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빌로니아 쐐기문자로 기록된 ‘키루스 원통비문’.
바빌로니아 쐐기문자로 기록된 ‘키루스 원통비문’.

문명을 구성하는 필요조건들이 있다. 가장 요긴한 두 조건은 문자와 도시다. ‘문자’는 인류 문명과 문화의 유전자인 기억을 표시하는 가시적 기호이자, 그 문명을 공유하는 집단이 원활하게 소통하기 위한 도구다. 현재까지 밝혀진 가장 오래된 문자는 기원전 3200년, 지금 이라크 지역 남부에서 등장하기 시작한 수메르어다. 수메르어는 그림문자로 시작하여 점점 음절문자로 발전해 후에 이곳에 들어와 거주한 아카드인의 문자가 되었다. ‘도시’는 공동의 기억을 향유하는 집단이 문자를 기반으로 행정 기반을 구축한 곳이다. 도시는 그들의 공공의 기호인 문자가 사용되는 추상적인 공간이다.

인류는 기원전 1만2000년경 농업을 발견하여 사냥채집경제에서 농업정착경제로 급격히 재편되었다. 맨 처음 농업이 발견되어 실행된 장소는 서쪽으로는 이집트에서 시작해 이스라엘, 시리아, 터키, 이라크를 거쳐 동쪽으로 이란까지 이르는 지역이다. 학자들은 이 지역이 초승달처럼 생겨 ‘비옥한 초승달(Fertile Crescent)’이라고 불렀다. 위대한 두 오리엔트문명인 수메르문명은 기원전 3200년부터, 이집트문명은 기원전 3100년부터 등장하였다. 두 문명은 기원전 6세기경 몰락하고 그 유산을 그리스를 중심으로 등장한 아테네문명으로 넘긴다. 인류 문명의 중심지가 고대 오리엔트에서 그리스로 넘어가는 중요한 시점이다.

고대 오리엔트문명이 그리스로 넘어가는 과정은 쉽지 않았다. 신과 종교를 기반으로 쌓아올린 문화가 인간과 예술을 기반으로 구축될 서양으로 이전하는 과정에 등장한 제국이 있었다. 기원전 6세기, 오늘날 이란에 등장한 페르시아제국이다. 페르시아제국은 동서양의 문명을 잇는 가교문명이자 인류가 최초로 이룬 제국이다. 동쪽으로는 인도와 간다라, 북쪽으로 스키타이, 서쪽으로는 터키와 이오니아, 마케도니아, 남쪽으론 이집트와 누비아까지, 인류는 역사상 처음으로 제국을 형성하였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 키루스

고대 페르시아 왕 키루스는 기원전 6세기 인류 최초로 제국을 만들었다. 그가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인가. 종교, 이념, 인종, 역사가 다른 23개 나라를 어떻게 하나의 이데올로기로 통일할 수 있었을까. 영국 역사학자 찰스 프리먼은 키루스의 업적을 다음과 같이 평가한다. “키루스가 이룩한 업적이 알렉산더 대왕보다 훨씬 더 위대하다.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20년에 아케메네스 왕조(페르시아 왕조)를 파괴하였지만 자신이 정복한 지역에 안정을 가져다주지 못했다.”

미국 건국의 아버지인 토머스 제퍼슨, 벤저민 프랭클린, 이스라엘 독립의 주역인 다비드 벤-구리온, 그리고 현대 경영학의 창시자인 피터 드러커도 키루스를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리더로 뽑는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더욱 더 아이러니한 사실은 페르시아와 전쟁 중에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역사가이자 소크라테스의 제자인 크세노폰이 ‘키루스 교육기’에서 “키루스는 고대 그리스인이 흠모하고 배워야 할 이상적인 리더”로 소개했다는 점이다.

거대한 오리엔트문명이 무너지고 페르시아제국의 시작을 알리는 그림이 있다. 네덜란드 화가 렘브란트가 1635년에 그린 유화 ‘벨사살의 연회’다. 이 그림은 현재 영국 ‘내셔널갤러리’에 소장 중이다. 크기가 167.6×209.2㎝나 되는 대형화다. 렘브란트는 구약성서 ‘다니엘서’ 5장에 등장하는 내용에 영감을 받아 ‘벨사살의 연회’를 그렸다. 벨사살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한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의 아들이다. 벨사살 왕은 예루살렘에서 약탈한 성전 그릇과 잔을 자신들이 신하들을 위해 개최한 술잔치 용기로 사용하였다. 렘브란트는 이들이 흥겹게 잔치를 벌이고 있는 동안 신의 손이 공중에 나타나 벽에 글자를 쓴 순간을 포착하였다. 이 글자는 히브리어지만 언어는 아람어다. 아람어는 오늘날 영어처럼 당시 고대 근동의 국제공용어로 쓰였다. 페르시아제국도 외교 언어로 차용하였다.

렘브란트는 친구이자 랍비인 므나세 벤 이스라엘로부터 히브리어 문자를 배웠다. 아람어를 비롯하여 셈족어는 대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는 것이 일반적인 형태이나, 이 그림에서 렘브란트는 아람어를 왼쪽에서 시작하지만, 위에서 아래로 썼다. 그는 비문에서 두 군데 실수를 범했다. 첫째 줄 맨 끝 글자는 ‘사멕(S)’이어야 하는데, 실수로 비슷한 글자인 ‘멤(M)’으로 적었다. 그리고 신의 손과 연결된 글자를 ‘눈(N)’으로 써야 하는데 ‘자인(Z)’으로 잘못 그리는 실수를 범했다. 그러나 렘브란트의 아람어 글씨는 오랜 수련을 한 흔적이 보인다.

이 아람어 문장을 영어로 옮기면 ‘MENE, MENE, TEKEL, UPHARSIN’이다. 이 문장을 번역하자면 ‘(신이 바빌론의 운명을 정했다.) 계산되어, 계산되어, 저울질하여, 나뉘었다’이다. ‘다니엘서’는 이 말뜻을 ‘신이 바빌론의 마지막을 계산하였고, 저울에 올려 보아 결함이 발견돼서, 나라를 나누어 메대와 페르시아에 줄 것이다’로 풀이한다. 벨사살 왕은 아람어에 정통한 바빌로니아 사제들에게 해석을 요구하였지만 아무도 읽을 수 없었다. 렘브란트는 그들이 해석하지 못했던 이유를 글자 배열로 설명한다. 즉 좌우 배열인 아람어 문자를 신이 상하 배열로 나타냄으로써 바빌로니아 학자들이 해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 글을 다니엘만 해독할 수 있었다고 기록돼 있다. 바로 그날 밤, 페르시아 왕 키루스가 바빌론을 정복한다.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 키루스

‘키루스 원통비문’의 충격적 내용

키루스의 바빌론 정복 내용을 자세히 기록한 유물이 있다. ‘키루스 원통비문’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쐐기문자로 기록되었다. 현재 영국 런던의 영국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기원전 539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키루스 2세는 바빌로니아제국의 수도인 바빌론을 함락시킨다. 바빌론 함락은 오리엔트문명이 서양문명으로 옮겨가는 시발점이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스스로를 ‘아리아인(aryan)’이라고 불렀다. ‘아리아’는 원래 문화·종교적 용어로 ‘하늘의 뜻을 알고 그 길을 묵묵히 수행하는 사람으로부터 나오는 숭고함’이다. 스스로를 아리아인으로 지칭한 민족은 고대 인도인과 이란인이다. 이들은 원래 기원전 4000년경부터 러시아 남부에 거주하던 한 민족이었다. 이들은 기원전 2000년경 남쪽으로 내려오다 한 갈래는 인도로, 다른 갈래는 이란으로 내려가 정착하였다. ‘이란(Iran)’이란 용어도 어원적으로 ‘아리안’과 같다. 고대 페르시아인은 기원전 539년에 바빌로니아제국을, 기원전 525년에 고대 이집트를 정복하여 오리엔트를 통일한다. 이들은 원래 오리엔트에 거주하던 민족이 아니라 인도·유럽인이었다. 바빌로니아의 수도 바빌론은 오늘날 이라크의 중앙을 가로질러 흐르고 있는 유프라테스강 유역에 위치한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점령함으로써 그 도시뿐만 아니라 바빌로니아가 점령한 모든 지역인 아시리아, 시리아, 레바논, 이스라엘에 이르는 광활한 지역을 차지하게 되었다.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Hormuzd Rassam)은 오스만제국이 위치했던 모술 출신이었다. 그는 20살 때부터 모술에서 아시리아 유물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그러다가 1850년 영국박물관 출신 고고학자 오스틴 헨리 레이어드를 만나 본격적으로 고고학 발굴을 시작하였다. 라삼은 레이어드의 도움으로 영국 옥스퍼드대에서 본격적으로 수학하였다. 1877년 레이어드는 오스만제국의 영국대사가 되어, 바빌론 발굴을 라삼에게 일임한다. 라삼은 1879년 3월 바빌론의 신전인 에사길라의 ‘정초매장물(定礎埋藏物)’에 놓여 있는 ‘키루스 원통비문’을 발견하였다. ‘정초매장물’이란 신전과 궁전 등 기념물적인 건물을 짓거나 수리할 때, 그 사실을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 시공주가 건물의 기초 부분에 놓은 유물이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길이가 22.5㎝, 원통 지름이 10㎝인 가운데가 부풀어 오른 배럴 모양의 진흙 비문이다. 이 비문은 기원전 539년 키루스의 바빌론 점령을 기술하고 있지만, 제작 연대는 불분명하다. 키루스가 바빌론을 점령하고 난 뒤 바빌론과 에사길라 신전을 재건하면서 정초매장물로 매장해 놓았다. 여기에 기록된 쐐기문자는 아카드어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대왕이 자신의 공적을 새겨놓기 위해 고대 페르시아 문자를 제작한 연대는 기원전 521년이다. 키루스는 다리우스 이전, 당시 오리엔트의 전통적 학문 문자인 바빌로니아의 쐐기문자로 원통비문을 기록하였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모두 45행, 크게 여섯 부분으로 나뉜다. 1)1~11행: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에 대한 비난 2)11~19행: 바빌론 신 마르두크가 키루스를 선택함 3)20~24행: 키루스의 명칭과 족보, 그리고 평화로운 바빌론 입성 4)25~34행: 바빌론 재건을 명령함 5)35~37행: 키루스와 그의 아들 캠비세스를 대신하여 마르두크 신에게 기원 6)38~45행: 구체적인 바빌론 재건 내용 등이다.

‘키루스의 원통비문’을 발굴한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
‘키루스의 원통비문’을 발굴한 고고학자 호르무즈드 라삼.

적대국의 왕을 선택한 신

필자는 ‘키루스 원통비문’의 내용을 아카드어에서 한국어로 처음 번역하여 소개하고자 한다. 1~11a행은 바빌로니아의 벨사살 왕에 대한 비난이고, 11b~19행에서는 마르두크신이 키루스를 선택한다. 바빌로니아신이 적대국인 페르시아제국의 왕인 키루스를 선택했다는 사실이 충격적이다.

‘(11b)마르두크신은 모든 나라를 샅샅이 조사하였다. (12)그는 자신이 선택할 수 있는 의로운 왕을 찾고 있었다. 그는 안샨이라는 도시의 왕인 키루스의 손을 잡아 그의 이름을 불렀다. 그리고 그를 만물을 지배하는 왕으로 크게 선포하였다. (13)그는 구티 땅과 메대 군인들로 그의 발 앞에 엎드려 절하게 만들었다. 그는 머리가 검은 백성들을 정의와 의로움으로 인도할 것이다. (14)마르두크신은 그들을 키루스가 돌보도록 맡겼다. 자신의 백성을 돌보는 신들의 주인인 마르두크신이 기쁜 마음으로 그의 훌륭한 행동과 진실한 마음을 보았다. (15)그래서 마르두크신은 키루스에게 바빌론에 가라고 명령했다. 그는 그를 바빌론으로 가도록 인도하였다. 그는 친구처럼 짝처럼 키루스 옆에서 걸었다. (16)그의 방대한 군대는 강에 있는 물처럼 많아 헤아릴 수 없었다. 그들은 키루스 옆에서 완전 군장한 채로 행진하였다. (17)마르두크신은 키루스가 전쟁이나 전투 하나 없이 바빌론에 입성하게 만들었다. 키루스는 바빌론을 어려움에서 구원하였다. 마르두크신은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는 바빌론 왕 나보니두스를 키루스에게 넘겼다. (18)바빌론, 수메르와 아카드의 모든 백성들, 귀족들과 지방 장관들이 키루스 앞에서 절하며 그의 발에 입을 맞추었다. 그리고 그의 왕권을 기뻐하고 그들의 얼굴은 환하게 피어났다. (19)마르두크신의 도움으로 모든 사람들은 죽음, 곤란, 그리고 어려움으로부터 구원되었다. 백성들은 그를 축복하고 그의 이름을 찬양하였다.’

‘키루스 원통비문’은 바빌론의 왕 벨사살이나 나보니두스를 바빌론 사람들의 삶을 힘들게 만들고 그들의 신앙을 황폐하게 만든 악한 인물로 묘사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히려 정복자인 키루스를 해방자 혹은 구원자로 묘사했다는 점이 특이하다. 특히 바빌론의 주신인 마르두크신이 키루스를 통치자로 선택하고 그를 통해 자신의 신전을 재건축했다는 점은 충격적이다.

구약성서에도 등장하는 원통비문의 내용

이 내용은 바빌론을 점령한 페르시아인들의 의도적 프로파간다인가 아니면 역사적 진실인가. 키루스는 자신이 점령한 나라 국민의 안녕과 인권을 보장한 통치자인가. 만일 유사한 내용을 지닌 문헌이 다른 문명권에서도 발견된다면, ‘키루스 원통비문’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일 가능성이 높다. 실제로 이 당시 기록된 유대인의 문헌에서도 이와 비슷한 기록이 발견된다. 구약성서 ‘에스라서’ 1장 1~4행이 바로 그런 내용이다.

‘(1)페르시아 왕 고레스가 왕위에 오른 첫해다. 주께서는, 예레미야를 시켜서 하신 말씀을 이루시려고, 페르시아 왕 고레스의 마음을 감동시키셨다. 고레스는 온 나라에 명령을 내리고, 그것을 다음과 같이 조서로 써서 돌렸다. (2)“페르시아 왕 고레스는 다음과 같이 선포한다. 하늘의 주 하나님이 나에게 이 땅에 있는 모든 나라를 주셔서 다스리게 하셨다. 또 유다에 있는 예루살렘에 그의 성전을 지으라고 명하셨다.” (3)이 나라 사람 가운데서, 하나님을 섬기는 모든 사람은 유대에 있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서, 그곳에 계시는 하나님, 곧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의 성전을 지어라. 그 백성에게 하나님이 함께 계시기를 빈다. (4)잡혀온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서, 누구든지 귀국할 때에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있으면, 그 이웃에 사는 사람은 그를 도와주어라. 은과 금과 세간과 가축을 주고, 예루살렘에 세울 하나님의 성전에 바칠 자원 예물도 들려서 보내도록 하여라.’

위 내용은 ‘키루스 칙령’이라고 부른다. 학자들은 이 칙령이 기원전 522년에 내려졌다고 추정한다. ‘키루스 원통비문’과 내용이 유사하다. 바빌로니아제국은 기원전 586년 예루살렘을 함락해 그 주민들을 바빌론으로 끌고 왔다. 키루스가 539년 바빌론을 탈환하고 그곳에 있었던 유대인들을 해방시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도록 허용하였다. 그는 다시 이 칙령을 내려, 바빌로니아 왕 네부카드네자르가 파괴하였던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칙령을 내린다. 키루스는 페르시아제국의 보물창고가 있는 에크바타나에서 자신들의 자금으로 예루살렘을 재건하도록 독려하였다.

유대인의 키루스 평가는 충격적이다. 구약성서 ‘이사야서’는 3명의 저자가 서로 다른 시기에 저술한 내용이다. ‘이사야서’ 40~55장은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온 저자가 이사야의 이름으로 저술한 내용이다. ‘이사야서’ 45장 1행에 키루스에 대한 내용이 나온다.

‘주께서 ‘기름 부어 세우신 이(메시아)’에게 말씀하신다. “고레스에게 말한다. 내가 그의 오른손을 굳게 잡아, 열방을 그 앞에 굴복시키고, 왕들의 허리띠를 풀어 놓겠다. 그가 가는 곳마다 한 번 열린 성문은 닫히지 못하게 하겠다. 고레스는 들어라.”’

2행 이후에 신이 왜 키루스를 선택했는지 장황하게 설명한다. 이 글의 저자는 키루스를 ‘기름 부어 세우신 이’로 부른다. ‘기름 부어 세우신 이’를 히브리 원어로 바꾸면 ‘메시아(Meshiah)’다. 키루스는 바빌론에 유배 중인 유대인들을 해방시켰을 뿐만 아니라 제국의 보물창고를 동원하여 예루살렘을 재건하였다. 만일 키루스의 칙령이 없었다면, 유대교도 그리스도교도 역사에 등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바빌론에 포로로 잡혀간 한 무명 유대인이 키루스를 ‘메시아’, 즉 구원자로 부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벨사살의 연회’. 바빌론이 페르시아 키루스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묘사했다.
렘브란트의 그림 ‘벨사살의 연회’. 바빌론이 페르시아 키루스에 의해 멸망할 것이라는 신의 계시를 묘사했다.

키루스의 장점 ‘엔노이아’

인간은 자신의 자취를 남기기 위해서, 진화생물학자의 용어를 빌리자면, 자신의 유전자를 남기기 위해 물건들을 남긴다. 이런 물건들 중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인류에 보편적이며 혁신을 유발하는 탁월한 유물들이 있다. 인간은 조용히 사라지지만, 유물들은 생존하여 시대에 따라서 자신에 대한 다양한 해석들을 제공한다. 아카드어로 기록된 ‘키루스 원통비문’과 히브리어로 기록된 ‘에스라서’는 왜 키루스가 인류 역사상 최초의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는지 알려준다. 키루스는 자신이 정복한 나라의 다른 관습, 민족, 종교, 신앙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였다.

키루스가 창건한 페르시아제국은 알렉산더 대왕이 등장하기 전까지 200년 동안 톨레랑스의 정신을 넘어 역지사지를 제국의 근간으로 삼아 안정된 제국의 틀을 놓았다. 바빌론에 유배 중이었던 유대인 예언자는 키루스를 자신들을 구원할 ‘메시아’로 칭하였다. 실제 키루스는 바빌로니아제국이 멸망할 때 바빌론 백성들의 안녕과 종교를 보존하고 장려하였다. 유대 문헌 ‘이사야서’와 바빌로니아 문헌 ‘키루스 원통비문’에서 피정복자들은 자신들의 궁궐과 신전이 키루스의 명령에 따라 페르시아제국의 재화로 재건되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위대한 그리스 역사가이며 소크라테스의 제자였던 크세노폰도 ‘키루스 교육기’라는 책에서 가장 이상적인 왕의 모습을 그리스가 아닌 페르시아제국의 창건자인 키루스에서 찾았다. 키루스는 자신의 철학만이 옳다고 생각한 독선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나의 처지로 전환하여 깊이 성찰하였다고 전해진다.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장점을 고대 그리스어로 ‘엔노이아(ennoia)’라고 말했다. 엔노이아는 ‘자신의 상식에서 벗어나 다른 사람의 처지를 깊이 묵상하고 헤아리는 능력’이다. 키루스는 자신의 역지사지의 깨달음을 실천으로 옮겼다. 그는 최초의 세계 제국을 창건한 제왕으로서만 기억되는 인물이 아니다. 자신이 정복한 백성들의 인권을 보장하고 그들의 삶을 개선한, 인류 최초의 인권선언문을 만든 리더로 기억된다.

키루스는 자신을 넘어선 위대한 인간, 위대한 리더가 되려는 우리에게 묻는다. “당신은 다른 사람, 심지어는 원수의 처지를 깊이 묵상하여 그들의 입장에 서 본 일이 있습니까? 그들을 위해 자신의 재화를 동원하여 도와준 적이 있습니까?”

배철현 서울대 종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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