그가 걸어온 삶에서 몇 가지 단서를 찾을 수 있다.

먼저, 빌 김은 미국 본토에서 공식 이민을 재개한 1965년 전후 미국 땅을 밟은 1세대 이민자로 분류된다. 미국은 1900년대 초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의 이민을 받아들였지만 2차 세계대전을 전후한 시기에는 공식 이민을 막았다. 그러다 대통령인 린든 B. 존슨 대통령이 취임하고 나서 이민법이 개정됨에 따라 1965년부터 다른 대륙의 이민자를 다시 받아들였다.

1968년 김시왕과 이명순은 LA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1968년 김시왕과 이명순은 LA에서 결혼식을 치렀다.

50달러 들고 떠난 아메리칸 드림

“시왕아, 이제 가뿌면 어예댈똥 모르께네 단도리 잘하고 살아라.”

1964년 6월 16일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김시왕의 어머니는 억센 안동 사투리로 아들에게 작별인사를 건넸다. 어머니는 다시는 아들을 만나지 못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 때문에 서울 안암동 집에서 나와 한강대교를 건너 김포국제공항으로 향하는 내내 눈물을 흘렸다. 어미는 로스앤젤레스(나성)로 떠나게 될 열여덟 살의 아들을 보며, 지독한 가난을 원망했다.

김시왕은 1945년 경북 안동에서 태어났으나 1961년 서울로 이사를 왔다. 서울 안암동에서 김포공항으로 가는 길은 매우 복잡했다. 먼저 동네에서 버스를 타고 한강 유일의 다리(한강대교)를 통과해 영등포에 도착한다. 영등포에서 다시 버스를 갈아타고 1시간가량 흙먼지길을 달려야 공항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공항 규모도 인천공항에 비교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초라했다. 말이 국제공항이지 청사는 2층 양옥집보다 조금 큰 규모의 건물이었다. 활주로 한 본(本)을 제외하면 주위에는 온통 논밭뿐이었다.

출국장을 나설 때 김시왕과 부모는 때이른 더위로 흐르는 땀과 눈물로 범벅이 됐다. 청사에서 수속을 밟고 비행기가 대기하고 있는 곳까지 아스팔트 위를 걸어가면서, 김시왕은 차마 뒤를 돌아다볼 수가 없었다. 부모에게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1964년은 국적 항공기가 거의 없던 시절. 김시왕은 대만 국적의 비행기를 타고 일본 도쿄에 도착한 후 그곳에서 다시 팬암(Panam)에어라인으로 갈아타고 하와이로 갔다. 프로펠러형 비행기는 장시간 비행이 불가능해 중간 기착지인 하와이에서 급유를 하고 미국 서부의 LA로 향했다. 김시왕은 그때를 회상하며 이렇게 말했다.

“정말 오래 걸렸습니다. 미국 가는 길이 멀긴 멀구나 하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국 직항로는 당시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시절이었습니다.”

18세에 미국행(行)을 선택한 김시왕에게는 50달러와 2년 전 먼저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 친형의 주소지만이 들려 있었다. 1964년은 지방에서 서울 가는 길도 멀기만 했던 시절이다. 안동 토박이인 그의 부모는 서울로 상경한 지 3년 만에 두 아들을 미국으로 떠나보냈다. 김시왕이 미국 이민을 선택한 건 가난을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LA공항에는 형 김시면이 입국장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야자수와 뻥 뚫린 고속도로를 보고 미국 땅에 도착한 것을 실감했다.

“형이 픽업차를 구해와 함께 타고 가다가, 그해 개통된 산타모니카 프리웨이(고속도로)에 올라탔습니다. 나는 미국에 자동차가 많아 광장처럼 큰 주차장을 만들어놓은 걸로 착각했습니다.”

김시왕이 경북 안동에서 보낸 유년기와 청소년기인 1950~1960년대 한국은 보릿고개가 있던 초근목피(草根木皮)의 빈궁한 시대. 농사지을 땅이 없던 지방 사람들은 먹고살기 위해 서울행을 감행하던 시절이다. 청계천 판자촌은 이런 사람들로 인해 형성됐다. 김시왕의 가족도 그랬다. 농사일밖에는 할 줄 아는 게 없던 부모는 막상 서울에 올라왔지만 막막했다. 부모는 온갖 궂은일을 다 하며 겨우 5남1녀의 입에 풀칠을 하는 정도였다. 살림살이는 갈수록 나빠졌다. “제가 서울 경동고등학교를 다닐 때 밴또(도시락)를 싸갖고 간 날이 거의 없어요. 밴또 들고 학교 오는 친구는 내용물과 상관없이 모두 부자로 취급되던 시절이었으니까요. 공부보다 허기를 채우는 게 학교 생활의 가장 큰 숙제였는데, 그래도 자녀 한번 잘 키워보겠노라며 학교를 보낸 부모님이 대단하셨다는 생각이 듭니다.”

김시왕의 큰형은 먼저 미국 유학을 핑계로 이민 길에 올랐다. 미국 이민은 당시 한국 사회에서 상상하기 힘든 일종의 ‘도박’이었다. 1961년 서울로 이사를 온 이듬해, 즉 그의 형이 고등학교를 졸업한 직후였다. 당시 미국은 외국인의 이민을 수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이렇게 입국한 유학생은 나중에 대부분 현지에 정착했다. “경제적으로 어려웠다는 말로는 다 표현이 안 될 정도로 힘든 시절이었어요. 큰형은 홀홀단신으로 1962년 미국으로 떠났습니다. 그리고 2년 뒤 저도 ‘아메리칸 드림’을 찾아 나성으로 떠나는데, 두려움에 떨었던 기억이 납니다.”

미국 이민 생활은 결코 녹록지 않았다. 이민자는 대부분 그랬듯이 김시왕은 밑바닥부터 시작했다. 미국 땅을 밟은 지 일주일 만에 그는 일자리를 얻었다. 첫 직장은 우산공장. 우산의 뼈대인 철심에 페인트칠을 하는 일을 맡았다.

“아! 정말, 그때 생각하면 지금도 눈물이 납니다. 그야말로 중노동이었죠. 강철을 손으로 집어 페인트 통에 넣었다 빼 선반에 걸어 놓는 단순 작업이었습니다. 그 다음 직장은 철판 자르는 공장이었어요. 나중에는 접시닦이도 하고 가게 점원 생활도 했습니다. 그렇게 일하고도 손에 들어오는 돈은 많지 않았어요. 형과 나는 오히려 50달러, 100달러씩 모아 부모님께 보냈습니다.”

김시왕이 미국 LA에 도착했을 당시 이곳에는 총 2000여명의 한인들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한식당 두 곳과 교회 세 곳이 한인 사회의 중심 역할을 했다.

빌 김이 스미스소니언에 전달한 소장품들. 이민 초창기에 가져간 한복과 밥상, 그리고 영문법책. 밥상과 식기류는 이명순의 모친이 결혼 전에 딸에게 선물한 것이다.
빌 김이 스미스소니언에 전달한 소장품들. 이민 초창기에 가져간 한복과 밥상, 그리고 영문법책. 밥상과 식기류는 이명순의 모친이 결혼 전에 딸에게 선물한 것이다.

1964년 랭귀지스쿨서 운명을 만나다

그러면서도 김시왕은 공부를 시작했다. LA의 한 대학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랭귀지스쿨(영어학교)에 들어갔다. 주경야독이라 하루 평균 4~5시간밖에 잘 수가 없었다. 하지만 배움을 통한 신분상승의 의지가 그를 채찍질했다. 김시왕의 말이다. “그냥 막노동만 하면서 불법체류자로 전락할 수는 없었습니다. 그래서 영어를 배우고 대학에도 진학하기 위해 더 열심히 일했습니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일하고 공부했습니다.”

퇴근 후 야간에 참여하는 랭귀지스쿨에서 김시왕은 평생 인연을 만났다. 그의 반려자인 이명순도 랭귀지스쿨 수강생이었다. 이명순은 김시왕과 같은 해인 1964년에 미국 유학을 왔다. 1956년 유학생 신분으로 미국에 이민을 온 오빠가 있어 선뜻 유학을 결심하고 왔지만 그가 미국에 도착했을 때 그의 오빠는 건강이 좋지 않아 의지할 처지가 못 됐다. 이명순은 스스로 독립해야 했다. 이명순은 낮에는 조립공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영어를 배우러 학교에 왔다. 김시왕은 이렇게 회고했다.

“그때 이민 온 사람들은 서로 의지할 곳이 없었어요. 먼저 와 있는 형제들도 고달프기는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몸으로 때워 하루를 살아야 각자 먹고살 정도였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한국에서 유학 온 아내를 만난 건 제게 정신적으로 큰 도움이 됐습니다. 이겨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더 강해졌습니다.”

김시왕은 미국에 온 지 4년 만에 자신보다 한 살 위인 이명순과 결혼했다. 그때 김시왕은 스물세 살이었다. 영어에 말문이 트이기 시작한 김시왕은 공장일을 그만두고 1967년부터 세일즈맨으로 변신했다. 얼마 뒤에는 당시 인기를 끌던 가발업에 뛰어들어 다운타운의 미용실과 마트 주변에서 사람들에게 가발을 판매하기 시작했다. 소심한 성격의 빌 김은 가족을 먹여살리기 위해 스스로 변신하지 않을 수 없었다. “대학에 다니고 있을 때인데, 결혼을 하고 나서는 더 이상 학교를 다닐 수 없었습니다. 결혼 직후부터 매년 식구를 하나씩 늘렸는데, 그러다 보니 연년생 자녀가 셋이나 됐습니다. 37개월 만에 애 셋을 만든 거죠.” 사실 김시왕은 F1비자로 대학을 다닐 때 베트남전 우선 징용 대상자였다. 그것도 최우선 징집 순위인 ‘1A’를 받아 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아이가 생기면서 징집 순위가 후순위로 바뀌었고 다행히 베트남전에 징병되지 않았다.

1972년 김시왕은 거주지를 LA에서 샌프란시스코로 옮기고 직접 가발사업을 시작했다. 이때 만든 회사가 키잔인터내셔널이다. 공교롭게도 그가 가발사업을 시작할 즈음 가발업 자체가 사양길을 걸었다. 이때가 김시왕 부부가 미국 생활에서 가장 어려웠던 시기였다. 집에는 갓 태어난 아이들이 줄줄이 있는 데다 부인은 양육 때문에 도저히 일을 할 수 없었다. 김시왕은 매일 “만약 여기서 실패하면 퇴로가 없다”고 스스로 되뇌었다. “궁하면 통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대학을 중간에 그만두고 시작한 가발사업이 내리막길을 걸었죠. 그때 많이 고민했습니다. 뭔가 미래를 내다보고 할 수 있는 장사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죠. 그리고 시작한 게 의류업이었습니다.”

김시왕은 1976년부터 바지를 만들어 팔기 시작했다. 디자인을 전공한 적이 없는 그에게 섬유업은 큰 도전이었다. 그는 철저하게 통제 가능한 규모부터 시작해 한걸음씩 나아가는 단계적 전략을 세웠다. 은행에서 돈을 빌리는 것도 최소화했다. 그게 그의 철학이자 사업 성공의 비결이었다.

생산은 인건비가 저렴한 한국에 하청을 주고 주문자상표부착(OEM) 방식으로 바지를 만들어 미국 전역에 공급하기 시작했다. 당시 김시왕이 바지 생산을 주문한 하청업체 중 일부는 한국 굴지의 기업으로 성장했다. “대우실업, 삼성물산, 태광물산 등의 회사에 바지 생산을 맡겼습니다. 우리가 필요한 물량의 80%를 한국에서 만들었고 그걸 가져와 팔았습니다. 그러다가 1988년 올림픽 이후 원가와 인건비가 올라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겼습니다. 제가 10년 이상 한국 섬유산업 성장에 나름 기여했다고 자부하는 대목입니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키잔인터내셔널 본사 창고에 선 빌 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키잔인터내셔널 본사 창고에 선 빌 김.

10명 중 2명은 빌 김의 바지를 입는다

빌 김의 회사는 미국에서 청바지를 제외한 남성바지시장의 20%가량을 점유하고 있다. 미국 내 주요 백화점과 쇼핑몰에는 키잔인터내셔널이 기획하고 만든 상품들이 불티나게 팔린다. 빌 김의 회사는 또 루이스 라파엘이라는 남성용 자체 브랜드도 갖고 있다. 연간 1000만장의 바지를 미국 시장에 유통시키는 섬유업계에 큰손이다. 한 해 매출은 1억5000만달러 안팎. 빌이 100%의 지분을 소유한 키잔인터내셔널은 43년 동안 흑자를 낸 진기록을 갖고 있다. 1990년 단 한 차례 적자가 났던 이유는 금융파동을 예측하지 못해 재고가 쌓였기 때문이다. 그가 이처럼 기업가로서 탄탄하게 성장해온 것도 스미스소니언이 그를 한인 이민자의 대표 사례로 꼽은 이유 중 하나이다.

“키잔인터내셔널은 빚이 단 1센트(cent)도 없는 기업입니다. 적자가 난 적이 없으니 당연한 얘기일 겁니다. 그동안 기업공개(IPO)를 하자는 제안이 많았는데,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세계적인 섬유기업이 됐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컨트롤할 수 없는 길은 아예 쳐다보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지금 회사는 기업공개를 한 곳들보다 더 투명해요. 이제는 제가 없어도 회사가 잘 굴러갑니다.”

키잔인터내셔널이 장수기업이 된 비결은 그의 오랜 사업 노하우에 있다. 회사는 매장에서 어떤 종류의 바지가 팔리는지 실시간으로 파악하는 시스템을 구축했고 이걸 생산공장에 곧바로 연결해 유통에 소요되는 시간을 획기적으로 줄였다. “우리 회사는 공장도 없고 매장도 없습니다. 공장은 해외에, 판매는 백화점 등에서 합니다. 그 중간에서 판매에 대한 데이터를 받아 공장과 유기적으로 움직일 수 있도록 시스템을 만들었죠. 이런 걸 구축하는 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리기 때문에 새로 시작하는 기업이 따라올 수 없습니다.”

빌 김은 사업이 안정적 상태로 진입한 1980년대 말부터 지역사회를 위해 다양한 활동을 시작했다. 이 부분도 스미스소니언에서 빌 김을 한인 이민자 대표로 선정한 또 다른 배경이다. 그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아시안 아트뮤지엄의 시티커미셔너(최고책임자)로 18년간 무보수로 일했다. 그리고 2006년에는 아시아 각국의 빈곤층을 돕는 ‘기부투아시아(Give2Asia)’ 재단의 이사장을 맡아 4년간 총 3억달러 규모의 기금을 마련하기도 했다. 그의 아내 또한 코리안 아메리칸 커뮤니티 파운데이션(KACF)의 이사로 활동하며 한국계 노년 이민자와 어린이를 돕는 일을 해왔다.

1986년 스탠퍼드대학에서 개설돼 있던 한국어과가 재정난을 이유로 폐지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자 부부는 자택에서 기금 모금 행사를 열어 8만5000달러를 모았다. 이를 스탠퍼드대학에 지원함으로써 한국어과가 지금도 명맥을 유지하게 됐다. 빌 김 부부의 활동은 샌프란시스코 한인사회에 차츰 알려지기 시작했다. 아시안 아트뮤지엄의 자원봉사자로 오랫동안 활동하기도 한 메리 김은 노무현 정부 때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빌 김 역시 박근혜 대통령과 전두환 전 대통령에게서 각각 국민훈장 모란장을 받았다. 메리 김의 말이다. “봉사라는 게 상을 받자고 하는 일이 아니기 때문에 한국 정부에서 상을 준다는 걸 극구 사양했다. 하지만 이미 상장이 미국까지 도달했다고 영사관에서 연락이 와 받게 됐다.”

최근 스미스소니언 홈페이지에 게재된 이민사특별전시회 홍보 화면.
최근 스미스소니언 홈페이지에 게재된 이민사특별전시회 홍보 화면.

한인, 정치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야

빌 김은 최근 코리안 아메리칸들의 모임인 한미위원회(CKA)에 참여하며 한인의 위상 제고를 위한 지원에 앞장서고 있다.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은 CKA의 회장을 맡고 있다. 한국계 2~3세들은 이제 미국 주류사회에 들어가 목소리를 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한인은 미국 사회에서 경제적 지위가 상당히 올라갔습니다. 의사, 변호사들이 굉장히 많아요. 그런데 경제적 위상과 달리 정치권에서 목소리를 내는 사람들이 없어요. 미국 사회에서 한인의 입지가 중국이나 일본에 밀리는 건 다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공화당이든 민주당이든 여러 명의 한국계 상하원 의원이 배출됐으면 좋겠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CKA와 같은 단체에 적극 참여해 지원해 나갈 생각입니다.”

빌 김은 요즘 새삼 한국의 위상을 실감한다고 했다. 그는 타국에서 대한민국이 성장하는 과정을 지켜보며 우리 민족의 장점과 단점을 나름 객관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한국을 떠난 뒤 8년 만에 서울을 방문했을 때 한국인은 근면성과 잘살아보겠다는 의욕이 넘쳐흘렀습니다.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88서울올림픽의 성공적 개최는 가장 인상적이었습니다. 1990년대의 혼란을 거쳐 2000년대 들어 경제적으로 선진국에 도달했습니다. 1960년대에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던 한국이 기적과도 같은 성장을 일궜습니다.”

그는 최근 한국의 젊은이들 사이에서 퍼지고 있는 ‘헬(hell)조선’ 풍조에 “공감할 수 없다”고 했다. “조국은 어머니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꿀 수 없는 어쩌면 영원한 것입니다. 오늘날 대한민국은 위대한 발전을 일궈내 전 세계의 부러움을 사고 있다는 걸 알아야 합니다. 젊은이들이 당장의 어려움보다 나와 국가의 미래를 생각하며 멀리 보고 행동했으면 좋겠습니다.”

그가 미국 땅을 밟은 지 52년이 흘렀다. 어느덧 그의 나이도 칠순이다. 김시왕은 미국 서부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가 됐고, 이제는 생업의 현장에서 완전히 손을 뗄 날이 머지않았다. “4년 정도 더 일할 생각입니다. 그 후에는 회사를 팔아 미국 사회에 도움의 손길이 필요한 곳에 쓸 계획입니다.”

그에게 회사의 상속 문제에 대해 질문을 하자 이렇게 대답했다. “큰아들은 싱가포르에서 나보다 더 많은 돈을 만지는 펀드레이징을 합니다. 큰딸은 LA에서 자신이 좋아하는 큐레이터를 하고 둘째딸은 초등학교 교사로 일하며 보람을 느끼고 삽니다. 각자가 자기 길을 가고 있어요. 회사를 물려받을 생각도 없고 나 또한 그럴 계획이 없습니다.”

김대현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