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8일 서울 종로구의 ‘3대 손바느질 양복점’에서 황의설씨(왼쪽)와 황상연씨 부자가 옷을 재단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지난 10월 8일 서울 종로구의 ‘3대 손바느질 양복점’에서 황의설씨(왼쪽)와 황상연씨 부자가 옷을 재단하고 있다. ⓒphoto 한준호 영상미디어 차장대우

기성복이 양복시장의 90% 이상의 점유율을 보이고 있는 오늘날에도 손바느질을 고집하는 양복점이 있다. 서울 지하철 1호선 동묘앞역 8번 출구 근처에서 영업 중인 ‘3대 손바느질 양복점’도 그중 하나다. 이름 그대로 이곳은 3대째 황상연(44)씨가 가게를 이어오고 있다. 지난 10월 8일 찾아간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은 주변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다른 점포들에 가려 눈에 잘 띄지 않았다. 그런데 이 날 33㎡(10평) 남짓한 가게 안은 손님들로 북적거렸다. 손님들의 나이대도 20대부터 60대까지 폭넓었다. 특히 딸의 결혼식을 앞둔 50대 아버지가 20대 아들을 데리고 와 함께 옷감을 고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이곳은 세대와 취향이 다른 아버지와 아들이 함께 찾아와 양복을 맞출 수 있는 특별한 양복점이다.”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을 이끄는 황상연 대표의 말이다. 가게가 낡고 인테리어도 세련되지 않지만 양복을 만드는 실력만큼은 최고라는 게 황씨의 말이다. 이곳을 찾는 손님은 한 달 평균 200명 내외. 연간 2000~3000벌의 맞춤양복을 제작한다. 특히 결혼 성수기인 봄에는 가게 앞에서 1시간 이상 줄을 서서 대기할 정도다.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의 시작은 1961년에 황필주씨가 충청남도 아산에서 개업한 한일양복점이었다. 2대인 황의설씨가 이 양복점을 서울 창신동으로 옮기고 나서 ‘티파니 양복점’으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황의설씨의 아들인 황상연씨가 이 양복점을 물려받으며 지금의 ‘3대 손바느질 양복점’으로 개명했다. 3대에 걸쳐 이름은 달라졌지만 변하지 않은 한 가지가 있다. 바로 손바느질로 맞춤양복을 생산한다는 기본 원칙이다. 황 사장에 따르면 시중 맞춤양복점의 경우 치수는 손으로 재고 만드는 건 공장에 맡겨 생산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한다. 자신들처럼 직접 손바느질을 하는 맞춤양복점은 쉽게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다.

황상연씨가 가업을 잇게 된 계기는 급작스럽게 찾아왔다. 아버지 황의설씨가 양복점을 경영하던 1990년대, 맞춤양복시장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대기업에서 기성양복을 대량으로 생산하면서 맞춤양복점마다 위기를 맞았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995년 당시 황의설씨가 운영하던 양복점이 세들어 있던 건물 주인이 재건축을 이유로 나가라는 통보를 해왔다. 당시 황의설씨는 두 아들을 불렀다. 양복점 문을 닫느냐 마느냐 하는 상황에서 가업을 이을 아들이 있는지 물어보기 위해서였다. 그때 흔쾌히 “가업을 잇겠다”고 말한 사람이 바로 장남인 황상연씨였다. 당시 삼육대학교 경영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이던 황씨는 일단 패션학원에 등록했다. 아침에는 대학교에 가서 수업을 듣고, 방과 후에는 패션학원에 다니며 디자인을 공부했다.

1990년대 남성 패션디자이너가 흔치 않던 시절, 날마다 옷감을 들고 등하교하는 황씨는 학교의 유명 인사가 됐다. 그는 무작정 서울시내의 대학교를 돌며 졸업생들에게 자신의 양복점을 홍보하고 다니기도 했다. 2년간 디자인을 공부한 뒤 그의 본격적인 경영혁신이 시작됐다. 일단 ‘티파니양복점’이란 양복점의 간판을 ‘3대 손바느질 양복점’으로 바꿔 달았다. 고객에게 쉽게 양복점의 역사와 장점을 동시에 알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였다. 양복의 단가도 파격적으로 낮췄다. 그러기 위해서 주문이 들어올 때마다 소량씩 구매하던 원단을 대량으로 한꺼번에 구매했다. 1년치를 만들고도 남을 양이었다.

도박에 가까웠던 황씨의 실험은 대성공이었다. 100만원이 넘는 고가의 맞춤양복 가격을 절반으로 낮출 수 있었다. 지금 ‘3대 손바느질 양복점’의 양복 가격은 한 벌당 최소 40만원대부터 시작한다. 이렇게 큰 폭으로 단가를 낮추자 젊은 고객들이 황씨의 양복점을 찾기 시작했다. 황상연 대표는 “내가 젊었을 때 가업을 물려받았기 때문에, 누구보다 내 또래의 관심이 무엇인지 잘 파악할 수 있었다. 가업은 잇는 것도 중요하지만 새롭게 재도약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젊은 사장이 미쳤어요’

패션 공부와 대학 생활을 병행했지만 황씨는 이상하게 힘들지 않았다. 그는 양복점을 찾는 손님이 늘어날수록 오히려 신바람이 났다. 황씨는 맞춤양복점으로는 이례적으로 아파트 단지를 돌며 홍보 전단지를 돌리기도 했다. 그는 전단지를 돌리는 방식에도 차별화를 두었다. 당시 전단지를 담은 흰 봉투를 아파트 현관 열쇠구멍에다 붙였다. 스마트 도어록이 없던 시절, 집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열쇠구멍을 막은 전단지를 떼야 했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호기심을 자극하기 위해 봉투에는 빨간 글씨로 ‘젊은 사장이 미쳤어요’라는 문구를 썼다. 호기심을 자극하는 선전문구 덕분인지 손님들이 하나둘 황씨의 가게를 찾기 시작했다. 가게 앞에는 ‘파격세일’이라고 적힌 대형 플래카드를 내걸었다.

참신한 아이디어로 승승장구하던 황씨에게도 위기는 있었다. 한국맞춤양복협회에서 황씨에게 경고의 메시지를 보낸 것이었다. 당시 상황에 대해 황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협회에서는 내가 맞춤양복의 이미지를 실추시키고 있다고 했다. 단가를 낮추는 행위도 용납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협회에서 나를 퇴출시킬 수도 있으니 조심하라고 했다.”

이 때문에 아버지와의 마찰도 생겨났다. 아버지 역시 아들의 패기 넘치는 마케팅이 오히려 독이 되지 않을까 염려를 한 것이다. 하지만 황씨의 노력과 성실함 앞에서 협회와 아버지는 결국 두 손을 들 수밖에 없었다. 특히 황씨가 2006년에 업계 최초로 실시한 ‘기술자 실명제’는 지금도 뜨거운 반응을 얻고 있다. 기술자 실명제란 양복을 맞출 때 고객이 원하는 기술자를 직접 고를 수 있게 하는 제도이다. ‘3대 손바느질 양복점’에는 30년 이상의 경력을 지닌 기술자가 무려 20명 가까이 일하고 있다. 황 대표는 이들 베테랑 기술자들을 직접 고용해 고객들에게 각기 다른 바느질 손맛을 고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황씨의 노력으로 양복점을 찾는 단골 고객은 늘어나고 있다. 아나운서 허참씨, 장경동 목사 등 유명 인사들도 이곳의 단골손님이다. 가업을 성공적으로 이은 황씨의 앞으로 목표는 무엇일까. “가업을 강제적으로 물려받으라고 강요해서는 안 된다. 다만 가업을 성실하게 잇고 있는 아버지를 보게 된다면 자녀 입장에서는 생각이 달라질 수 있다. 지금 내 모습을 보고 우리 아들이 언젠가 ‘아버지 가업을 잇고 싶습니다’라고 말하는 순간이 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일할 생각이다.”

김태형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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