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야구해설의 새로운 경지를 일궈냈던 하일성 전 KBO 사무총장이 지난 9월 8일 서울 송파구 그의 사무실에서 숨진 채로 발견됐다. 향년 67세였다.

그의 느닷없는 비보는 야구계에 큰 충격과 깊은 슬픔을 안겨줬다. 유서는 없었지만 고인의 휴대폰에는 ‘미안하다, 사랑한다’는, 누군가에게 미처 발송하지 못한 문자 메시지가 남아 있었다. 공적인 일을 떠나 사적인 삶의 영역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차마 말할 수 없었던 아픔과 고뇌가 있었으리라 짐작게 한다. 고인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기 나흘 전인 9월 4일 부인, 작은 딸과 함께 저녁 식사를 했다. 그 자리가 그의 마지막 만찬이었던 셈이다.

홀연히 이 세상을 스스로 등진 고인의 어두운 내면을 직간접으로 듣고 알고 있던 지인들은 그의 부음을 듣고 말문을 열지 못했다. 평소 활달하고 활기찬 태도를 보였던 것과는 달리 근년 들어 생활에 시달린 나머지 풀이 죽고 현저히 위축된 모습으로 주변인들에게 간간이 자신의 괴로움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졌다. 절친한 친구 사이로 고인의 말년 궁핍을 잘 알고 있던 윤동균 일구회 회장(전 OB 베어스 감독)은 “6개월 전부터 ‘죽고 싶다’는 말을 자주했다. (작고하기) 이틀 전에도 통화를 했는데…”라며 침통해 했다.

1978년 청룡기 야구대회 해설로 데뷔

1949년 서울 생. 성동고와 경희대 체육과를 나온 하일성은 양곡종고를 거쳐 환일고 체육교사로 재직 중이었던 1978년에 오관영 당시 환일고 선배 교사 권유로 TBC 해설 마이크를 처음으로 잡았다. 그해 봄 조선일보 주최 청룡기 고교야구대회의 라디오 해설이었다. 원래 김병우 제일은행 감독이 해설을 했으나 사정이 생겨 ‘대타’를 물색하던 차에 그가 나타났던 것이다. 그를 발탁했던 김재길 당시 TBC PD의 회고담이다.

“1978년 5월 말이었다. 웬 이상한 사람이 환일고 오관영 선생의 소개로 찾아왔다. 어깨가 앞으로 굽은 늙수그레한 차력사같이 생긴 사람이었다. 턱에는 수염이 듬성듬성 나 있고 좀 비슬거리는 폼이 썩 마음에 들지 않았다. 말솜씨는 보기와는 달리 야무졌는데 좀 흠이라면 눈깔사탕을 문 것 같은 말씨였지만 사투리를 쓰지 않아 마음에 들었다. ‘성동고, 경희대에서 공을 주고받아 봤지만 신통한 선수는 아니었다’고 털어놓는 솔직 담백한 점이 마음에 쏙 들었다.”

그는 그렇게 해설을 시작했다. 그 시절 야구해설은 실전의 명수 김계현 한국전력 감독, 이론에 능통한 이호헌 전 KBO 사무차장, 뒷날 ‘빨간 장갑의 마술사’로 이름을 떨쳤던 김동엽 전 MBC 청룡 감독 등이 주름잡고 있을 때였다. 햇병아리 하일성의 해설로는 경쟁이 되지 않았다.

그는 차별화를 시도했다. 경험야구도 실전야구도 아닌 제3의 길, 즉 야구의 기본인 기초이론으로 승부를 건 것이다. 그는 야구 규칙을 통째로 외웠다. “이것저것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규칙에 바탕을 둔, 재판장이 선고를 내리는 식의 해설”(하일성)이었다.

그는 1978년 가을 TBC 라디오에서 TV로 영전했다. 그리고 1982년 프로야구 출범에 즈음해 KBS로 이적했다. 그의 해설시대가 열렸다. 그의 해설은 프로야구 발전 단계와 밀접하게 연결돼 있다. 그의 해설이 한국 프로야구의 흥행과 인기를 끌어올리는 데 일정한 기여를 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사전에 관계자들을 탐문하거나 현장에서 감독, 코치, 선수, 구단 관계자 등 당사자들을 직접 만나 취재한 정보와 지식을 종합한 ‘예측해설’로도 유명했다. 아마도 밤낮으로 그처럼 많은 발품을 판 해설가도 없었을 것이다.

그는 ‘가장 믿을 만한 소식통’이었다. 한번 맺은 인간적인 유대관계가 끈끈했고 그가 모르는 야구계 소식이란 거의 없었다. 그의 정보는 정확했다. 1986년 김인식 당시 동국대 감독이 해태 수석코치로 내정된 뉴스는 필자가 모 신문사에서 일할 무렵 하마터면 낙종할 뻔했던 기사였으나 그의 귀띔으로 거꾸로 특종을 한 기억도 새롭다.

그는 “해설은 나의 천직이지만 언제나 어렵다. 대중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 해설의 핵심이다. 대중성과 전문성을 동시에 살리는 해설이 이상적이다. 평생을 추구하면 좀 근접할 수 있을까”라고 끊임없이 고심했다.(20013년 발간된 그의 자서전 ‘야구 몰라요 인생 몰라요’에서 발췌 인용)

그가 해설의 대중성에 신경을 기울였던 것은 김재길 PD의 ‘흥미로운 조언’도 힘이 됐다. 그 조언은 “노래는 패티 김이 좀 더 잘하는지 몰라도 역시 인기 있는 건 이미자”라는 얘기였다. 공정성과 대중성은 그가 좇던 해설의 두 마리 토끼였다.

그는 이렇게도 말했다. “내가 좋아하는 야구에 편파란 없다. 선수들이 다 내 후배이고 자식 같은데 어떻게 편파적으로 해설할 수 있겠는가. 그것만은 떳떳하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그는 은근슬쩍 2011년에 KIA 타이거즈가 펴낸 ‘타이거즈 30년사’에 기고한 칼럼을 통해서는 “타이거즈 편파 해설의 원조”라고 실토했다.

1983년 해태 타이거즈의 첫 우승 예견이 적중해 화제를 낳았던 까닭이다. 그는 칼럼 첫머리에 “당시 신문을 보면 알겠지만 1983년 해태 타이거즈 우승을 예상했다. 원년 4위에 그쳐 주목받는 팀은 아니었지만 두 가지 이유, 김응룡 감독이 부임했고 취약점이던 포수 쪽에 김무종을 보강했다. 야수의 선수층이 두껍지 못했지만 아마 때 검증된 선수들이었다. 두 단점을 메웠으니 우승한다고 예상했고 그대로 적중했다”고 밝혔다.

2010년 3월 1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서로에게 마이크를 대주며 포즈를 취한 하일성씨와 허구연씨(오른쪽). 두 사람 모두 “혹시나 내 해설에 영향을 받을까 봐 다른 사람의 해설은 절대 듣지 않는다”고 했다. ⓒphoto 조선일보 오종찬
2010년 3월 16일 서울 잠실야구장에서 서로에게 마이크를 대주며 포즈를 취한 하일성씨와 허구연씨(오른쪽). 두 사람 모두 “혹시나 내 해설에 영향을 받을까 봐 다른 사람의 해설은 절대 듣지 않는다”고 했다. ⓒphoto 조선일보 오종찬

그는 이렇게 회고한 바 있다. “어찌 보면 내가 편파 해설의 원조이다. 그때는 내 고향이 서울이 아니라 광주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많았다. 1983년 우승을 예언한 점도 있지만 당시 라인업이 1번부터 9번까지 모두 스타였고 개성도 강했다. 각자 사연도 많았으니 타이거즈 선수들에 대해 멘트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해설가로 풀어먹을 이야기가 많은 게 얼마나 좋은가. 그래서 광주 사람이라는 소리를 들었고 상대 팬들은 편파 해설이라고 지적했다. 현장뿐만 아니라 방송사에 항의 전화, 항의 편지를 무수히 받았다.”

야구해설가로 유명세를 타던 그는 2006년 5월부터 2008년 3월까지 제11대 KBO 사무총장으로 취임, 프로야구 행정 총책임자의 위치에서 2008년 베이징올림픽 야구 우승과 2009년 제2회 WBC 준우승의 뒷바라지를 헌신적으로 했다. 그는 베이징올림픽 야구 국가대표 단장을 맡아 9전 전승 금메달을 일궈낸 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여겼다. 심지어 자신의 묘비명에 ‘베이징올림픽 야구대표팀 단장’을 새겨넣어 주기를 바란다는 발언을 한 적도 있다.

제2회 WBC(월드베이스볼클래식) 대표팀 감독 선임과 관련, 당초 점찍었던 김성근 당시 SK 와이번스 감독이 건강상의 이유로 고사하자 그는 고심 끝에 기발한 읍소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2008년 11월 4일 김인식 한화 이글스 감독과 술 약속을 잡았다. 당초 이 술자리는 WBC 대표팀 감독 문제와는 관련이 없는, 그야말로 친선 자리였다. 술자리 자체가 김 감독이 약속 일주일 전 모처럼 그에게 전화를 걸어 “시즌도 끝났고 하니 술 한잔 사라”고 해서 이루어졌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그 무렵 WBC 대표팀 감독 자리를 놓고 김성근 감독이 거부하는 바람에 대표 선임의 총책이었던 그가 다급한 처지가 됐다. 김성근 감독은 거부하고, 베이징올림픽 대표팀 감독이었던 김경문 두산 베어스 감독은 손사래를 치니, 이젠 ‘죽기 살기로 (김인식 감독에게) 매달리자’(하일성의 표현)고 의견을 모았다는 것이다. 그 자리에는 평소 김 감독과 절친한 사이인 한영관 한국리틀야구연맹 회장과 윤동균 KBO 기술위원장이 동석했다. 그 자리는 결국 김인식 감독에게 WBC 지휘봉을 맡아달라고 통사정하는 자리가 됐다. 좀체 결론이 나지 않았던 술자리는 새벽 1시까지 이어졌고 얘기를 풀어가던 그는 “한국 야구를 어떻게 하느냐”며 몇 시간 계속 졸라댔다. 그래도 김 감독이 꿈쩍하지 않자 급기야 후배인 윤동균 기술위원장이 불쑥 김 감독 앞에서 무릎을 꿇고 “어떻게 합니까. 형님, 어렵겠지만 이번 한 번만 맡아주십시오”라며 큰절을 올리는 사태로까지 발전했다. 그 지경이 되자 김인식 감독도 더이상 마다할 수 없게 됐다. 당초 각본을 그렇게 짰던 것이다.

그는 2007년 연말 현대 유니콘스가 재정난으로 해체를 선언하자 백방으로 뛰어다닌 끝에 서울 히어로즈 창단을 이끌어내 8개 구단 체제를 유지하는 데도 기여했다.

고인은 생전에 숱한 어록과 일화를 남겼다. 2008년 5월 11일 대전구장에서 열렸던 LG-한화전에서 빚어졌던 류현진 팔꿈치 테이핑과 LG 봉중근 건강목걸이 착용과 관련, 부정 이물질 부착 문제가 불거지자 ‘투수가 이물질을 몸에 붙이거나 갖고 있는 것’에 대한 KBO 야구 규칙 조항을 완화하는 시행세칙을 제정하면서 이런 말을 남겼다.

“야구를 위한 규칙이 돼야지, 규칙을 위한 야구가 돼서는 안 된다.”

고인은 해설가로서뿐만 아니라 기업체의 명강사로, 서로 모셔가려는 ‘주례 선생님’으로도 한때 인기가 넘쳐났다. 박병호·박경수·홍성흔·이종욱·이재원 등 숱한 선수들이 그의 ‘덕담’을 듣고 가정을 꾸렸다.

“나는 야구를 밥보다 좋아한다. 밥보다 더 좋아하는 야구를 내 목소리로 중계하니까 좋다”고 했던 고인의 야구, 야구인의 길을 벗어난 말년의 삶은 살아남은 자들에게 착잡한 울림과 깨우침을 준다.

고인은 “야구는 1루와 2루와 3루를 반드시 거쳐야 홈으로 들어올 수 있다. 건너뛰어도 안 되고 생략할 수도 없다. 추월과 역주행도 허용되지 않는다. 인생이 그렇다. 지나온 계단을 돌아보면서 차분하게 마음을 정리해 본다. 성공과 좌절로 버무려진 삶, 파란만장한 드라마로 가득한 삶, 그 모든 것을 관조한다”고 그의 자서전에 썼다.

체육기자로 고인과 그라운드 안팎에서 30년 이상 부대껴온 필자로선 그의 돌연한 죽음에 아연하다. 세상을 떠난 그이가 생전의 온갖 시름을 잊고 부디 천상에서 영원한 안식과 평화를 누릴 수 있기를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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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윤표 OSEN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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