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일 서울 강동구의 동명대장간에서 강영기씨(왼쪽)와 강단호씨 부자가 강철을 두드리고 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지난 10월 7일 서울 강동구의 동명대장간에서 강영기씨(왼쪽)와 강단호씨 부자가 강철을 두드리고 있다. ⓒphoto 이경호 영상미디어 차장

서울 강동구에서 가장 번화한 천호동 로데오거리. 여기서 불과 5분 정도 떨어진 곳에 대장간이 하나 있다. 도심 한복판에 자리 잡은 이 대장간은 3대째 천호동에서 영업을 하고 있다. 지난 10월 7일 동명대장간을 찾았다. 지하철 5호선 천호역 5번 출구를 나와 옷가게와 음식점이 몰려 있는 로데오거리를 가로지르자 천호시장 사거리가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할지 스마트폰으로 대장간 주소를 확인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망치질 소리가 희미하게 들려왔다. 그 소리를 따라 무작정 걷기 시작했다. 1분도 채 되지 않아 ‘동명대장간’이라고 적힌 낡은 간판이 보였다.

가게 외관은 일반 철물점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였다. 그런데 가게에 들어서자 후끈한 열기가 온몸으로 느껴졌다. 대장간 구석에 놓인 화로에는 시뻘건 불길이 치솟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풀무질은 기자가 듣던 재래식 방법과는 조금 달랐다. 재래식 풀무질은 발로 펌프를 밟아 바람 세기를 조절했지만 이곳에서는 바람 세기를 간단한 스위치 조작으로 조절할 수 있었다. 하지만 예나 지금이나 풀무질을 하는 대장간 안은 뜨거웠다. 화로의 온도가 2000도를 훌쩍 웃돈다고 했다. 화로 옆에는 담금질할 때 사용하는 물통이 놓여 있었다. 그 옆에 놓인 모루 위에 말뚝을 놓고 망치질을 하는 강영기(65)씨와 강단호(37)씨. 이곳에서 3대에 걸쳐 79년째 대장간을 운영하고 있는 대장장이 부자(父子)다.

동명대장간의 역사는 강영기씨의 아버지가 1937년 천호동에 문을 열며 시작됐다. 강영기씨는 어렸을 때부터 어깨너머로 아버지의 일을 배우면서 자랐다. 중학교 때부터 교과서 대신 망치질이 더 익숙할 정도였다. 그렇지만 학생이었던 그에게 단단하고 무거운 철을 다루는 대장간 일은 쉬운 게 아니었다. 그는 젊은 시절에는 대장간 일이 힘들어 목수 등 다른 일도 찾아봤지만 결국 대장간으로 다시 돌아왔다. 강영기씨의 아들 강단호씨는 2005년부터 아버지의 대장간 일을 돕기 시작했다. 그는 대학생 때까지는 건축학을 전공하며 대장간하고는 전혀 무관한 삶을 살아왔다. 심지어 학교를 마치면 대장간을 찾아가 보는 일도 거의 없었다. 강씨는 대학 졸업 후에는 한 건설회사에 취업해 1년 넘게 일했었다.

어깨너머로 배운 일이 직업이 되기까지

그런 그가 어떻게 가업을 물려받게 된 것일까. 강단호씨의 설명이다. “퇴근을 하고 대장간에 들렀을 때, 아버지 혼자 화로에 불을 지피고 망치질을 하는 모습을 봤다. 직원들도 다 떠난 대장간에서 홀로 열기와 싸우는 아버지를 보며 결심했다. 아들인 내가 돕지 않으면 누가 아버지를 돕겠는가.”

강단호씨는 쇠락해가는 대장간을 일으켜 세우기로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그는 다니고 있던 건설회사에 사표를 던지고 본격적으로 아버지를 돕기 시작했다. 그 당시 상황에 대해 강영기씨는 이렇게 말했다. “아들이 이 일을 잇겠다고 했을 때, 고마움보다는 걱정이 더 앞섰던 게 사실이다. 힘들고 위험한 대장간 일을 아들에게 어느 부모가 선뜻 물려주고 싶겠는가.”

하지만 강단호씨는 가업을 잇겠다고 결심한 이후 새벽부터 대장간에 나와 아버지의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 아들의 성실함에 아버지의 걱정도 눈 녹듯이 사라졌다. 부자지간이자 사제지간인 이들은 실력 면에서도 인정받기 시작했다. 서울시는 올해 초 동명대장간을 지켜나가야 할 소중한 ‘미래문화유산’으로 지정했다.

대장간을 찾는 손님이 없을 거라는 생각은 기우에 불과했다. 지금도 동명대장간을 찾는 손님들은 많은 편이다. 하루 평균 150명 내외의 손님들이 크고 작은 물건들을 가지고 온다. 오히려 과거와 달리 제작이나 수리를 맡기러 오는 물건들의 종류가 다양해지고 있다. 1970~1980년대에는 농기구, 1990년대에는 건축자재, 2000년대에 들어와서는 등산용품, 인테리어용품 등 그 범위가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이날도 친구 추천을 받고 왔다는 한 50대 남성은 “등산객들 사이에서 철로 만든 등산용품 등을 수리하는 곳이 마땅치가 않은데, 이곳 솜씨가 좋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천호동에서 40년을 넘게 살았다는 80대 남성은 “도시에 살면 무딘 칼날을 갈거나 땜질할 곳을 찾기가 어렵지만 여긴 주민들의 만능 해결소 같은 곳”이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작은 칼날을 가는 데 드는 비용은 개당 2000원. 등산용품과 같이 손길이 많이 가는 제품은 개당 2만원 안팎의 수리비를 받고 있다.

한때 5명의 직원이 일했던 동명대장간에는 현재 강씨 부자만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강단호씨의 말이다. “요즘 내 또래 젊은 친구들은 험한 대장간 일을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내가 특별한 사람이라서 가업을 이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냥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 바로 대장간 일이었다.” 가업을 물려받은 것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는 게 강씨의 말이다. 가업 잇기를 망설이는 청년들에게 그는 하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어렸을 때부터 봐왔던 일이 사실 알고 보면 나한테 가장 잘 맞는 일이 될 확률이 높다. 가업을 잇겠다는 부담감을 벗고 내가 잘할 수 있는 일이라는 생각으로 한번쯤 도전해 보는 걸 추천한다.”

그는 10년 넘게 대장간 일을 배웠지만 “갈길이 멀다”고 말한다. 아직도 열처리 작업은 그에게 어려운 과정이다. 화로의 온도와 작업 타이밍이 조금이라도 맞지 않으면 철의 두께가 달라지거나 모양이 틀어지기 때문이다. 강단호씨의 작업복에는 새까만 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그의 이마 위로 굵은 땀방울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힘들지 않으냐”는 기자의 질문에 강씨의 대답은 명료했다. “마음가짐의 문제다. 힘들다고 생각하면 힘들지만 내가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면 보람을 느낀다.” 강씨의 목표는 하나다. 바로 이곳을 100년 역사를 가진 대장간으로 만드는 것이다. 강씨가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언젠가 100년을 잇는 대장간으로 소개되는 그날을 위해 담금질을 멈추지 않을 거다. 내 자녀가 이를 물려받겠다고 말하는 날, 비로소 내가 제대로 가업을 물려받았다는 생각이 들 것 같다.”

해가 질 무렵 기자는 취재를 마치고 대장간 밖을 나섰다. 여전히 손님들은 자신의 손때가 탄 물건을 들고 대장간을 찾고 있었다. 대장간을 뒤로하고 걸어가는 길, 상처난 곳을 두드리는 망치질 소리가 끊이지 않고 허공에 울려퍼지고 있었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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