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1월 28일 서울 강남구의 카페베네 압구정갤러리아점에서 정호승 시인(오른쪽)이 주간조선 독자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지난 11월 28일 서울 강남구의 카페베네 압구정갤러리아점에서 정호승 시인(오른쪽)이 주간조선 독자들을 위해 강의를 하고 있다. ⓒphoto 장은주 영상미디어 객원기자

‘울지 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살아간다는 것은 외로움을 견디는 일이다

공연히 오지 않는 전화를 기다리지 마라

눈이 오면 눈길을 걸어가고

비가 오면 빗길을 걸어가라

갈대숲의 가슴 검은 도요새도 너를 보고 있다

가끔은 하느님도 외로워서 눈물을 흘리신다…’

정호승 시인이 자신의 시 ‘수선화에게’를 낭독하자 카페의 모든 사람들이 숨을 죽이고 경청했다. 정호승은 긴 설명이 필요 없는 한국 문단의 대표 시인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등 그가 내놓는 시집은 항상 서점 베스트셀러 코너에 이름을 올린다. 정호승은 수십여 편의 시가 대중가요로 만들어졌을 정도로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시인으로 꼽힌다. 그런 정 시인이 주간조선 독자와 만남을 가졌다. 지난 11월 28일 서울 지하철 분당선 압구정로데오역 6번 출구 앞의 ‘카페베네’에서 정호승 시인의 특강이 열렸다. ‘정호승 시인과 커피 한잔’이란 주제에 걸맞게 강의 장소는 진한 커피 향기가 가득한 카페였다. 강의가 열린 카페베네 2층에서는 갤러리아백화점 압구정점이 정면으로 보였다. 백화점은 휘황한 조명으로 행인들의 발길을 잡고 있었다. 하지만 이날 강연에 참석한 사람들은 백화점의 화려함에 시선을 뺏기지 않았다. 정호승 시인과 주간조선 독자들은 자본주의의 상징인 명품백화점을 등지고 2시간 동안 시를 이야기했다. 20대 문학청년부터 70대의 시를 사랑하는 사람들까지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의 연령대도 폭넓었다. 이들에게 특별한 준비물은 필요 없었다. 바쁜 일상을 잠시 내려놓고, 정호승 시인의 감성을 만끽할 시심(詩心)만 있으면 충분했다. 카페베네에서 제공한 따뜻한 커피 한잔은 늦가을의 매서운 추위를 녹였다. 강의에 참석한 사람들은 시(詩)와 커피의 향기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시인은 ‘여행’이란 자신의 시를 낭독했다. ‘…사람이 여행하는 곳은 사람의 마음뿐이다/ 사람이 여행할 수 있는 곳은 사람의 마음의 설산뿐이다’. 시인은 “우리는 모두 사람의 마음속에 담겨 있는 사랑을 찾아서 인생이란 여행을 하고 있다”면서 “사람의 사랑을 찾아나서는 길은 맨발로 설산을 오르는 것처럼 힘들고 고통스러운 과정이다”라고 말했다. 그가 작품에서 오지와 설산을 시어로 사용하게 된 이유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이어서 시인은 프랑스 빈민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피에르 신부가 남긴 명언을 들려줬다.

“삶이란 사랑하는 법을 배우기 위한 얼마간의 자유시간이다.” 시인은 이 문장에서 ‘얼마간’이라는 단어에 주목했다. 그러면서 그는 오늘 할 일을 내일로 자주 미뤘던 자신의 젊은 시절을 회상했다. 그는 “그렇지만 인생은 무엇을 미루기에는 너무나 짧은 시간”이라며 “마치 새가 이 나뭇가지에서 바로 옆의 나뭇가지로 후두둑 날아가는 찰나만큼 인생은 짧다”고 말했다. 시인은 어느 순간 자신도 ‘지공대사’가 돼 버렸다고 웃으며 말했다. 지공대사란 만 65세 이상이 되어 ‘지하철을 공짜로 타는 세대’를 가리키는 말이다. 객석에서도 웃음이 터져 나왔다. 이때 시인은 사람들을 향해 “지금까지 여러분들은 사랑하는 법을 배우면서 살아오셨습니까”라고 질문을 던졌다. 이 질문에 자신 있게 대답을 한 사람은 없었다. 곧바로 시인은 사랑은 무엇으로 완성되는지에 대해 강의를 이어갔다.

“사랑은 고통이다”

그는 사랑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올해로 94세이신 어머니는 아직도 나를 걱정한다. 바로 자식을 향해 어머니로서 무한한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시기 때문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라는 그림이 보여주듯 사랑은 용서라고 생각한다. 아버지가 집 나간 아들이 돌아왔을 때 품고 사랑해주는 모습에서 진정한 사랑이 무엇인지를 깨닫게 한다.” 사랑의 본질은 책임과 용서에 있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시인은 “자식을 향한 어머니의 사랑이 절대적인 것처럼 사랑은 결코 상대적인 개념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헨리 나우웬이 쓴 ‘탕자의 귀향’이라는 책을 소개했다. 이 책 첫장에는 “관계가 힘이 들 때 사랑을 선택하라”는 문장이 적혀 있다. 시인은 “내가 50대 중반이 넘어서 이 말을 알게 됐다”면서 “진작에 저 말을 알았더라면 내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고 고백했다.

시인은 관계에 대한 자신의 시 ‘풍경 달다’를 낭독했다. ‘…먼 데서 바람 불어와/ 풍경 소리 들리면/ 보고 싶은 내 마음이/ 찾아간 줄 알아라’. 풍경 소리가 아름다운 이유는 바로 바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마치 풍경 소리와 바람처럼 서로의 가치를 잘 드러낼 수 있는 관계가 바로 사랑이라고 보았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낭독했다.

‘나는 그늘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그늘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이 없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나는 눈물을 사랑하지 않는 사람을 사랑하지 않는다’. 시인은 “시는 설명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의 ‘그늘’과 ‘눈물’은 고통을 의미한다”고 말했다. 고통은 곧 사랑이라는 게 그의 말이다.

그는 “모든 색채는 빛의 고통이다”라고 말한 괴테의 말을 다시 소개했다. 시인 역시 사랑은 기쁨을 통해 얻어지는 게 아니라 고통이 있어야 완성되는 것이라며 강연을 마무리했다. 강의가 끝나자 강연에 참석한 한 남성이 “오늘 강연을 듣고 20대 청년에게 조언을 해주려고 했는데 어떤 말을 해줘야 하는가”라며 시인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에 시인은 “꽃밭이 아름다운 이유는 다양한 꽃이 함께 피어 있기 때문”이라며 “타인과의 부정적인 비교보다는 나 자신의 가치를 발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답했다.

강연이 끝난 뒤에도 정호승 시인에게 사인을 받거나 사진촬영을 하는 등 짧은 만남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강의를 들은 한 20대 대학생은 “평소 시집으로만 만났던 시인을 실제로 만나 강연을 들어 보니 그와 함께 문학기행을 다녀온 기분이 들었다”고 말했다. 한 50대 여성은 “지치고 힘들었던 일상을 벗어나 순수했던 문학소녀의 시절로 돌아간 기분이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김태형 기자
저작권자 © 주간조선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