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으로의 한인 이주는 19세기 말 미국이 조선과 정치·경제적으로 관련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노동력 부족을 메우기 위해 중국과 일본에 이어 한국에서도 노동자를 구하자 1903`~1905년에 7000여명의 한인 노동자들이 하와이로 건너갔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미국은 한반도에 군사적으로 개입하였고 미군이 주둔하면서 이들과 결혼하는 한인여성이 늘어났다. 이들 여성은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건너가서 가족초청의 토대를 마련했다.

미국의 대중문화가 한국에 밀려들면서 한국인은 미국을 동경하게 되었고 1960~1970년대 신중산층을 중심으로 ‘이민 열풍’이 불었다. 1988년 서울올림픽 이후 한국의 국제적 위상이 높아지자 미국 이민의 열기는 사그라들었고 오히려 역(逆)이민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현재는 처음부터 영주를 목적으로 이민을 가기보다 학업, 사업, 여행을 목적으로 떠났다가 현지에서 비자를 변경하여 영주권과 시민권을 취득하는 경우가 늘어났다. 미국은 세계 어느 나라보다 한국과 밀접한 외교·경제·문화적 관계를 맺고 있어서 현재 200만명이 넘는 인구를 가진 재미 한인사회는 앞으로도 신규 한인 이민자를 받아들여 성장할 것으로 기대된다.

1903~1945

하와이 노동이주와 미국 본토 재이주

미국으로의 한인 이주는 1903년 1월 12일에 102명의 한인들이 하와이 사탕수수 노동자로 호놀룰루에 도착하면서 시작되었다. 1905년까지 7226명의 이주자들이 하와이에 도착했는데 이들의 대부분은 20대의 독신 남성들이었다. 이들과 결혼하기 위해서 1000여명의 한인 여성이 ‘사진결혼’의 형태로 1924년까지 하와이로 건너가서 이민가정을 형성하였다. 노동자와 ‘사진신부’ 외에 초기 한인이주에서 중요한 집단은 유학생이었다. 1910년부터 1940년까지 총 891명의 유학생들이 미국으로 건너가서 자신의 학업뿐만 아니라 해외독립운동을 주도했다.

한인들은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보다 높은 수입을 찾아서 미국 본토의 농장과 광산으로 일자리를 얻어 재이주를 하였다. 샌프란시스코는 미국 본토로 들어가는 관문과 같았고, 이곳을 거쳐 한인들은 캘리포니아의 벼농사와 과수원 농장, 유타·콜로라도·와이오밍의 광산과 철도 공사장, 캘리포니아 북부 태평양 연안지역의 어장에서 노동자로 일을 했다. 그 결과 미국 본토에 1905년 약 50명에 불과했던 한인 수는 1941년에는 1711명으로 증가했다.

노동자, 사진신부, 유학생들로 구성된 미국의 한인사회는 1945년 한국이 광복되기까지 하와이에 6500명 그리고 미국 본토에 3000명가량의 규모였다. 이들은 미국 주류사회로부터 고립된 생활을 했다. 이후 한인사회가 성장하면서 1930년대에 들어서면 이민 1세들은 고령화되고 2세들이 성인이 되면서 한인사회의 세대교체가 본격화되었다.

1세대는 교회와 각종 단체를 중심으로 해외독립운동에 전념했다. 2세대는 미국문화에 동화되면서 친교모임을 통해 화합을 다지는 데 주력하고 지역 정치에 관심을 갖고 참여하면서 미국 사회의 일원으로 편입되어 갔다.

1945~1965

광복과 한국전쟁

광복 후 미국으로의 한인 이주는 주로 국제결혼여성, 입양아, 유학생들에 의해서 이어졌다. 1950년부터 1964년까지 6000명가량의 여성들이 미군의 배우자로서 미국으로 건너갔고, 1950년부터 2000년까지 미군의 부인으로 이민 온 한인 여성의 수는 10만명에 달했다. 1950년대에는 이들이 전체 한국인 이민자의 36%를 차지했고, 1960년대에는 42%를 차지할 정도로 중요한 이민자 집단이었다.

한국전쟁으로 많은 전쟁고아와 혼혈아들이 생겨나자 한국 정부는 1954년에 해외입양사업을 시작했다. 1950~1960년대에는 고아들이 주로 입양되었으나 1970년대는 미혼모 아이들이 고아들보다 많이 입양되었다. 1954년 이후 2002년 말까지 해외로 입양된 아이들은 15만명으로 추산되고, 이 중 약 10만명이 미국 가정에 입양된 것으로 알려졌다.

광복 후 1965년까지 6000명가량의 유학생들이 학위 취득 후 고국에서 누릴 사적 권위와 출세에 대한 기대를 갖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하지만 적지 않은 수의 학생들이 학위를 취득한 후 미국에 눌러앉거나 또는 끝내 학위를 취득하지 못하고 미국에 정착하였다. 이들은 미군과 결혼한 한인 여성들과 마찬가지로 1965년 미국의 이민 문호가 개방되었을 때 가족들을 초청할 수 있는 연쇄이민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5~1992

미국 이민법 개정과 신(新)이민

미국 정부가 1965년에 이전의 인종차별적이었던 이민법을 개정하면서 미국으로의 한인 이주는 급격히 증가했다. 미국으로의 한인 이민은 1970년 초부터 본궤도에 올라서 연 3만명가량의 한인들이 미국으로 이민을 갔다. 한인 이민의 정점을 이룬 1985년과 1987년 사이에는 연 3만5000명이 이민을 가서 멕시코와 필리핀 다음으로 미국으로 이민을 많이 간 3대 이민국이 되었다. 하지만 한인 이민은 1987년의 3만5849명을 기점으로 해서 줄어들기 시작해 1999년에는 1만2301명만이 이민을 가서 1972년 이후로 최저점을 기록하였다.

1992~현재

4·29 폭동과 이후의 한인사회

한국에서 중산층의 지위를 갖고 있던 한인 이민자들은 미국에서 그에 상응하는 직장을 가질 수 없게 되자 자영업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다지려 하였다. 제한된 자본금과 사업기술 때문에 한인들은 로스앤젤레스의 사우스센트럴이나 시카고의 사우스웨스트, 뉴욕의 브루클린과 같은 저소득 소수민족 동네에서 장사를 시작하였다. 하지만 이 지역의 흑인 주민들이 한인 상인들을 흑인 지역에서 경제적 기여는 하지 않고 자원만 빼앗아 가는 부재 소유자(absentee owners)로 보면서 갈등이 시작되었다. 여기에 두 집단 간의 편견, 언어장벽, 문화차이, 그리고 흑인 고객들의 잦은 들치기 행위들과 같은 개인적이고 상황적인 요인들이 인종갈등으로 확대되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특히 소수의 흑인 민족주의자들에 의해 한인업소를 대상으로 하는 불매운동으로 이어져 인종갈등의 차원으로까지 발전하게 되었다.

1991년에 로스앤젤레스의 흑인 밀집지역인 사우스센트럴에서 발생한 두 번의 과실치사 사건은 위태위태했던 한인·흑인 관계를 첨예한 갈등 상황으로 몰아갔다. 이런 상황에서 1992년 3월 로드니 킹이라는 흑인 남성이 경찰의 정지명령을 무시하고 질주하다 검거된 후 4명의 백인 경찰들에게 무자비하게 구타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그러나 백인 경찰들이 무죄로 석방되자 격분한 흑인들이 로스앤젤레스 사우스센트럴에서 폭동을 일으켰다. 4월 29일에 시작되어 5월 4일까지 지속된 폭동 기간에 52명이 사망하고 2238명이 부상당했다. 사망자 중에는 폭도로 오인받고 살해된 한인 청년도 있다. 방화 또는 약탈 피해를 당한 전체 4500여개의 업소 중에서 한인 소유는 2300여개였고, 전체 10억달러의 재산피해 중 한인이 당한 것이 4억달러에 달했다.

4·29폭동은 한인들에게 엄청난 재산피해와 심리적 외상을 입혔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의 정치의식과 정치참여를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정치력 없이 경제력만으로는 언제든지 다시 당할 수 있다는 것과 소수민족으로 미국에서 살아가기 위해서는 다른 소수민족들과 연대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갈등관리 차원에서 평상시 흑인 지역사회에 기부금을 더 내고 영향력 있는 흑인 지도자 및 단체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늘려갔다.

4·29폭동이 한인사회에 미친 중요한 영향 중의 하나는 1.5세와 2세가 민족의식을 갖게 됐고 한인사회에 참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부모세대가 피해를 당해도 언어 문제와 정치력 부재로 자신들을 방어하지 못하는 것을 목격하고서 이들은 한인사회의 대변자로서, 그리고 한인사회와 흑인사회, 백인주류사회를 연결하는 교량 역할을 했다. 대표적인 예가 1.5세 변호사인 앤젤라 오가 ABC 방송국의 심야 뉴스 프로그램인 ‘나이트 라인’에 출연해 4·29폭동을 한인들이 유발했다는 테드 커플의 발언을 논리적으로 반박하고 사과를 받아낸 것이다.

1903년 1월 12일 102명의 한인 이주노동자들이 하와이 호놀룰루항에 입항한 이후 113년이 지난 오늘 200만명이 넘은 한인들은 미국 사회의 모범적인 시민으로 거듭났다.

윤인진 고려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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