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hoto 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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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남자 골프사에서 수퍼스타는 끊임없이 등장했다. 이 중 ‘영원한 빅3’로 불리는 이들이 있다. 아널드 파머(87), 잭 니클라우스(76·이상 미국), 게리 플레이어(81·남아공)가 그 주인공이다. 영원한 빅3 가운데 ‘맏형’이었던 파머가 지난 9월 26일 세상을 떠났다. 사흘 전부터 미국 피츠버그대 메디컬센터에서 심혈관 이상 등으로 치료를 받았던 파머는 결국 다시 일어나지 못했다. 여든일곱 번째 생일을 보낸 지 보름째 되는 날이었다.

파머는 1958~1964년 전성기를 보냈다. 일곱 시즌 동안 네 차례의 마스터스 우승을 포함해 일곱 개의 메이저 타이틀을 획득했다. 유독 마스터스에서 강해 그에겐 마스터스가 열리는 미국 오거스타 내셔널 골프장의 이름을 따 ‘오거스타의 사나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파머는 마스터스에 대한 애착이 강해 50년 연속 출전하기도 했다.

파머는 미국 프로골프(PGA) 투어에서 통산 62승을 거뒀다. 유럽 투어 등까지 포함하면 프로로 95차례 우승했다. 파머는 네 차례 PGA 투어 상금왕을 차지하는 등 1968년 사상 처음으로 상금 100만달러를 돌파한 골퍼였다. 현재 PGA 투어 상금왕에게 ‘아널드 파머 트로피’가 주어지는 이유다.

전설이 될 자격이 충분하지만, 기록만 본다면 파머는 역사상 최고의 선수는 아니었다. 파머에 이어 골프계를 지배했던 니클라우스는 메이저 대회에서만 18승을 기록했다. 니클라우스를 포함해 타이거 우즈, 벤 호건, 샘 스니드(이상 미국) 등 4명이 파머보다 PGA 투어 통산 우승 횟수가 많다. 파머는 PGA 챔피언십 타이틀을 얻지 못해 ‘커리어 그랜드 슬램’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니클라우스, 우즈 등이 유일하게 ‘왕(The King)’으로 부르는 인물이 파머였다. 파머에겐 기록을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기 때문이다. 파머의 스윙은 정석과는 거리가 멀었다. 178㎝, 84㎏ 인 파머는 온몸을 사용해 강하게 공을 쳤다. “파머가 공을 치면 지구가 흔들린다”는 말이 나왔던 이유다. 파머의 사전에는 위험 지역에서 안전한 곳으로 공을 빼내는 ‘레이업’과 소심한 ‘짧은 퍼팅’도 존재하지 않았다. 파머의 머릿속엔 온통 ‘공격 앞으로’만 존재했을 뿐이다. 이에 대해 파머는 “처음 클럽을 손에 잡은 네 살 때부터 아버지가 줄곧 ‘강하게 쳐라, 아들아. 그리고 가서 공을 찾으면 또 강하게 쳐라’라는 말을 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파머는 미국 TV 시대가 배출한 첫 번째 스포츠 스타였다. 잘생긴 외모와 화끈한 경기 스타일이 시청자를 TV 앞으로 끌어모았다. TV 앞뿐 아니다. 파머에게는 애칭을 딴 팬클럽인 ‘아니의 부대(Arnie’s Army)’가 있었다. 파머가 어디서 경기를 하든 구름떼 같은 관중이 그를 따랐다. 파머는 긴장감이 흐르는 경기 중에도 팬들과 농담 따먹기를 했고, 사인 요청을 거절하는 법도 없었다. 파머는 아무리 긴 줄이 있더라도 한 사람 한 사람 모두에게 정성껏 사인을 해준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빅3 가운데 팬층이 가장 두꺼웠던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당시 골프팬들은 “60대 초반 타수를 치는 선수보다 80타를 치더라도 파머를 보고 싶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미국 공영방송 NPR는 “파머는 엘리트, 상류층의 스포츠로 인식돼 지루하기만 하다는 평가를 받던 골프에 새 생명을 불어넣었다”고 전했다.

잘생긴 외모와 달리 파머는 ‘부잣집 도련님’이 아니었다. 그는 오히려 전형적인 노동자의 아들에 가까웠다. 철강공장에서 일했던 파머의 아버지는 이후 집 근처 골프장에 취직해 그린 보수를 했다. 골프를 좋아했던 아버지를 통해 골프에 입문한 파머는 이른 새벽과 늦은 밤, 골프장 회원들을 피해 공을 치며 미래의 전설이 될 준비를 했다. 파머는 한 인터뷰에서 “아버지를 도와 수동 잔디깎이를 밀고 다녔던 게 강력한 팔을 갖게 된 비결”이라고 했다. 영국 BBC는 “평범한 시골 꼬마에서 세계 최고의 스타가 된 파머의 이야기는 미국인들에게 ‘아메리칸 드림’을 상징한다”고 분석했다.

파머는 10년 전까지 투어 대회에 출전했다. 2006년 10월 77세의 나이로 마지막 시니어 투어 대회에 출전했던 파머는 워터 해저드에 두 차례 공을 빠뜨리고 기권했다. 이때 그는 말했다. “사람들은 언제나 굿샷을 보고 싶어한다. 나는 그들에게 굿샷을 보여주지 못했다. 이제 떠날 때가 온 것이다.” 프로 무대에서 떠난 뒤에도 파머는 남녀를 불문하고 투어에서 우승한 선수에게 축하 서한을 보냈다. 한국의 박인비, 전인지, 김효주, 박희영 등이 미국 여자프로골프(LPGA) 투어에서 우승할 때마다 파머로부터 축하 편지를 받았다. 지난 9월 19일 파머는 전인지에게 두 번째이자 한국 선수에게 보내는 마지막 축전을 남기기도 했다. 전인지가 올 시즌 마지막 메이저 대회인 에비앙 챔피언십에서 ‘메이저 최다 언더파’ 기록을 세우며 우승을 차지한 다음 날 “젊은 나이에 메이저 대회에서 대기록으로 우승한 것을 축하한다”는 내용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전인지는 SNS에 “파머 할아버지, 제게 편지를 보내주신 게 엊그제인데…. 영원히 기억할 거예요. 천국에서의 안식을 두 손 모아 빕니다”라는 글을 올렸다.

70세 때도 260라운드 돌아

1980년대 골프가 생소했던 한국에서 그가 누구인지 알 길은 없었다. 하지만 꼬마들까지 그의 이름은 알았다. 당시 한국에도 파머의 이름을 딴 의류 브랜드가 진출했기 때문이다. 그의 의류 브랜드에는 어김없이 파머를 상징하는 알록달록한 우산 로고가 새겨졌다. 파머는 그린 밖에서도 큰 성공을 거뒀다. 파머는 미국 골프채널의 창립자 중 한 명이다. 골프 방송이 골프의 대중화에 큰 몫을 했다면 그 뒤엔 파머가 있었던 것이다.

파머는 골프 코스 디자인 회사를 세워 전 세계 300개가 넘는 골프장을 설계했다. 드라이클리닝 체인점, 자동차 판매점 등 그가 손을 뻗친 분야는 셀 수 없이 많다. 투어 프로 생활을 접은 뒤에도 파머는 계속해서 부를 쌓았다. 그는 지난해 4000만달러(약 430억원)를 벌었다. 골프계에서 파머보다 더 많은 수입을 거둔 이는 타이거 우즈, 조던 스피스, 필 미켈슨(이상 미국), 로리 매킬로이(북아일랜드)뿐이었다.

파머는 ‘비행광’이기도 했다. 그는 81세 때까지 2만시간이 넘는 비행을 기록했다. 고향에는 그의 이름을 딴 공항이 생겼다. 파머는 “비행사 자격증이 없었다면 그만큼 전 세계 구석구석을 다닐 수 없었을 것”이라며 “전 세계를 직접 날아다니며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 골프를 전파할 수 있었다”고 했다. 그의 타계 소식이 전해지자 미국골프협회(USGA)는 “역사상 가장 위대했던 ‘골프 앰배서더’가 우리 곁을 떠났다”고 애도했다.

파머는 쌓은 부를 골프 대중화와 자선사업에 사용해 존경을 받았다. 자기 이름으로 된 투어 대회를 꾸준히 개최했고, 미국 올랜도에는 여성과 어린이를 위한 병원도 설립했다. 파머는 미국인이 받을 수 있는 최고 권위의 상으로 꼽히는 대통령 자유 메달, 의회 금메달, 국가 스포츠상을 모두 수상한 첫 번째 선수로 역사에 남았다.

파머는 누구보다 골프 자체를 즐겼던 사람이었다. 몸이 불편해도 클럽을 손에서 놓지 않았다. 70세 때 그는 260라운드를 돌았다고 한다. 골프 아이콘이 세상을 떠나자 니클라우스는 “그는 위대한 골퍼란 표현으로 부족한 우상이자 전설이었다. 나는 그의 수많은 팬 중 한 명이다”라고 애도했다. 마흔여섯 살의 나이 차를 극복하고 파머와 우정을 나눈 우즈는 SNS에 파머와 함께한 사진을 올리고 이런 글을 썼다. “그가 없는 골프를 상상할 수 없다. 그보다 골프에 더 큰 역할을 한 사람은 없었다. 그의 우정과 조언, 그리고 해맑은 웃음에 감사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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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남준 조선일보 스포츠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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