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연사로 참여한 조선총독부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 포스터의 일부.
후세 다쓰지 변호사가 연사로 참여한 조선총독부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 포스터의 일부.

지난 9월 13일은 ‘일본판 쉰들러’라고 불리는 후세 다쓰지(布施辰治·1880 ~1953) 변호사의 사망 63주기다. 이에 맞춰 일제강점기 때인 1927년 10월, 후세 변호사가 내한했을 때 조선총독부의 언론집회 폭압을 강력 규탄하는 선전포스터가 발견됐다. 1927년 10월 13일자 조선일보에 일부가 노출된 이 격문에는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라는 제목과 함께 ‘시일(일시) 10월 13일 오후 7시’와 ‘장소 종로청년회 급(及·및) 공회당 양처’ 등이 명시됐다. ‘하자! 오라!! 드르라(들어라)!!!’란 말과 ‘입장 무료’란 말도 적혔다. 조선일보는 이날 신문 지면 아래위 12단 가운데 우측 상단의 2단을 할애해 사진기사 형식으로 실었는데, ‘보라! 이 조희(종이의 옛말)를’이란 사진설명과 함께 ‘압박탄핵연설포스터’란 부연설명을 넣었다. 이 기사는 이례적으로 전체 포스터가 아닌 일부만 노출하는 식으로 실렸는데, 이는 당시 총독부의 기사검열 등을 교묘히 피하기 위한 ‘편집의 묘’로 풀이된다.

포스터에서 총독부 탄핵 대연설회 장소로 적시된 ‘종로청년회 및(급) 공회당’은 서울 종로에 있는 서울기독교청년회관(서울 YMCA회관)과 그 강당을 말한다. 당시 일제의 종로경찰서가 기독교청년회관 바로 옆 지금의 장안빌딩 자리에 있었는데, 종로경찰서 바로 옆에서 총독부를 정면 규탄하는 국제적 집회를 연 것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이 집회를 알리기 위해 이날 신문 지면 2면에 해당 포스터를 찍은 사진기사를 게재한 것 외에도 관련 소식을 반복적으로 교묘히 노출시켰다. 사진기사 바로 아래에는 ‘압박탄핵연설포스터’의 주 연사인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공산당사건은 언제나 결심될까’란 기명칼럼을 4단 크기로 실었다. 칼럼 바로 아래에는 ‘언론집회폭압탄핵연설회’란 별도 광고가 3단 크기로 실렸다. 전체 신문 지면 12단 가운데 무려 9단을 할애해 사진기사, 기명칼럼, 광고 등을 통해 조선총독부를 규탄하는 집회 소식을 반복적으로 알린 것이다.

이날 조선일보 지면은 일본 변호사들과 조선 변호사들이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폭압정치에 맞서 공동으로 투쟁한 사실을 알려주는 역사적 가치를 갖고 있다는 평가다. 실제 이 포스터와 광고에는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의 주 연사인 후세 다쓰지 외에도 후세 변호사와 함께 인권변호사로 활약한 후루야 사다오(古屋貞雄) 전 일본조선연구소 이사장 등이 이름을 올렸다. 또 ‘조선 민권변호 삼총사’로 이름을 날린 김병로, 허헌, 이창휘를 비롯해 이인, 김태영, 정구영 등 조선인 변호사들도 이름을 실었다. 김병로(김종인 더민주 의원 조부)는 초대 대법원장, 월북한 허헌은 초대 최고인민회의 의장, 이인은 초대 법무장관, 정구영은 초대 민주공화당 총재를 지냈다. 일제강점기 당시 인권변호사로 활약했던 조선과 일본인 변호사들이 일제히 일제의 언론집회 정책 규탄에 나선 것이다.

역사적 가치가 있는 포스터를 발굴한 사람은 정준영 ‘후세 다쓰지 연구모임’ 회장이다. 정준영씨는 1991년부터 지난 25년 동안 후세 다쓰지 연구에만 몰두해온 재야(在野) 사학자다. 2004년 후세 다쓰지에게 추서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 역시 “어찌 일본인에게 건국훈장을 수여할 수 있느냐”는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정씨가 발품을 팔고 다닌 끝에 성사됐다. 서울 서초구에 거주하는 정씨는 지금도 틈만 나면 국립중앙도서관 등을 찾아서 일제 때 발행된 조선일보, 동아일보의 마이크로필름과 조선총독부 관보 등을 살펴보면서 후세 변호사의 흔적을 찾는다. 정준영씨는 “‘탄핵’이란 말은 일반적으로 흔히 쓰는 ‘규탄’이란 단어보다 훨씬 강력한 말”이라며 “탄핵이란 말이 당시 조선일보에 게재됐다는 것은 대단한 사건”이라고 말했다.

역설적으로 이번에 발견된 사료는 당시 식민지 조선에서의 조선총독부 문화통치의 일면을 보여준다는 평가다. 일제는 1919년 3·1독립운동 이후 조선인들의 반발을 누그러뜨릴 목적으로 헌병 경찰을 동원한 ‘무단통치’에서 채찍과 당근을 병행한 ‘문화통치’로 정책적 전환을 단행했다. 특히 일본 해군대장 출신으로 1919년 9월 제3대 조선총독으로 부임한 사이토 마코토(齋藤實)는 문화통치를 표방하며 식민지 조선에서의 언론집회를 상당 부분 허용했다. 사이토 마코토의 유화정책을 계기로 1920년 조선일보·동아일보 등의 민족지가 연이어 창간됐고, 이러한 정책기조는 사이토 총독의 재임 기간 내내 계속됐다. 이 같은 유화정책은 1936년 일본 육군 황도파(皇道派) 청년 장교들이 일으킨 2·26쿠데타 때 사이토 마코토가 피살되는 빌미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과 함께 일본의 조선 통치 방침이 ‘민족말살통치’로 변하면서 이 같은 ‘발칙한(?)’ 기사와 칼럼, 광고는 더 이상 찾아볼 수 없게 됐다. 1940년 중일전쟁이 확대되면서 조선일보·동아일보 등 민족지도 일제히 강제 폐간 수순을 밟았다.

정준영씨는 “이번 포스터 발굴을 계기로 일본과 조선인 변호사들이 공동으로 조선총독부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를 개최한 곳에 조그만 기념비라도 세워 역사적으로 기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당시 언론집회폭압탄핵 대연설회를 개최했던 지금의 서울 종로구 YMCA 회관 앞이나, 중구 덕수궁길에 있는 서울시립미술관 앞이 최적지”라는 것이 정씨의 주장이다. 서울시립미술관은 일제 때 경성지방법원이 있던 곳으로 광복 후에는 대법원 청사로 활용됐다. 초대 대법원장인 김병로가 머물렀던 곳으로, 후세 다쓰지 변호사와 김병로 등 조선인 변호사들이 함께 건물 계단을 걸어 내려오며 웃는 당시 사진자료도 남아 있다.

한편 정씨에 따르면, 일본 미야기현 이시노마키(石卷)에 있는 후세 변호사의 생가와 기념관은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의 여파로 무너져 여태까지 복구가 안 돼 안타까움을 전한다. 후세 변호사는 1880년 일본 동해안에 있는 해안가 마을 이시노마키에서 태어났다. 2011년 3·11 동일본 대지진 때 쓰나미가 덮쳐 피해가 컸던 미야기현 현청 소재지 센다이(仙台)에서 차로 1시간가량 떨어진 곳이다. 정준영씨는 “후세 다쓰지 변호사의 생가와 기념관이 지진으로 허물어졌는데도 관심을 가지는 사람이 없다”며 “안타까울 따름으로 생가 복원 운동이라도 벌이고 싶은 심정”이라고 말했다.

후세 다쓰지는 누구?

후세 다쓰지는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인 독립운동가들을 변호한 일본인 인권변호사다. 1919년 재일 조선인 유학생들이 주도한 2·8 독립선언의 주역인 최팔용·송계백 등의 변호를 맡으면서 조선과 인연을 맺었다. 이후 1923년 일본인 연인 가네코 후미코(金子文子)와 함께 당시 일본 황자 히로히토의 혼례식 때 암살을 기도한 박열 초대 재일 한인 거류민 단장, 1924년 일본 도쿄 황궁의 입구인 니주바시(二重橋)에 폭탄을 투척한 의열단원 김지섭 등의 변론을 맡았다. 1945년 일제 패망과 조선 독립 후에는 ‘조선건국헌법초안’을 작성하는 등 조선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던 독특한 일본인이다. 이에 김대중 정부 때인 2004년 일본인 가운데 최초로 ‘대한민국 건국훈장 애족장’이 추서됐다. ‘일본판 쉰들러’라고 불리는데 국내에서는 재야 사학자 정준영씨에 의해 그의 생애가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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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훈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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