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틴 그린필드 복장회사 현관 출입구. ⓒphoto 황효현
마틴 그린필드 복장회사 현관 출입구. ⓒphoto 황효현

부쩍 달아오른 미국의 대선 정국에서 가장 많이 언급되는 화두는 바로 ‘잡(Job)’, 즉 직업이다. 예나 지금이나, 동양이나 서양이나 먹고사는 문제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대통령 후보들이 서로 내가 더 많은 일자리를 만들 수 있다고 힘주어 말하는 것을 보면 미국도 일자리 이슈가 가장 큰 관심사임에 틀림없는 것 같다. 그도 그럴 것이 미국의 힘을 대변하던 그 수많은 공장들은 이제 거의 대부분 해외로 떠나 버렸다. 떠나고 남은 자리에는 쓰러져가는 공장과 녹슬어가는 설비뿐, 사람이 없는 그 빈 공간에는 쓰레기더미와 잡초만 무성하게 남았다.

이런 와중에도 100년 가까이 한자리에서 꿋꿋이 제조업을 지키고 있다면 뭔가 특출한 경쟁력이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찾아간 뉴욕 브루클린의 이 공장은 그들만의 기술, 그들만의 특허, 그들만의 노하우가 있는 그런 공장이 아니었다. 한국에서도 이미 30여년 전 사양산업이라고 해외로 내보내 버린 산업, 봉제공장이다. 골드만 3형제가 그들의 이름 첫글자를 상징하는 ‘GGG CLOTHIERS’라는 이름으로 1917년 설립한 이 봉제공장은 지금까지 중간에 이름만 한 번 바뀌었을 뿐 바로 그 자리에서 똑같은 제품을 생산하고 있다.

맨해튼에서 브루클린으로 가는 길은 지하철이 제일이다. 목적지 부근의 지하철역을 검색하고 그 역과 연결되는 라인을 찾으면 된다. 뉴욕시는 이렇게 하면 거의 대부분의 지역을 지하철로 찾아갈 수 있다. 맨해튼 한복판에서 일하는 나도 브루클린의 공장지대를 찾아가는 것은 약간의 용기를 필요로 한다. 사실 그것은 아무 근거 없는 걱정거리이기는 하지만 근거가 없다고 해서 내가 느끼는 주관적 감정이 쉬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더구나 깨어진 유리창과 건물의 낙서와 자유가 넘쳐 주체가 되지 않는 듯한 행인들을 만나게 되면 긴장하지 않을 수 없다. 브루클린의 봉제공장을 찾아가는 길이 그러했다.

맨해튼 바로 맞은편의 브루클린 하이츠에는 마치 맨해튼을 거울로 비춘 듯한 고층 건물들이 들어서 있지만 몇 블록 뒤로 가면 남루하면서도 인간적인 동네가 나온다. 우리의 상상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브루클린이다. 빛바랜 페인트가 너덜너덜한 낡은 건물, 원래 색깔을 가늠할 수 없는 오래된 간판, 지저분한 골목길, 낙서로 뒤덮인 담벼락, 천천히 돌아가는 흑백필름 같은 동네, 이스라엘을 제외하고 전 세계에서 유대인이 가장 많이 모여사는 곳이 바로 브루클린이다. 뉴욕에만 150여만명의 유대인이 살고 있는데 대부분이 바로 브루클린에 산다. 유대인들의 전통 복장과 모자를 쓴 사람들, 히브리어로 된 간판, 유대인 학교의 교복을 입은 학생들을 실어나르는 스쿨버스 등 미국 속의 작은 이스라엘과 같은 곳이다. 여기서는 물론 그들만의 언어로 소통한다. 마틴 그린필드가 브루클린에 정착하게 된 것도 그저 우연은 아닌 것이다.

현재 직원 100여명이 일을 하고 있는 ‘마틴 그린필드 복장회사’는 마틴이 인수하기 전 ‘GGG 복장회사’라는 이름으로 1917년부터 신사복을 만들기 시작한 곳이다. 100여년 동안 의류 중에서도 신사복만을 전문으로 생산해온 공장이다. 미국의 봉제공장이라고 해서 한국, 중국의 그것과 다를 바 없다. 오히려 시설과 기계 장비들은 낡을 대로 낡았고, 건물 구석에는 거미줄이 쳐 있으며, 후미진 곳에서는 금방이라도 쥐가 튀어나올 것만 같다. 벽면 한쪽 칸막이처럼 죽 늘어서 있는 ‘하드페이퍼 패턴’이 말없이 지난 세월을 보여주고 있다. 부모형제도 없이 혈혈단신으로 미국에 첫발을 디딘 마틴 그린필드가 이 공장의 마룻바닥 청소부로 고용된 것이 1947년. 그가 19살 때였다.

마틴 그린필드는 1928년 체코슬로바키아에 있는 파블로보(지금은 우크라이나)라는 조그만 마을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운명은 그가 유대인이었다는 태생적인 것과 히틀러의 광기가 유럽을 휩쓸던 시대 상황과 우연히 맞물리면서 뒤죽박죽이 되고 말았다. 동유럽을 무서운 속도로 점령해가던 히틀러의 군대는 그보다 빠른 속도로 유대인 인종청소에 나섰다. 1942년 마틴이 살고 있던 도시를 점령한 독일군은 그 도시의 모든 유대인들에게 소집 명령을 내린다. 14살에 불과하던 그는 영문도 모른 채 할아버지와 할머니, 부모님과 여동생 그리고 5살이던 남동생과 함께 아우슈비츠수용소에 강제로 끌려갔다. 독일군이 그의 가족들에게 이삿짐을 꾸릴 수 있도록 허용한 시간은 단 한 시간. 집과 옷과 가재도구들은 그렇게 그들의 손에서 멀어져갔다. 하루아침에 인생이 뒤바뀌어 버린 것이다.

마틴의 회고에 따르면 수용소에 끌려가면서 그의 아버지는 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어떤 일이 있어도 끝까지 살아남아야 한다. 이제 아버지나 가족이 너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니 네가 스스로 알아서 살아남아야 한다. 그리고 살아남게 되면 절대로 다른 가족들에게 미안한 마음을 가질 필요가 없다.”

어린 마틴이 수용소에서 배정받은 일은 독일군의 군복을 세탁하는 일이었다. 이전에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일이었지만, 그가 옷과 인연을 맺은 순간이기도 했다. 세탁을 하던 어느날 경험부족 탓에 군복의 깃을 찢고 말았다. 그는 이 사실을 감추기 위해 같은 수용소에 있던 다른 사람에게 바느질하는 방법을 배워 옷을 수선했지만 그의 첫 바느질은 형편없어서 옷을 돌려주자마자 곧 발각되고 말았다. 옷을 맡긴 독일군에게 불려간 그는 뺨을 얻어맞아야만 했다. 옷을 망가트렸다고 생각한 그 독일군이 마틴에게 옷을 집어던지며 가져가라고 했고, 그 옷을 받아 막사로 돌아온 마틴은 깃을 떼어버린 후 보온 삼아 그 옷을 죄수복 안에 입고 다녔다.

왼쪽부터 마틴 그린필드, 오바마 대통령, 토드 그린필드, 제이 그린필드.
왼쪽부터 마틴 그린필드, 오바마 대통령, 토드 그린필드, 제이 그린필드.

아이젠하워와 마틴의 인연

1945년 연합군이 독일을 점령하면서 수용소에서 풀려난 그는 마침 수용소를 지나던 랍비 허셸 터(Hershel Schaecter)를 발견하고는 그에게 달려갔다. 그리고 물었다. “신은 어디에 있습니까?(Where is GOD?)” 마틴은 이 사실을 기억하지 못했지만 그날 이 질문을 받은 터는 평생 이 질문을 잊지 못했다고 한다. 이후 마틴은 해방군을 지휘하기 위해 점령지를 방문한 아이젠하워와 우연히 조우하여 악수를 나누게 되었다. 이 사실 역시 우연히 마틴 곁에 있던 작가 엘리 위젤(Elie Wiesel)이 그의 집단수용소 관련 저서에 목격담을 남김으로써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아이젠하워와 마틴의 인연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마틴을 비롯한 수용소에 살아남은 10대들은 복수를 위해 길거리에 나섰다. 그들이 찾아나선 사람은 애완용 토끼의 먹이를 먹도록 강요했던 시장의 부인이었다. 그 부인은 갓난아기를 안고 있었는데 이를 본 마틴은 복수를 망설이게 된다. 그의 회고에 따르면 수용소의 지옥으로부터 비로소 인간성을 되찾은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한다.

그는 하루에도 수백 명씩 죽어 나가던 그 수용소에서 끝까지 살아남았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의 가족들은 그렇지 못했다. 마틴의 아버지는 독일이 해방되기 일주일 전 학살당했다. 수용소에서 풀려난 이후 그는 2년 동안 가족을 찾기 위해 독일과 체코를 샅샅이 찾아다녔지만 결국 가족을 찾는 데 실패했다. 이후 밝혀진 바로는 그의 직계 가족 중 살아남은 사람은 마틴이 유일했다. 이제 혈혈단신이 된 그는 유럽에 머물러야 할 이유가 없어진 것이다. 아마도 성장기의 아픈 기억만 남아 있는 이 구대륙이 그에게는 악몽과도 같았을 것이다. 미국행은 이런 그에게 자연스러운 선택이었다.

그에게는 다행히도 필라델피아에 제법 잘살고 있는 친척이 있었다. 이 친척 집에서의 생활은 그에게 별천지나 다름없었다. 수용소의 기억만 남아 있는 그에게 풍성한 식단과 식사시간에 오고가는 가족 간의 대화는 분명 어색한 경험이었을 것이다. 그는 곧 이 더부살이 생활을 청산하고 그의 숙모가 살고 있는 뉴욕으로 떠난다. 1947년이다. 숙모의 소개로 뉴욕에서 처음 취직한 곳이 바로 GGG 복장회사였다.

복장회사 취직은 그의 수용소 경험과는 아무 관련이 없는 그저 우연의 일치일 뿐이었다. 그가 이 공장에 취직하여 제일 먼저 한 일이 옷을 디자인하거나, 재단을 하거나, 재봉틀을 돌리는 전문적인 것이 아니라 누구나 할 수 있는 공장 바닥 청소였다. 말하자면 그는 공장 잡역부로 겨우 일자리를 얻은 것이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다온, 그리고 이 세상에 피붙이라고는 아무도 없는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그저 일에 몰두하는 것밖에는 없었다.

그런 처지를 이해하더라도 그의 성실함은 특출난 데가 있었던 것 같다. 공장에서 옷 만드는 기술을 하나씩 익히던 그는 3년도 되기 전에 직접 패턴 제작, 재단, 봉제 등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기술자가 되었다. 그러자 회사에서는 그에게 GGG 복장회사의 가장 중요한 고객을 맡기게 된다. 그가 아이젠하워다. 독일 해방 직후 악수로 격려했던 바로 그 아이젠하워였다. 홀로코스트 생존자에서 대통령의 복장사가 되는 순간이었다. 아이젠하워는 그가 양복을 직접 만들어준 첫 번째 대통령이다. 제럴드 포드는 그의 두 번째 대통령 고객이다.

마틴 그린필드가 인수하기 전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벽시계(왼쪽). 이 복장회사의 주요 고객을 특집으로 다룬 신문기사(오른쪽). ⓒphoto 황효현
마틴 그린필드가 인수하기 전 회사 이름이 적혀 있는 벽시계(왼쪽). 이 복장회사의 주요 고객을 특집으로 다룬 신문기사(오른쪽). ⓒphoto 황효현

콜린 파월·빌 클린턴도 단골

GGG 복장회사에서 승승장구하던 그는 마침내 이 회사의 공장장으로 승진하여 모든 생산, 구매 등을 총괄하게 된다. 그러다가 은퇴하는 전 오너로부터 1977년 이 공장을 인수하고 회사 이름을 ‘마틴 그린필드 복장사(Martin Greenfield Clothiers)’로 바꾸었다.

공장은 같은 위치, 같은 건물에 그대로 있지만 설립 후 60년 만에 주인이 바뀐 것이다. 바뀐 것은 공장 이름과 주인뿐 그외의 것은 전부 이전과 똑같았다. 그것은 이미 오래전부터 마틴이 공장 전체를 거의 혼자서 운영하다시피 했기 때문이다. 이때부터 마틴 그린필드 복장사는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그의 고객 리스트에 유명인이 줄줄이 등장하는 것도 이 무렵부터다.

마틴 그린필드를 백악관으로 직접 초청한 대통령은 빌 클린턴이다. 이 방문은 유명한 디자이너 도나 카렌이 주선한 것이었는데, 마틴이 도나 카렌의 남성복 라인 생산을 맡아서 한 인연 덕분이었다. 백악관을 방문한 그는 빌 클린턴에게 양복 색깔과 넥타이, 셔츠의 컬러 매치에 관한 조언을 했다. 이 첫 만남에서 빌 클린턴은 마틴에게 정장 20벌을 주문했다. 클린턴은 이후 마틴의 고정고객 중 한 명이 되었다. 마틴의 고정고객에는 폴 뉴먼과 같은 배우, 패트릭 유잉과 같은 운동선수, 마이클 블룸버그와 같은 사업가, 콜린 파월 같은 군인이자 정치인 등 인물과 분야를 가리지 않는다.

그는 콜린 파월과의 만남을 특별한 인연으로 생각하고 있다. 평생 군인이었던 파월이 민간인으로 더구나 사람의 주목을 받을 수밖에 없는 정치인으로 첫발을 내디딜 때 그의 복장에 관한 애정 어린 충고와 함께 직접 그의 옷을 만들어준 사람이 바로 마틴이다. 파월은 지금도 여전히 정장을 마틴 그린필드 복장사에 주문하고 있다.

1959년부터 이 공장에서 일해온 마리오. ⓒphoto 황효현
1959년부터 이 공장에서 일해온 마리오. ⓒphoto 황효현

버락 오바마 대통령은 아마도 마틴의 일생에서 마지막이자 네 번째 대통령 고객일 것이다. 여전히 현역으로 활약하고 있는 마틴이지만 이미 88세의 고령인 탓에 더 이상 그가 직접 치수를 재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공장의 한편에는 수십 년 된 종이 패턴들이 가득하다. 종업원들이 쉬는 시간에 전화를 하던 전화부스도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단추를 매다는 기계의 숫자판은 이미 100만을 넘기고 있다. 단추를 매단 개수를 기록한 이유는 기계는 공짜로 사용하는 대신 단추 개수에 따라 커미션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지금도 여전히 작동되고 있는 이 기계는 더 이상 커미션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물건을 판 사람이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것을 수리할 수 있는 사람도 뉴욕에서는 한 명밖에 없다고 하니 기계의 운명도 얼마 남지 않은 것 같다.

1910년경에 지어진 이 공장 건물(언제 완공되었는지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의 1층은 원래 마차를 끄는 말들의 마방이었다고 한다. 지금은 오래된 기계를 보관하는 창고로 사용하고 있다. 고장나 사용할 수 없는 고물 기계를 보관하는 이유는 다른 기계들이 고장났을 때 사용할 수 있는 부품을 확보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이 공장에서 제일 오래 근무한 사람은 물론 주인이자 설립자인 마틴 그린필드로 내년이면 일한 지 70년이 된다. 올해 80세인 마리오는 1959년부터 57년째, 60세인 오노프리오는 16살 때부터 44년째 여전히 왕성하게 일하고 있다. 마틴 그린필드 복장사는 이제 마틴의 두 아들, 토드(Tod)와 제이(Jay)가 경영을 이어받아 여전히 같은 장소에서 오래된 장비로 공장을 운영하고 있다.

황효현 경기텍스타일뉴욕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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