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창문을 열어 환기를 시키는데 쌀쌀한 바람이 들어온다. 밤새 기온이 많이 떨어졌나 보다. 옷장에서 두툼한 외투를 꺼내다 보니 생각나는 학생이 있다. 몇 년 전 일이다. 9월 초, 3학년 학생 여럿이 교무실에 와서 우리 반에 전학 온 학생이 없느냐고 묻는다. 다른 학교에서 강제 전학생이 우리 학교에 배정되어 온다는 소문을 들었다며, 이름은 다솜이(가명)라고 한다. 다솜이는 그 학교에서 유명했다고 한다. 교칙을 어기고 후배 학생들을 여러 번 괴롭힌 것이 문제가 되어 우리 학교로 강제 전학을 오게 되었다고 한다. 우리 반의 학생 수가 적으니 우리 반에 배정될 거라고 나름 논리적인 의견과 함께, 학생들은 저마다 걱정을 한마디씩 보탠다. 과연 그랬다. 오후 늦게 다솜이는 어머니와 함께 학교에 왔고 우리 반에 배정되었다. 어머니와의 간단한 면담을 끝내고 마주 앉은 다솜이는 좀처럼 말문을 열지 않았다. 다음 날부터 학교에 나왔지만 누구하고도 말을 하지 않았다. 수업시간에도 얼굴을 책상에 파묻고 엎드려 수업을 전혀 듣지 않았다. 학생들도 슬슬 피하고 선생님들도 선뜻 다가가기 어려운 듯했다. 무엇보다 다솜이가 마음의 문을 열지 않았다. 사회가 자신을 버렸다고 생각하고 자신을 스스로 격리시키려는 듯했다. 쉬는 시간에 가서 어깨에 손을 가볍게 올리고 이야기를 해도, 조용한 장소에서 대화를 시도해도 고개를 돌려버린다. 중간고사는 이름만 쓰고 백지로 제출했다. 당연히 성적은 제일 낮게 나왔다.

10월 초 쉬는 시간이었다. 다솜이가 두툼한 노란색 아웃도어를 입고 엎드려 있었다. 계절에 안 맞게 두툼한, 유명 아웃도어 브랜드의 옷이었다. 다솜이 옆에 가서 “와! 이게 그 유명한 옷이구나! 정말 따뜻하고 좋겠다!”라며 눈치를 살폈다. 놀랍게도 고개를 들고 말을 하는 것이 아닌가. 옷값이 90만원이 넘고, 옷이 무척 따뜻하다고도 하고, 옷을 구입하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한 달 넘게 했다고. 다른 반에까지 소문이 났는지 많은 학생들이 교실에 몰려와서 만지고, 입어보고, 부러워하며 교실이 시끌시끌해졌다. 이를 계기로 다솜이는 학생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나와도 조금씩 이야기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강제 전학되어 자신의 이야기가 나쁘게 전달되고, 편견을 가지고 대하는 듯해서 어려웠다고 한다. 이날 이후 다솜이는 수업에도 조금씩 참여하기 시작했다. 기말고사도 나름 노력한 결과가 나와 고등학교에 진학할 수 있었다.

어릴 때 펌프에서 물이 나오는 것이 참 신기했다. 펌프질을 하면 물이 조금씩 나오기 시작해서 콸콸 물이 나오면 환호성을 지르며 기뻐했다. 처음에는 방법을 몰라서 펌프질을 아무리 해대도 물이 나오지 않았다. 그러던 중 아버지께서 요령을 알려주셨다. 펌프질을 할 때 중요한 것이 마중물이다. 지하 깊은 곳의 물을 끌어올리기 위해서는 먼저 마중물을 넣어주고 펌프질을 해야 한다. 조금의 마중물이 땅속 깊이 있는 물을 끌어내는 것이다.

학생들과의 대화는 참 힘이 든다. 그런데 학생들이 이야기하고 싶어하는 것, 학생들이 듣고 싶어하는 것을 말하면 학생들은 말하기를 꺼리지 않는다. 대화에서 마중물이 필요한 이유이다. 학생들이 이야기하기 어려워하는 이유는 그들의 이야기를 꺼내줄 적절한 마중물이 없어서이다. 마중물을 준비하고 학생들을 만나서 이야기하면 대화도 잘되고 원만한 관계를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오봉학

서울 동성중학교 상담교사

오봉학 서울 동성중학교 상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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