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 서울 송파구의 한 아파트에서 남편을 제외한 아내, 딸, 아들이 살해당한 사건이 있었다. 피 묻은 칼이 술에 취해 잠든 남편 곁에서 발견되어 남편을 유력한 용의자로 지목했지만 실상은 아내가 저지르고 자살한 사건이었다. 자신의 혈액형을 잘못 알고 있던 남편의 오해로 인해 부도덕한 행위를 끝없이 의심받던 아내가 극단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이런 사건은 과학 과목 ‘유전’ 단원 중 혈액형 수업의 소재로 이용된다. 십수년 전 어느 날, 과학실에서 혈액형 실험 수업이 끝나고 A군이 주저하며 다가왔다. “선생님! 제가 우리 엄마와 아빠의 친자식이 아닌 것 같아요. 제가 아는 혈액형으로는 그래요.” A군이 아는 대로라면 친부모에게서 나올 수 없는 혈액형이었다. 나는 난감해하다가 “부모님께 혈액형을 다시 한 번 여쭤 보렴. 그래도 그대로라면 다시 한 번 검사해 보면 좋겠어”라고 말했다. 다행히 A군 어머니는 그동안 자신의 혈액형을 잘못 알고 살아온 것으로 판명났고, A군은 밝은 표정을 되찾았다. 매년 혈액형에 관한 수업을 할 때면 “과학을 왜 배워야 해요?”라고 묻던 학생들도 귀 기울여 수업을 듣는다.

요즈음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교육은 일상생활과 직접적인 연결성을 중요시한다. 과학시간에 신경계를 배우면서 ‘뇌사를 받아들일 것인가’에 대한 토론수업을 하기도 하고, 영양소와 기초대사량을 배우면서 ‘청소년을 위한 김밥 만들기’도 하며, 산(酸)에 대해 가르칠 때에는 ‘황산 테러 사건’을 소재로 등장시킨다. 이런 형태의 수업은 기성세대가 다니던 학교의 수업 풍경과 꽤 다른 모습이다. 학생들은 참 많이 변했다. 그들은 인터넷에 널려 있는 지식을 두고 학교에 앉아서 관심 없는 부분까지 배우는 것에 필요성을 못 느끼고 지루해 한다. 실생활과 밀접한 소재를 기반으로 하는 수업에 대한 반응은 높지만 이론 중심의 수업에는 거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흥미진진한 소재가 아니면 금세 집중력을 잃고 딴짓을 한다.

교사들은 이런 반응들과 끝없이 부딪힌다. 얼마 전 “과학이 너무 어려워요”라며 기본 개념조차 안 들으려 하는 몇몇 학생들에게 ‘과학을 배워야 하는 이유’를 설명한 적이 있었다. “얘들아 우리나라 중등과학교육의 목표는 바른 민주시민 의식을 갖춘 과학적 소양인 육성에 있어!” 아이들이 갑자기 빵 터졌다. “민주시민 의식이래~” 내 자신이 머쓱해진 순간이었다. “왜 웃는 거야?”라고 물었더니 크게 웃던 학생이 “그냥이요”라고 답했다. 다행히 한 학생이 “과학적 소양이 뭐예요?”라고 질문해 침착하게 ‘민주시민 의식’과 ‘과학적 소양’에 대한 설명을 마칠 수 있었지만 몇 명이나 내 얘기를 귀담아들었을까 의심이 갔다.

NSTA(미국 전국과학교사협회)는 ‘과학적 소양’을 여러 각도에서 설명하는데, 그중 하나는 ‘과학, 기술의 개념과 윤리적 가치에 근거하여 일상생활에서 직면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것’으로 정의했다. 학교에서의 과학 교육은 과학 분야의 인재를 육성하는 것보다 과학적 소양을 키우는 노력이 먼저라고 생각한다. 요즘 우리나라의 일련의 사건으로 볼 때 이러한 소양 육성은 과학 교육에 국한되지 않는 것 같다. 학교 교육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생각해 본다.

김경원

경기도 성남 풍생중 교사

김경원 경기도 성남 풍생중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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