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이징 ‘취안쥐더’
베이징 ‘취안쥐더’

상업 전통이 유구한 중국은 100년 이상의 오랜 역사를 자랑하는 노포(老鋪)들이 즐비하다. 중국 상무부는 일찌감치 이에 주목했고, 1991년 ‘중화노자호(中華老字號)’라는 간판을 붙여 국가브랜드화했다. 그 숫자만 1600여 점포에 달하는데, 베이징과 상하이의 번화가에서는 ‘중화노자호’란 입간판을 붙인 점포를 쉽게 찾을 수 있다. 오랜 역사를 이어온 중국의 대표 맛집들을 위주로 노포 몇 곳을 소개한다.

양고기 샤브샤브 ‘둥라이순’

찬바람이 불면 베이징(北京) 남성들은 ‘쇄양육(涮洋肉)’을 머릿속에 떠올린다. 쇄양육의 ‘씻을 쇄(涮)’ 자만 보아도 입맛이 다셔지고 힘이 불끈 솟는 것 같다고들 말한다. 몽골 군인의 모자처럼 생긴 황동냄비에 네댓 명의 사나이가 둘러앉아 땀을 뻘뻘 흘리며 양고기를 끓는 물에 담갔다가 건져 먹으면서 이과두주(二鍋頭酒) 몇 잔 곁들이면 웬만한 추위쯤은 언제 추웠냐는 듯 잊기 때문이다. 또 양고기는 정력에 좋다는 이야기가 거의 정설처럼 돼 있다. 베이징 사나이들은 서로 응큼한 웃음을 교환하면서 대패로 썬 양고기를 연신 물에 빠뜨리고 건져 먹는다.

베이징의 사나이들이 쇄양육 가게들 중 단연 최고로 치는 집은 베이징 한가운데를 남북으로 관통하는 왕푸징(王府井)가의 중간쯤에 위치한 동안시장 입구의 ‘둥라이순(東來順·동래순)’이다. 쇄양육은 원래 칭기즈칸 병사들이 겨울에 들판에서 반쯤 언 양을 칼로 잘라 투구에 끓인 뜨거운 물에 넣어 익혀서 양념을 찍어 먹던 데서 유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칭기즈칸 병사들의 용맹성은 바로 쇄양육에서 나왔다는 말도 거의 정설처럼 전해진다. 쇄양육은 영어로는 ‘몽골리안 바비큐(Mongolian Barbeque)’라고 한다.

무엇보다도 쇄양육은 얇게 저민 양고기 색깔이 선홍색으로 신선해야 하는데, 양고기의 신선도라면 1903년에 가게문을 연 둥라이순이 전국적 명성을 가지고 있다. 113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둥라이순 쇄양육 맛의 비결은 내몽골에서 직접 공급받는 양고기다. 둥라이순 양고기는 고단백·저지방으로, 돼지고기나 쇠고기보다도 지방 함량이 낮아 소화가 잘되는 것으로 정평이 나 있다. 게다가 각종 도구들이 정갈하고 양념의 순도가 높다는 점도 자랑이다.

베이징덕의 명문 ‘취안쥐더’

‘취안쥐더(全聚德·전취덕)’는 베이징뿐만 아니라 중국 대륙 전역에 퍼져 있지만, 어디까지나 총본산은 베이징 천안문광장 남쪽의 전문(前門)과 화평문(和平門), 왕푸징 세 군데이다. 취안쥐더는 1864년 청나라 동치(同治) 3년에 허베이(河北)성 지(冀)현 사람 양취안런(楊全仁)이 창업했다. 1949년 중화인민공화국이 들어서면서 공사(公私)합영 방식으로 운영돼왔다. 지금까지 152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취안쥐더는 그동안 한 세기 반이 넘는 동안 불을 한 번도 꺼뜨리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양취안런이 처음 창업했을 때에는 불 위에서 돌려가며 굽는 방식이었다. 지금은 오븐에서 굽는 방식으로 조리한다. 베이징 사람들은 “만리장성에 올라가 보지 않으면 사나이라 할 수 없고, 취안쥐더 오리를 먹어 보지 않으면 정말로 유감(不到万里長城非好漢,不吃全聚德烤鴨眞遺憾)”이라는 말을 즐겨한다. 취안쥐더는 1년에 300만마리의 오리를 잡아 조리하고 있으며, 약 500만명이 베이징 중심부의 취안쥐더에서 베이징덕을 맛보고 가는 것으로 취안쥐더 측은 집계한다.

베이징 중심부의 취안쥐더 3개 점포 중에서는 전문에 있는 점포가 최대 규모다. 취안쥐더의 ‘온전할 전(全)’ 자는 완전한 무결점 요리를 만든다는 뜻이며, ‘모일 취(聚)’ 자는 한번 모이면 헤어지기 싫을 정도로 요리가 맛이 있으며, 그 다음의 ‘덕(德)’ 자는 큰 덕을 가리키는 말(全而无缺, 聚而不散, 仁德至上)이다. 취안쥐더에서는 요리사가 직접 오리 껍질만 발라서 제공하는 서비스를 베풀고, 껍질 이외의 살코기 부분은 탕을 끓여서 제공한다.

만두가게 톈진 ‘거우부리’

중국인들이 즐겨 먹는 만두의 왕좌는 톈진시 우칭(武淸)구에 있는 만두가게 ‘거우부리(狗不理·구불리)’가 차지하고 있다. 청나라 도광(道光) 25년, 서기로는 1831년에 창업해서 171년의 역사를 자랑한다. ‘거우부리’란 글자 그대로 ‘개도 상대 안 한다’는 뜻으로 “주인이 돈 좀 벌더니 손님을 모른 척한다”는 불평이라는 의미다. 한편으로는 거우부리 만두의 창시자 가오구이여우(高貴友)의 어릴 적 별명이 ‘거우부리’라는 두 가지 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창업자 가오구이여우는 1831년 청나라 도광황제 재위 17년에 태어났다. 나이 마흔에 구이여우를 낳은 아버지는 구이여우가 무사히 잘 자라기를 바라는 뜻에서 그의 별명을 ‘거우즈(狗子·개)’라고 지었다. 구이여우는 14세 때 톈진 남운하 부근의 찐만두 가게에 어린 직원으로 취업해 만두가게 주방장들로부터 만두 만드는 법을 배웠다. 만두 만드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지 3년 만에 구이여우는 독립해 나와 자신의 만두가게를 차렸다. 이 가게의 만두 맛이 널리 알려져 구름처럼 몰려든 손님들 가운데 구이여우의 별명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돈 좀 벌더니 거우즈가 우리를 쳐다보지도 않는다”면서 그 가게 이름을 ‘거우부리(狗不理)’라고 불렀다.

거우부리 만두의 특징은 크게 나누어 6종류, 작은 분류로는 98종에 달하는 다양함이다. 여러 가지 만두소를 넣어 다양한 맛을 내서 ‘금침만두’ ‘용봉만두’ ‘원앙만두’ ‘종합만두’ ‘대하부추만두’ 등 거우부리 특유의 만두들을 만들어냈다. 거우부리 만두 제조법은 2011년 11월 유네스코에 세계 비물질 문화유산으로 등록됐다.

베이징 ‘퉁런탕’
베이징 ‘퉁런탕’

347년 된 베이징의 약국 ‘퉁런탕’

‘퉁런탕(同仁堂·동인당)’은 1669년 청 강희(康熙) 8년에 설립됐다. 1723년에 황실에 약을 납품하기 시작했고, 청나라 8대에 걸쳐 황제들에게 황실 약을 납품했다. 퉁런탕은 1949년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이 수립된 뒤에도 상표와 상호를 유지했다. 1955년 퉁런탕 사장 러쑹셩(樂松生)은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를 접견했고, 베이징시 인민대표를 거쳐 베이징시 부시장까지 지냈다.

퉁런탕의 발전은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과 1980년대 덩샤오핑(鄧小平)의 개혁개방시대의 변화를 뛰어넘어 계속됐다. 1956년에는 러쑹셩 사장이 베이징 상공계를 대표해서 천안문 성루 위에서 마오쩌둥 주석과 류샤오치 주석, 저우언라이 총리에게 베이징 사영기업들의 전면적 공사(公私) 합영 전환 계획을 제시했다.

1985년 2월 베이징 시 당국은 인민대회당에서 퉁런탕 창업 315주년 경축대회를 주최했다. 당중앙과 국무원은 퉁런탕에 비상한 관심을 표시하기 위해 리셴녠(李先念) 국가주석, 펑전(彭眞) 전 베이징시장을 비롯한 고위층들을 대거 경축대회에 참석하게 했다.

1992년 7월 퉁런탕은 그룹으로 조직을 확대, 인민대회당에서 장쩌민(江澤民) 당시 국가주석의 휘호를 받아 내건 가운데 그룹 발족식을 가졌다. 퉁런탕의 성공담은 ‘대택문(大宅門)’이라는 제목으로 소설화·영화화·드라마화됐다. 퉁런탕이 중국 기업들 가운데 300년 넘게 시대의 변화를 뛰어넘어 반영구적인 발전을 한 것은 철저한 품질 관리와 물류 관리 덕분이었다. 청대에 생긴 기업 퉁런탕이 최근에는 홍콩 주식시장에 주식을 상장하는 변신을 하는 데까지 발전을 이루었다.

상하이 ‘영웅’ 만년필의 생명력

퉁런탕의 성공 신화를 상하이에서 구현한 기업은 ‘영웅’이라는 만년필 회사라고 할 수 있다. 1931년대에 창업한 영웅 만년필은 사회주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덩샤오핑의 개혁개방시대의 경제 발전 변화를 모두 뛰어넘어 살아남은 상하이의 개인 기업 중 대표적인 경우다. 덩샤오핑과 마거릿 대처 영국 총리가 1984년 홍콩의 주권을 반환하기로 하는 조약에 서명하는 데에 영웅 만년필이 사용되는 영예를 누리기도 했다.

박승준 전 조선일보 베이징ㆍ홍콩 특파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