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신스(since) 1916’, 벌써 100년이다. 한국의 양복 역사와 함께하고 있는 ‘종로양복점’ 이야기다. 재건축과 재개발 바람에 하루가 다르게 하늘을 향해 30~40층씩 새롭게 솟아오르고 있는 현대식 빌딩들. 그리고 그 아래로 족히 40~50년은 됐을 법한 회색빛의 낡고 허름한 2~5층짜리 오래된 건물들이 빼곡히 들어찬 을지로3가 일대. 새로운 것과 낡은 것이 묘하게 뒤섞여 있는 서울 한복판 을지로3가에 올해 100년이 된 노포(老鋪), 종로양복점이 있다.

지난 9월 초, 지하철 2호선 을지로3가역 근처 한 건물 6층, 23㎡(약 7평)짜리 작은 공간에 자리 잡고 있는 종로양복점을 찾았다. 자그마한 가게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3대째 종로양복점을 이어오고 있는 이경주(71)씨가 “생각보다 작지요”라며 웃으면서 기자를 맞았다.

100년 동안 단 한 번도 ‘종로양복점’이라는 이름을 바꿔 본 적이 없는 이곳. 재미있게도 종로양복점이 현재 둥지를 틀고 있는 곳은 종로가 아니다. 청계천을 경계로 종로의 바로 옆 동네인 중구 저동이다. 흔히 을지로3가로 불리는 곳이다.

이경주씨는 “종로양복점이 종로를 떠나 지금 자리로 옮겨온 건 2011년”이라며 “종로에 재개발 바람이 불며 양복점이 있던 종로 신문로 건물이 헐렸고, 그로 인해 5년 전 종로가 아닌 이곳에 가게를 내게 됐다”고 했다. 그는 “물론 손님들의 치수를 재고 양복감을 소개하는 가게는 이곳이지만 6명의 재단사와 재봉사들이 일하는 종로양복점 공장은 여전히 종로에 있다”며 “종로양복점의 맥이 지금도 종로에서 이어지고 있다”고 했다.

종로양복점과 관련해 한국인이 만든 최초의 양복점이라는 설이 있다. 종로양복점은 1916년, 이경주씨의 조부인 고 이두용씨가 종로 보신각 옆에 양복점을 내며 시작됐다. 당시 한국에 양복점은 주로 일본인과 중국인이 운영했다. 그런 틈새를 비집고 한국인 이두용씨가 양복점을 열며 한국 양복사의 또 다른 전환점을 찍은 것이다.

일제강점기 한·일 양복 전쟁

1894년 세워진 당시 한국 땅에서 꽤 유명한 양복점이 있었다. 오쿠다양복점이다. 이두용씨는 오쿠다양복점을 통해 처음으로 양복을 만나게 됐다. 가난한 한국 청년 이두용이 이곳에 견습생으로 들어가 양복기술을 익힌 것이다. 청년 이두용은 자신의 손으로 지어내는 양복이 좋았다. 결국 양복기술을 더 배우기 위해 일본으로 향했다.

1912년 도쿄양복상공학교를 졸업하고 2년을 더 일본에 머무르다 1914년 한국으로 돌아왔다. 한국으로 돌아와 다시 2년쯤을 평양의 한 양복점에서 재단사로 일하기도 했다. 그리고 1916년, 그가 서른다섯 살 되던 해 드디어 종로 보신각 인근 한 가게를 빌려 자신의 양복점인 종로양복점을 열었다. 이것이 노포 종로양복점의 시작이다.

이경주씨는 할아버지 이두용씨가 종로에 양복점을 연 이유를 이렇게 설명했다. “저희 집안이 종로 토박이입니다. 누구보다 종로가 편하고 좋았을 겁니다. 또 하나, 그때도 지금처럼 종로가 장사하는 사람들의 중심이었어요. 당시 일본인들이 상권을 쥐고 있던 중심지에서 뭔가 이뤄보고 싶었던 것 같아요. 그게 종로에 양복점을 연 이유였을 겁니다.”

일본인들 틈바구니에서 문을 연 종로양복점은 문을 열자마자 기존 양복점들과 치열하게 경쟁했다. 특히 양복 형태를 띤 당시 학생들 교복을 두고 일본인들과 경쟁을 벌이며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경주씨가 아버지와 삼촌들에게 전해 들은 당시 이야기라며 입을 열었다.

“일제강점기 당시 학생들 교복은 양복과 비슷했어요. 그러니 학생들이라면 당연히 양복집에서 교복을 맞춰야 했지요. 그런데 일본인 선생들이 학생들에게 ‘교복을 반드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양복점에서 맞추라’고 지시한 겁니다. 그런데 한국 학생들이 일본인 선생들의 말을 듣지 않은 거지요. 일본인 선생들이 일본 양복점에서 맞추라고 할수록 한국 사람은 한국인이 하는 양복점에서 교복을 맞춰야 한다는 의식이 강해졌던 거지요. 그런 생각을 가진 한국 학생들이 종로양복점으로 몰려들었지요.”

1930~1940년대 교복 한·일전(戰)을 통해 종로양복점은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 1940년대 서울 종로는 물론 함경남도 함흥에까지 분점을 내며 직원만 100명이 넘을 만큼 번창했었다.

그런 종로양복점을 물려받은 것이 이두용씨의 4남 고 이해주씨다. 일제강점기 보성전문학교 상과(현재 고려대 경영학과)를 나왔을 만큼 그 시대의 엘리트였던 이해주씨.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은행 취업이 결정된 상태, 이두용씨가 아들 이해주씨에게 “네가 가업을 이어줄 수 있겠느냐”는 뜻을 내비쳤다고 한다. 아버지의 권유에 이해주씨는 망설임 없이 은행 취업을 포기했다. 그리고 바로 중국 만주에 있는 조지아백화점의 한 양복집으로 양복기술을 배우기 위해 떠났다.

양복기술도 배우고 종로양복점의 만주 분점까지 꿈꾸며 만주로 향한 것이다. 하지만 1942년 종로양복점 창업주 이두용씨가 고인이 되며 이 꿈은 실현되지 못했다. 이후 1945년 광복과 함께 이해주씨가 만주에서 서울로 돌아왔고,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이어 종로양복점 경영을 시작했다.

종로양복점 창업자 故 이두용
종로양복점 창업자 故 이두용

“손님이 좋아하는 양복이 좋은 양복”

1950년 한국전쟁이 터지자 잠시 종로를 떠나 피란을 갔던 경북 경산에서 종로양복점을 임시로 열며 그 명맥을 잇기도 했다. 그리고 전쟁이 끝나고 다시 종로로 돌아와 종로양복점을 재정비했다. 그렇게 전쟁과 가난이 한국 사회를 괴롭혔던 1950년대를 지나 ‘맞춤 양복의 전성기’라 불리던 1960년대와 1970년대에 종로양복점이 꽃을 피우기도 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정치인과 배우는 물론, 멋 좀 아는 이들이면 종로양복점에서 양복 한 벌쯤은 맞췄을 만큼 장사가 잘되던 시대를 누리기도 했다. 종로양복점을 3대째 이어가고 있는 이경주씨 역시 이 같은 양복 전성기이던 1969년 양복의 세계에 뛰어들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47년 동안 양복을 만들고 있다.

이경주씨는 “원래 양복을 만들 생각이 없었다”며 웃었다. “다른 일을 해보고 싶었어요. 그런데 군 제대 후 취업을 준비하던 중에 아버지가 아프셔서 가게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 벌어졌어요. 그때 제가 아버지 대신 하루 동안 가게를 본 적이 있어요. 그렇게 우연히 하루를 맡아 해본 양복점 일이 나쁘지 않았어요. 치수를 재고, 손님을 맞고 하는 일을 나름 재미있었습니다.”

이경주씨는 “아버지 대신 종로양복점을 맡아 하루 동안 일을 했던 당시가 종로양복점이 50년을 조금 넘겼던 때였다”며 “내 손으로 이 가게를 이어가는 것도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했다. 그렇게 1969년부터 이경주씨는 아버지 이해주씨 밑에서 재단과 봉재는 물론, 양복점 경영까지 꼼꼼하게 배웠다. 이경주씨에게 종로양복점 2대 주인 아버지 이해주씨는 양복에 있어서만큼은 그 누구보다 철저한 사람이라고 했다. 양복을 향한 이해주씨의 열정과 철저함은 종로양복점이 100년을 이어지게 한 힘 중 하나였음을 설명했다.

“아버지는 늘 ‘손님이 좋아하는 양복이 좋은 양복’이라고 하셨지요. ‘손님 마음에 안 드는 옷은 옷이 아니다’란 게 아버지 생각이었습니다. 늘 손님이 우선이었습니다. 손님이 찾아왔는데 주인이 없으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얘기하셨죠. 아주 잠깐이라도 손님이 찾아왔을 때 주인이 없거나, 문이 잠겨 있으면 안 된다고 하셔서 결국 제가 종로양복점을 지키느라 여동생 결혼식에도 못 갔을 정도였으니까요.”

그렇게 11년을 아버지에게서 양복기술과 양복점 경영을 배운 이경주씨. 1980년 드디어 어버지로부터 종로양복점의 열쇠를 넘겨받았다. 그는 그때를 “아버지가 애지중지하시던 곳간 열쇠를 넘겨주셨다”고 표현했다. 그로부터 36년이 지난 올해, 종로양복점이 100년이 됐다.

1916년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문을 연 종로양복점 모습. 출처: 종로양복점
1916년 서울 종로 보신각 옆에 문을 연 종로양복점 모습. 출처: 종로양복점

위기를 이겨내다

일제강점기를 거쳐 한국전쟁의 혼란을 겪었고, 가난했던 1950년대와 1960년대를 지나 1970년대 맞춤양복의 전성기를 경험하기도 했다. 풍요로움이 시작된 1980년대와 1990년대, 그리고 지금에 이르기까지 100년을 이어온 종로양복점. 그 사이 이시영 대한민국 초대 부통령, 김두한씨 등 유명 정치인 단골들이 찾았던 양복이자, 또 유명 배우를 비롯한 서울 멋쟁이들이 한 벌쯤 맞춰 입었던 종로양복점. 그런 종로양복점도 생존을 고민했던 몇 번의 위기가 있었다.

이경주씨는 “일제강점기 때도, 한국 전쟁 때도 종로양복점은 위기였다”고 했다. 1960년대 말 종로 일대에서 벌어진 지하철 1호선 공사로 손님들의 접근을 막아 가게가 고사할 뻔하기도 했고, 1980년대 중반 불어닥친 대기업들이 만든 기성복 파도에 맞춤양복이 설 자리를 잃었던 때도 있었다고 했다.

도심 재개발 바람이 불며 2001년 종로 보신각 근처 종로양복점이 시작됐던 건물을 비워야 하기도 했다. 또 2011년에도 역시 종로 주변 재개발 바람에 10년을 정착했던 종로구 신문로의 두 번째 종로양복점도 비워줘야 했다. 그런 풍파를 견디고 종로양복점이 100년을 이어온 것이다.

이경주씨는 ‘종로양복점의 다음 세대를 누가 이어줄 수 있을지’가 요즘 가장 고민스러운 부분이라고 했다. 이씨는 “화가인 아들이 종로양복점의 다음 주인이 돼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면서도 “하지만 아들이 아직까지 종로양복점을 이어받겠다는 뜻을 보이지 않고 있다”고 했다. 그는 시간이 지나면 1969년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아들 역시 종로양복점의 가치를 알 때가 올 것이라고 했다.

기성복에 밀려 사람들에게서 멀어졌던 맞춤양복 수요가 2010년대 들어서며 독창적이고 자기 것에 대한 욕구가 큰 젊은이들 위주로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게 이경주씨의 설명이다. 인터뷰가 끝나고 가게를 나가려는 기자에게 이경주씨가 인사처럼 이렇게 말했다. “‘오래된 양복집이기보다 양복 잘 만드는 집’으로 기억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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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의 老鋪
조동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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