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10일 경남 통영시 세병관의 12공방에서 만난 김극천씨(왼쪽)와 김진환씨 부자.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지난 10월 10일 경남 통영시 세병관의 12공방에서 만난 김극천씨(왼쪽)와 김진환씨 부자. ⓒphoto 김종연 영상미디어 기자

경상남도 통영시 문화동 62-1에는 국보 제305호 세병관(洗兵館)이 있다. 세병관은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산도에 있던 삼도수군통제영이 통영으로 옮겨오면서 지어진 건물이다. 세병관이란 이름은 두보의 시 ‘세병마’에서 가져온 것으로 ‘하늘의 은하수를 가져다 피 묻은 병장기를 닦아낸다’라는 뜻이다.

세병관에는 12공방이 있다. 2003년에 복원된 12공방은 원래 1800년대부터 갓, 두석, 목가구 등 각양각색의 생필품을 만드는 곳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양반가 규수들이 줄을 이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현재 12공방은 통영을 찾는 관광객들의 필수 관광 코스가 됐다. 12공방에서 만들어내는 많은 물건 중에서 특히 두석(豆錫)은 제작 기간이 짧게 1개월에서 길게는 1년까지 걸리기 때문에 물건을 사기 위해서는 사전 예약이 필수다. 두석은 목가구의 이음과 짜임새를 보강하고 외관을 치장하는 금속장식을 가리킨다. 지난 10월 10일 경남 통영시 세병관에서 5대째 두석을 만들고 있는 두석장(豆錫匠) 김극천(65)씨와 김진환(35)씨 부자(父子)를 만났다.

세병관 입구로 향하는 돌계단을 밟고 들어서자 좌측에 12공방으로 향하는 안내표시가 나타났다. 표지판을 따라 언덕길을 올라가 보니 옹기종기 붙어 있는 한옥이 보였다. 6.6㎡(2평) 남짓한 각각의 방 안에서 장인들은 물건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때 어디선가 쇠를 다듬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려퍼졌다. 일정한 간격으로 들려오는 소리를 따라 발길을 옮기자 두석을 만들고 있는 방이 보였다. 그곳에서 김씨 부자는 쇠를 납작하게 펴는 작업을 위해 망치질을 하고 있었다.

김극천씨의 집안은 아들 김진환씨까지 5대째 두석 만드는 일을 하고 있다. 김극천씨가 두석 만드는 일을 처음 배운 시기는 고등학교 1학년 때다. 당시 아버지의 일을 어깨너머로 배우며 장석에 광을 내는 일을 도왔다. 가게에 소문을 듣고 찾아오는 손님들도 많았다. 아버지 밑에서 일을 배우는 사람이 무려 20명 가까이 있었다. 그런데 김극천씨가 군대를 다녀오자 가세가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두석 작업이 기계화되기 시작하면서 값싼 제품들이 수공예시장을 위협했다. 20명에 달했던 직원들도 하나둘 떠나기 시작했다. 김극천씨는 “4남매 가운데 아무도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선뜻 나서지 않았다. 당시 철부지였지만 내가 가업을 지켜야겠다는 용기가 생기더라”고 회고했다. 1970년 초부터 본격적으로 가업을 잇기 시작한 김극천씨는 2000년에 무형문화재 제64호로 지정됐다. 현재 그의 곁에는 아들 김진환씨가 든든한 조력자 역할을 하고 있다.

손에 박인 굳은살과 상처는 훈장처럼

어떻게 김진환씨도 가업을 잇기로 결심하게 된 것일까.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들었던 망치 소리를 몸이 기억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냥 자연스럽게 아버지의 일을 돕기 시작했다.” 김진환씨는 “두석은 시간과 노력 없이는 만들 수 없다. 가업으로 잇기에 충분한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했다. 현재 김진환씨는 두석장 전수자로 내년에 열리는 조교 심사를 앞두고 있다. 조교가 되기 위해서는 최소 수년 이상의 경력과 문화재청이 지정한 전문가들로부터 실력을 검증받아야 한다. 조교가 되고 경력을 계속 쌓아나가야 무형문화재가 될 자격을 얻게 된다. 아버지의 뒤를 이어 무형문화재로 지정받는 것이 김씨의 가장 큰 목표다.

김씨는 “아버지 일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으로 대학에서도 문화재 관련 전공을 선택했다”며 “20살 때부터 가업을 잇기 위해 낮에는 수업을 듣고, 저녁에는 아버지 밑에서 두석 만드는 일을 배웠다”고 말했다. 쇠를 다루는 작업은 김씨에게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손에는 굳은살과 상처가 없는 날이 없었다. 그렇지만 김씨는 두석을 만들기 위해 작업실에 들어서면 이상하게 힘들지 않았다. 장석 하나를 만들기 위해 쇳조각을 한참 두드리고 나면 모든 잡념이 사라져서다.

실제 두석을 제작하는 과정은 간단치가 않다. 주석과 니켈을 가열해 녹인 것을 망치로 두들겨 0.5㎜ 두께의 판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 판을 작두와 정을 이용해 오려내고 줄로 다듬는다. 여기에 문양을 새긴 뒤 천으로 문질러 광택을 낸다. 장석은 꽃, 나비, 거북 등 모양에 따른 종류도 수천 가지에 이른다. 장석은 심미적 효과와 기능성을 동시에 갖추어야 한다. 모양에 따른 의미도 다양한데 나비는 사랑, 물고기는 재물, 거북은 장수를 의미한다. 반닫이 제작에 필요한 두석의 종류는 평균 80~120개 정도이다. 반닫이는 전면 상반부를 상하로 열고 닫는 문판을 가진 장방형의 장롱이다. 반닫이에 사용되는 두석을 제작하는 데 걸리는 기간은 평균적으로 1개월 안팎이다.

요즘 두석을 만드는 김씨 부자를 찾는 손님이 부쩍 줄어들고 있다. 기계로 빠르게 만든 값싼 제품을 선호하는 사람들이 늘고 있어서다. 김진환씨는 “빠른 것을 좋아하는 현대인에게 두석은 지루해 보일지도 모른다. 땀과 노력으로 이어나가는 전통은 지름길도 속임수도 없기 때문에 늘 더뎌 보인다. 하지만 반드시 이어나가야 할 가치가 있다는 것을 알아줬으면 한다”고 말했다. 김씨는 두석이 사람들에게 점점 잊혀져가는 것이 안타깝다고 했다.

“가업을 물려받은 것에 대한 후회는 전혀 없다”고 말하는 김씨에게도 한 가지 고민은 있다. 바로 생계 문제이다. 특히 결혼 후 생계 문제에 대한 김씨의 고민은 커져가고 있다. 김씨가 훗날 자신의 자녀에게 가업을 물려받으라고 선뜻 말하지 못할 것 같다고 하는 이유도 생계 문제 때문이다. 김씨는 “비록 생계는 어려운 게 사실이지만 전통을 지키며 살다 보면 제2의 도약이 올 거라고 믿는다”고 말했다.

12공방 장인들 중에서도 생계 문제로 공방을 떠나는 사람이 하나둘 생겨나고 있지만 김씨 부자는 여전히 공방을 지키고 있다. 공방 안쪽에 놓인 100년이 넘은 작업도구들이 두석의 역사를 말해주는 듯했다. 김진환씨는 “전통의 영역을 지키고 계승해나가야 하는 게 우리 모두의 몫”이라며 “사람들이 전통을 고리타분한 것이 아닌 소중한 것으로 여길 때 젊은 장인들이 탄생할 것”이라고 했다.

김태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