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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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명원이 지난 9월 2일 설립 2주년을 맞았다. ‘한국의 창의 전사 양성소’ ‘전혀 새로운 미래 학교’ ‘반역자 양성소’ 등의 수식어를 낳은 건명원에 대한 관심이 뜨겁다. 소수정예의 인재들이 건명원식(式) 교육에 뛰어들고 있고, ‘건명원’은 어느덧 하나의 고유 브랜드로 자리 잡아가고 있다. 건명원은 시대의 벽 앞에서 답답함을 느낀 특공대 교수들과 한 자본가가 탄생시킨 독특한 학교다.(주간조선 2393호 2016년 2월 1일자 커버스토리 ‘한국의 스티브 잡스 양성소 건명원 1년’ 참조) 이들이 원하는 건 하나다. 이 시대의 벽을 뚫고 새 시대를 열 뜨거운 인재를 단 한 명이라도 배출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건명원이 말하는 리더란 어떤 사람이며, 이 시대 지식인의 역할은 무엇일까. 건명원 최진석 원장(서강대 철학과 교수)이 건명원 두 번째 생일날에 이에 대한 답을 내놓았다. 주간조선은 지난 1월 ‘건명원 1년’ 심층취재가 인연이 되어 언론으로는 유일하게 초청받았다. 이날 행사에는 오정택 두양문화재단 이사장과 건명원 교수진으로 진덕규(이화여대 정치학 명예교수)·배철현(서울대 종교학)·김대식(카이스트 전자전기공학)·정하웅(카이스트 물리학)·김개천(국민대 공간디자인학)·서동욱(서강대 철학) 교수와 건명원 1·2기생 30여명 등이 함께했다.

건명원은 갑작스럽게 여러 뜻이 모여 시작됐습니다. 뜻은 여럿이었지만 의기투합의 이유는 같았습니다. 시대의 답답함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시대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지금 시대를 건너가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모든 것에 답답함을 느끼고 아직 오지 않은 미래를 끌어당겨야 하는 시점에 와 있습니다. 한 나라가 발전했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시대가 요구하는 문제와 그것을 해결하려는 노력이 일치했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그랬습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광복을 맞은 우리나라가 해결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은 건국이었습니다. 수없이 많은 소란이 있었지만 건국이라는 시대의 요구와 비전을 일치시켜서 결국 해냈습니다. 건국 다음의 비전은 뭘까요? 어느 정도 발전을 이루는 것이죠. 바로 산업화입니다. 산업화가 필요한 시대에 산업화라는 어젠다를 설정하여 추진했고, 수없이 많은 갈등과 분란 속에서도 우리는 해냈습니다. 산업화란 공업화와 도시화를 말합니다. 농촌을 중심으로 했던 농촌경제가 도시를 중심으로 하는 공업경제로 이동하는 것입니다. 이 과정에서는 주도세력이 바뀌어야 합니다. 농업경제 구조에서 주도권을 잡은 사람은 더 이상 주도권을 잡을 수 없습니다. 계급조정 운동이 필요하지요. 이것을 우리는 민주화라고 합니다. 이 역시 해냈습니다. 수없이 많은 소음과 소란 속에서 또 민주화를 이룩했습니다. 위대한 성취입니다.

이렇게 건국, 산업화, 민주화처럼 시대의 문제의식과 비전이 일치되어 큰 효율을 얻게 되면, 역사에서는 이것을 발전이라고 합니다. 그렇다면 민주화 다음의 비전은 무엇일까요? 저는 이것을 우선 선진화라고 이름 붙이겠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우리가 새로운 비전을 세우는 것에 아직 성공하지 못한 채 헤매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굉장히 중요한 사안입니다. 새로운 시대조건 속에서 거기에 맞는 새로운 비전을 건립할 수 있는지의 여부가 우리 민족이 발전을 지속하느냐 아니면 급격한 쇠퇴로 빠져드느냐를 결정하게 됩니다.

건국, 산업화, 민주화, 다음은?

민주화까지 이루는 데 사용했던 의식과 방법은 이미 낡았습니다. 한계에 도달했습니다. 이 한계를 넘어서지 못하고 당황하고 있는 상황이 지금 우리에게 혼란으로 읽히고 있는 것입니다. 이 혼란은 개량적이거나 부분적인 요법으로는 돌파할 수 없습니다. 성큼 돌파해야 합니다. 이 한계를 돌파하는 일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 일이고, 행복하게 하는 일이고, 종속성에서 벗어나게 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민주화나 산업화나 건국의 벽은 매우 구체적입니다. 또 앞선 선례들이 있습니다. 그래서 그 벽을 넘자고 설득하는 일이나 힘을 결집하는 일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그러나 민주화 다음의 벽, 즉 우리가 도달해야 할 선진화라는 벽은 창의적이거나 독립적인 활동을 필요로 하는 것으로서 어떻게 말하면 추상적입니다. 설득도 어렵고 힘의 결집도 쉽지 않은 이유입니다. 그래서 이 벽의 돌파는 갑자기 난이도가 높아져 버립니다.

우리는 눈에 보이지도 않고 손에 잡히지도 않는 투명한 벽 앞에 서 있습니다. 이 벽을 어떻게 건너뛰고 넘을 것인가를 궁리하고 또 시도하는 일이 시급하기 때문에 우리가 모여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대를 누가 돌파할 수 있을까요? 문제의식을 포착한 지성인들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묻겠습니다. 지성인은 무엇을 하는 사람일까요? 알고 있는 것을 바탕으로 하여 모르는 곳으로 넘어가려고 용기를 발휘하는 사람입니다. ‘나’에게 갇힌 생각을 ‘우리’까지 확장시킬 수 있는 사람입니다. ‘여기’에 있던 나를 ‘저곳’으로 끌고 가려는 사람입니다. 보이고 만져지는 곳에서 안 보이고 만져지지 않는 곳으로 옮겨가려고 몸부림칠 수 있는 사람입니다. 이미 있는 익숙한 것을 지키는 사람이 아니라, 그 익숙함에서 과감히 이탈하여 아직 열리지 않은 어색한 곳으로 건너가려고 발버둥 치는 것, 그것이 지성인의 율동입니다. 새로운 시도를 감행할 때 새로 열릴 그곳을 갈망하며 꿈꾸는 힘을 상상력이라고 합니다. 그 상상하여 얻은 새 꿈을 용기 있게 붙잡는 힘을 창의력이라고 하지요. 상상력과 창의력으로 무장해야 하는 이유는 산업화나 민주화라는 벽보다도 우리가 건너가려고 발버둥 치는 그 선진화의 벽을 넘을 때 반드시 요구되는 역량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지적(知的)으로 혹은 지성적으로 성숙해가고 있을까요? 정해진 이론과 정해진 시스템을 지키는 지적 고착성 안에 갇힌 것은 아닐까요? 젊은 지성으로서 이미 있는 모든 것에서 불편함을 느끼지 않고, 오히려 편안해한다면 지적 고착성 안에 갇힌 것이 분명합니다. 익숙한 과거의 방법을 계속 써서는 새로운 결과를 기대할 수 없습니다. 새로운 결과, 즉 새로운 비전을 발견하고 실행하려면 우선 익숙한 과거와 결별하려는 과감성을 발휘해야 합니다. 결국 지성인은 자신만의 새로운 눈으로 시대를 읽는 사람이고, 자기가 읽어낸 시대의식에 책임성을 가지고 헌신하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건명원의 여러분과 제가 해야 하는 일입니다.

지난 9월 2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건명원에서 열린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최진석 원장이 강연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9월 2일 서울 종로구 가회동 건명원에서 열린 창립 2주년 기념식에서 최진석 원장이 강연하고 있다. ⓒphoto 이신영 영상미디어 기자

심재(心齋), 그리고 혁명의 실패 이유

이야기 하나 해드리겠습니다. ‘장자(莊子)’라는 책의 ‘인간세(人間世)’ 편에 나오는 안회와 공자의 이야기입니다. 공자는 사실 저자인 장자 본인이지요. 안회가 말합니다. “어떤 왕이 국권을 남용하고, 백성들을 사지에 몰아넣는 등 폭력적으로 나라를 다스린다고 합니다. 제가 그 나라에 가서 바로잡아보겠습니다.” 스승이 말합니다. “너는 그 나라에 가 봐야 죄나 뒤집어쓸 것이다.” 안회가 말합니다. “지식인은 잘 다스려지는 나라에서는 떠나고, 어지러운 나라에는 들어가 병폐를 고쳐줘야 한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스승이 말합니다. “진짜 지성인은 먼저 자기부터 도를 갖추고 나서 남도 갖추게 했다. 너는 아직도 자기 생각에만 얽매여 있다. 이래가지고서야 어떻게 상대방을 감화시킬 수 있겠느냐? 심재(心齋)하라.” ‘심재’란 마음을 공허하게 유지하는 일입니다. 평정과 관조의 상태를 유지한다는 말과도 가깝습니다. 다시 말하면, 자기를 정해진 외부의 것에 좌우되도록 방치하지 않고, 자기 마음을 자기가 주인이 돼서 자기만의 생명력으로 지배하는 것을 말합니다.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나라에는 긴 혁명의 역사가 있습니다. 그런데 왜 그 혁명이 완수되지 않을까요? 혁명의 주체들은 대부분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었습니다. 정의와 도덕으로 무장한 지식인들이 사회로 공급되면 이 사람들의 양만큼 사회에는 정의와 도덕의 양이 증가해야 하는데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왜 그럴까요? 함석헌 선생 표현대로라면, 혁명을 외치는 사람이 혁명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머릿속의 혁명이념, 학습된 혁명의 가치를 사회에 공급하고 수행하려 했지, 자기는 정작 혁명되지 않은 것입니다. 자기가 혁명되지 않고 하려는 모든 혁명은 실패했습니다. 네가 외치는 혁명의 그 뜻대로 너는 혁명되었는가. 이게 함석헌 선생의 말입니다. 정작 자신의 심재는 이루지도 못하였으면서, 나라를 고치겠다고 팔뚝을 걷는 안회에게 공자가 한 말이나 같은 맥락입니다.

시대의식을 장악한 사람, 시대에 헌신하려는 사람, 시대를 건너가려는 지식인 가운데 어떤 사람은 지식으로 이것을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시대의식이 자기가 되지 않는 한, 자기 내면이 되지 않는 한, 우리가 하려는 많은 시도는 소란만 피울 가능성이 큽니다. 우리는 역사 속에서 숱한 경험을 했습니다. 왜 예술을 꿈꾸는 사람이 예술가가 되지 못하는가. 이유는 하나입니다. 그 사람의 내면이 예술성을 폭발시킬 함량으로 단련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 사람이 예술적이라면 예술은 절로 꽃핍니다.

공부는 대수가 아니다

나에게는 한 가지 간절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저 자신이 되고 싶은 사람이기도 합니다. 단 한 명이라도 가장 근본적인 면에서 철저하게 자신에게 진실한 사람, 자기가 꿈꾸는 그것이 바로 자기 자신인 사람을 만나는 것입니다. 저도 나 자신에게 그 정도로 정련된 나를 만나게 해주려 노력하겠습니다. 그런 사람은 세계를 바꿀 수 있습니다. 여러분이 바로 세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세계를 감동시켜 변화를 도모할 수 있습니다. 그 꿈이 자기가 되지 않은 사람, 꿈이 머리와 입에만 있는 사람은 그 꿈을 절대 이룰 수 없습니다. 시대의식을 장악하고 헌신하는 사람, 지적인 삶을 거기에 바치려는 사람은 시대의식이 곧 자기가 되는 사람입니다.

그 사람을 그 사람이게 하는 힘, 여분의 것과 잉여의 것을 모두 제거하고 남는 자신만의 고유한 동력을 덕(德)이라고 합니다. 공자도 ‘덕불고, 필유린(德不孤, 必有隣)’이라 했습니다. 덕이 있는 사람은 반드시 동조자가 있습니다. 이웃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조자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친구를 기다리지 마십시오. 우선 자기가 자기에게 친구이면 됩니다. 자기가 자기에게 동조자이면 됩니다. 동조자를 꿈꾸는 자기와 동조자가 찾아오길 바라는 자기가 일치하면 반드시 감화력과 설득력이 생깁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포착한 그 시대의식으로 자기가 되어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저는 철이 들고 나서 소소한 한 가지를 깨달았습니다. 옛날부터 일상에서 가끔 듣던 말 가운데 하나가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진짜로 사실이라는 것을 알게 된 것입니다. 바로 “공부 잘하고 못하고가 대수냐. 먼저 사람이 되어야지”라는 말입니다. 저는 과거엔 이 말이 저처럼 공부 잘 못하는 사람을 그냥 위로하는 말인 줄만 알았습니다. “공부는 못하지만 넌 사람이 좋잖아”라는. 그런데 요즘에는 이 말을 굉장히 깊이 느낍니다. 공부를 하는 사람 가운데서도 왜 어떤 사람은 그냥 일반적인 학자이고, 어떤 사람은 지성사에 이름을 남길 정도까지 올라설까요? 왜 어떤 군인은 형식적으로 근무하는데, 어떤 군인은 목숨을 바치는 헌신성을 발휘할까요? 결국 그 사람의 내면과 함량이 어떠한가가 관건입니다. 사람이 문제입니다. 이 세상의 거의 모든 문제는 그 사람의 문제입니다. 그 사람이 어떻게 되어 있는가가 그 사람의 지성적인 높이를 결정합니다. 삶의 수준을 결정합니다. 시선의 고도를 결정합니다.

우리는 지금 시대의 벽 앞에 서 있습니다. 그러나 시대의 벽을 돌파하려는 결기를 갖춘 사람이 결집되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가벼운 지적 체계를 숭배하는 사람으로 남지 않기를 바랍니다. 학습된 진리를 수행하는 사람에 머물지 않기를 바랍니다. 있어 본 적이 없는 진리를 건설하려는 도전을 감행하십시오. 사람이 되는 문제에 집중하십시오. 내가 정말 나인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계속 하십시오. 이에 대답하려 노력하면서 시대를 직시하는 지성의 활동성을 강하고 질기게 발휘하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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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리=김민희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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