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div>1</b>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형의 유골을 묘에 넣고 있다. photo AP<br><b>2</b> 호찌민의 영묘. photo 위키피디아<br><b>3</b> 베네수엘라 군 박물관에 있는 우고 차베스의 묘. photo 위키피디아<br><b>4</b> 미라가 된 레닌의 시신. photo 위키피디아<br><b>5</b> 마오쩌둥의 시신. photo 유튜브<br><b>6</b> 김정일의 시신. photo 위키피디아
1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이 형의 유골을 묘에 넣고 있다. photo AP
2 호찌민의 영묘. photo 위키피디아
3 베네수엘라 군 박물관에 있는 우고 차베스의 묘. photo 위키피디아
4 미라가 된 레닌의 시신. photo 위키피디아
5 마오쩌둥의 시신. photo 유튜브
6 김정일의 시신. photo 위키피디아

쿠바 동부 도시인 산티아고 데 쿠바 인근의 산타 이피헤니아 묘지. 이곳에는 쿠바 독립의 아버지인 호세 마르티(1853~1895)가 잠들어 있다. 마르티는 스페인으로부터 쿠바의 독립운동을 이끈 혁명가이자 시인으로 지금도 쿠바 국민의 존경을 받는 인물이다. 마르티는 스페인군과의 교전 중 42세의 나이로 생을 마감할 때까지 쿠바 독립을 위해 싸웠다. 쿠바의 국민가요인 ‘관타나메라(Guantanamera·관타나모의 여인)’의 가사는 마르티가 쓴 시들 중 하나다. 쿠바 최고 등급의 국가훈장의 이름도 ‘호세 마르티’다. 또 쿠바 수도 아바나의 국제공항도 ‘호세 마르티 공항’으로 불린다.

마르티의 불꽃 같은 삶은 쿠바는 물론 중남미의 많은 젊은이들에게 영향을 주었으며, 이들 중 대표적 인물이 쿠바 공산혁명의 지도자인 피델 카스트로(1926~2016) 전 국가평의회 의장이다. 마르티는 독립 투쟁을 벌이면서도 “단 한 사람이라도 불행한 국민이 있다면 그 누구도 편안하게 잘 수 있는 권리가 없다”며 소외된 약자들을 챙겼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마르티의 철학을 무상교육과 무상의료 등 각종 정책을 통해 실현했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쿠바의 정체성은 단지 공산주의 이념만이 아니라 독립운동가 호세 마르티의 사상에서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하곤 했다.

미라 되기를 거부한 카스트로

쿠바를 52년2개월간 통치해 전 세계에서 가장 오래 집권한 독재자로 기네스북에 등재된 카스트로 전 의장의 유해가 지난 12월 4일 마르티의 묘 옆에 안장됐다. 카스트로 전 의장은 평소에도 자신이 죽으면 마르티 곁에 묻히고 싶다고 말하곤 했다. 평생을 공산주의를 위해 투쟁해온 카스트로가 마르티의 사상에 더욱 심취했을 뿐만 아니라 마지막 휴식처로 마르티의 묘 옆에서 잠들었다는 것은 아이러니하기만 하다.

게다가 카스트로는 지난 11월 25일 90세를 일기로 사망한 후 미라로 영구히 보존되고 있는 공산혁명 지도자와 독재자들과는 달리 바로 다음날 화장된 것도 역시 아이러니하다. 공산혁명 지도자와 독재자들이 사망하면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유리관에 밀랍 인형처럼 안치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카스트로의 시신은 유언에 따라 화장돼 한 줌의 재가 됐다. 카스트로는 우상화를 체질적으로 싫어했다. 그는 늘 육체나 물질보다 정신과 사상을 강조했다. 마르티가 “내 육체는 죽을지라도 내 사상은 사라지지 않는다”고 말했듯이 카스트로는 자신의 사후 육체를 미라로 만드는 것을 거부한 것이다. 실제로 쿠바에는 카스트로의 동상이 하나도 없다. 다만 카키색 군복에 턱수염을 기르고 시가를 물고 있는 모습만이 그의 트레이드마크로 남아 있을 뿐이다. 후계자인 동생 라울 카스트로(85) 국가평의회 의장은 형의 유언에 따라 시신을 화장했다. 라울 의장은 “형이 자신을 기리는 기념물이나 기념비, 동상을 세우지 말고, 자신의 이름을 딴 거리나 건물도 만들지 말라는 말을 남겼다”고 밝혔다. 사상을 중시하는 공산주의가 육신을 우상화해선 안 된다는 것이 카스트로의 지론이었다.

미라가 된 스탈린주의자들

미라(Mirra) 하면 가장 먼저 이집트가 떠오른다. 고대 이집트인들은 사자(死者)의 모습을 원형에 가깝도록 보존하면 사후세계에서도 영원한 삶을 산다고 믿어 미라를 제작했다. 이집트의 미라는 주검이 썩지 않도록 심장이나 간 등의 장기를 꺼낸 후 약품처리를 한 것이다. 미라는 다른 나라에서도 다양한 형태로 발견되고 있다. 중국에서도 많은 미라가 발굴되었으며, 베트남의 미라 제작기술은 세계적으로 인정받고 있다.

미라는 고대뿐만 아니라 현대에도 존재한다. 가장 대표적인 사례가 옛 소련의 공산혁명(볼셰비키혁명) 지도자인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1870~1924)이다. 레닌은 1924년 1월 21일 숨지면서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어머니 묘 옆에 묻어 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레닌이 사망하자 100만여명의 참배객이 몰려들었다. 참배객들은 살을 에는 듯한 추위에도 레닌의 관이 놓인 모스크바 ‘돔 소유자’ 밖에서 몇 시간씩 줄을 서서 순서를 기다렸다. 사흘 뒤인 1월 24일 레닌의 장례식이 붉은광장에서 거행됐다. 장례식 후 레닌의 시신은 당초 붉은광장에 영묘를 만들어 매장할 예정이었다. 하지만 추모 열기는 수그러들지 않았고 혹독한 겨울에 레닌의 시신은 부패하지 않았다. 이를 본 후계자인 스탈린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은 레닌을 신격화하며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시신을 방부처리를 했다. 레닌의 시신은 지금까지도 영원히 썩지 않은 채 유리관 안에 놓여 있다. 지금도 러시아 과학자들이 2년마다 유리관에서 그의 시신을 꺼내 방부처리를 다시 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에 의한 세계 최초 공산주의 국가를 건설한 레닌은 사후에도 영면(永眠)하지 못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1953년 3월 뇌출혈로 사망한 스탈린의 시신은 방부처리돼 레닌 영묘에 나란히 놓였지만 1962년 니키타 흐루시초프 전 소련 공산당 서기장의 ‘스탈린 격하운동’에 따라 화장됐다.

동유럽 독재자들의 시신도 미라로 한동안 보존됐었지만 스탈린처럼 화장됐다. ‘작은 스탈린’이란 말을 들었던 클레멘트 고트발트(1896~1953) 전 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의 지원을 받으며 1945년부터 1953년까지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위원장을 지냈다. 스탈린을 추종했던 그는 옛 소련에 반대하는 정적들을 무자비하게 숙청했다. 그는 1953년 3월 9일 스탈린의 장례가 끝난 5일 후에 사망했다. 사망 원인은 매독이었다. 그의 유해는 방부처리해 유리관에 넣어 별도로 건립된 묘소에 안치되었다. 하지만 1962년에 묘소는 철거됐고 그의 유해는 화장됐다.

게오르기 디미트로프(1882~1949) 전 불가리아 총리도 스탈린주의자다. 그는 1944년 불가리아 공산당을 세웠고, 1946년 서기장이 돼 불가리아를 스탈린식으로 통치했다. 그는 1949년 소련에서 치료 도중에 죽었다. 그의 시체는 방부처리돼 소피아의 게오르기 디미트로프 박물관에 전시되다가 1999년 화장됐다.

중국 건국의 아버지 마오쩌둥(1893~1976)도 시신을 화장 후 산골(散骨)해 조국 산하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지만, 그의 시신은 미라로 만들어져 베이징 천안문광장의 마오쩌둥 기념관에 안치돼 있다. 후계자인 화궈펑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마오를 미라로 만들어 우상화했기 때문이다. 중국 공산당의 창시자인 마오는 중국 국민의 존경을 받아왔지만 20세기 진시황, 철혈 독재자 등 무한 권력을 휘두른 ‘영원한 주석’이라는 비판도 들어왔다. 마오의 문화대혁명으로 수많은 사람들이 희생됐지만 그의 시신을 보기 위해 역시 수많은 사람들이 기념관을 찾고 있다.

중국 개혁의 총설계사 덩샤오핑(1904~1997)의 무덤은 중국에 없다. 덩은 “각막은 기증하고 시신은 해부한 뒤 화장해 바다에 뿌려 달라”고 유언했다. 그의 유골은 홍콩 앞바다와 중국과 대만 사이의 동중국해에 뿌려졌다. 화궈펑은 2008년 사망했는데 그의 유해는 베이징 바바오산(八寶山) 혁명공묘에서 화장됐고, 2011년 고향인 산시성 자오청현에 조성된 호화 묘지에 묻혔다.

김일성 미라 관리비 연간 80만달러

베트남의 국부인 호찌민(1890~1969)도 영면하지 못하고 있다. 호는 “유해를 화장한 다음 조국의 북부·중부·남부에 나누어 뿌리고 장소를 밝히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하지만 그의 주검은 화장되지 않았다. 당시 베트남 공산당 지도부는 호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어 수도 하노이 바딘광장에 대규모 영묘를 짓고 안치했다. 호는 베트남 공산당의 창건자이자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주석으로서 베트남 최고의 상징이었다. 베트남인들은 그를 ‘호 아저씨’라고 부를 정도로 좋아했다. 숙소는 호화로운 주석궁을 버리고 연못 옆에 자그마한 2층집을 지어 수수하게 살았다. 유일한 취미는 연못의 금붕어에게 밥을 주는 일과 찾아오는 어린이들과 어울려 노는 일이었다. 그가 남긴 유품은 지팡이 하나와 옷 두 벌, 몇 권의 책이 전부였을 정도로 청빈했다. 호찌민 영묘를 중심으로 좌우에 기다란 구호를 적은 담장이 있다. 좌측에는 ‘베트남이여 영원하라’, 우측에는 ‘호찌민은 영원히 우리 마음속에’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북한의 김일성(1912~1994)과 김정일(1942~2011) 부자(父子)의 시신도 미라가 돼 금수산 태양궁전에 나란히 누워 있다. 김일성이 1994년 7월 8일 사망하자 아들 김정일은 부친의 시신을 미라로 만들기로 결정했다. 김정일은 1년 후인 1995년 7월 8일 부친이 생전에 집무실로 쓰던 금수산의사당을 ‘금수산기념궁전’으로 개축해 부친의 시신을 안치했다. 북한은 개조작업에 무려 8억달러를 쓴 것으로 알려졌다. 김일성의 시신 보존 작업은 러시아의 생물구조연구센터가 담당했는데, 이 연구소는 레닌의 시신 영구보존작업을 맡았던 곳이다.

김일성의 시신은 레닌(1924), 디미트로프(1949), 스탈린(1953), 고트발트(1953), 호찌민(1969), 앙골라의 네트(1979), 가이아나의 바남(1985), 마오쩌둥(1976)에 이어 공산주의 지도자 중 9번째로 영구보존됐다. 후계자인 김정일은 부친보다 정치적 입지가 취약하기 때문에 부친의 시신을 미라로 영구보존해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는 데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김정일은 “모든 조건이 과학기술적으로 최고의 수준에서 마련된 방에 수령님을 생전의 모습대로 길이 모시도록 하라”고 지시하는 등 부친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북한 관영 언론은 김정일의 이런 노력을 ‘충효의 숭고한 모범’이라고 선전했다. 북한은 김일성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100만달러를 들였으며 관리비용만 연간 80만달러가 드는 것으로 추정된다.

김정일도 사망한 후 부친처럼 미라가 됐다. 아들 김정은은 2011년 12월 17일 김정일이 사망하자 할아버지처럼 시신을 영구보존하기로 결정했다. 전 세계적으로 열 번째다. 북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정치국은 2012년 1월 12일 “주체의 최고성지인 금수산기념궁전에 위대한 영도자 김정일 동지를 생전의 모습으로 모신다”고 공표했다. 김일성을 미라로 만들었던 러시아 전문가들이 김정일의 시신을 방부처리한 뒤 유리관에 넣어 안치했다. 비용은 김일성 때와 비슷하게 든 것으로 추정된다. 부자의 시신을 모두 영구보존하는 것은 공산주의 국가들에선 전례가 없었다. 김정은도 자신의 통치체제를 강화하기 위해 김정일의 시신을 미라로 만든 것이다.

북한은 2012년 2월 16일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에 맞춰 금수산기념궁전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명했다. 말 그대로 김 부자의 미라를 ‘민족의 태양’처럼 우상화하려는 의도라고 볼 수 있다. 북한 주민들은 각종 기념일마다 금수산태양궁전을 방문해 김 부자의 미라를 참배한다. 북한은 카스트로 전 의장이 사망하자 최룡해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하는 조문 사절단을 쿠바에 보냈다. 최 부위원장 등 북한 조문 사절단은 카스트로 전 의장의 시신이 미라가 아닌 한 줌의 재가 된 것을 보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북한과 쿠바는 전 세계에서 몇 안 되는 공산주의 ‘형제 국가’로서 정치·군사적 교류를 계속하며 국제무대에서도 상호 입장을 지지해왔다.

차베스는 방부처리 시기 놓쳐

독재자들 중 아깝게 미라가 되지 못한 경우도 있다. 카스트로를 추종해온 우고 차베스(1954~2013) 전 베네수엘라 대통령의 시신은 애초 영구 전시되기로 했었지만 방부처리 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미라가 되지 못했다. 차베스의 시신은 현재 석관에 안치된 채 대통령궁 인근 군 혁명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다. 군 출신인 차베스는 1998년 대통령에 당선돼 14년간 중남미의 대표적 좌파 지도자로 장기 집권했으나 암과 투병하다가 2013년 사망했다.

차베스는 카스트로를 아버지처럼 따랐다. 카스트로의 사상을 신봉한 차베스는 베네수엘라를 21세기 사회주의 모델 국가로 만들려는 야심을 보였다. 이 때문인지 몰라도 차베스는 수시로 쿠바를 방문했고, 무상으로 석유까지 지원하는 등 유대를 강화했었다. “피델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라고 말했던 그는 카스트로보다 먼저 세상을 떴다. 세계 최대의 원유 매장량을 자랑하던 베네수엘라는 세계 최고의 인플레이션율을 기록하는 등 최악의 경제난에 빠져 있다. 빈민으로 전락한 국민들의 불만이 폭발 직전에 있는 가운데 후계자인 니콜라스 마두로 대통령은 자칫하면 권좌에서 쫓겨날 가능성도 있다.

권력자의 시신이 박물관의 박제 신세가 된 것은 후계자들이 후광을 이용해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는 목적이 바탕에 깔려 있다. 이 때문에 후계자들은 권력자의 유언과는 달리 미라를 만들어왔다. 카스트로는 운 좋게도 동생이 자신의 유언을 따라주는 바람에 미라 신세를 모면했다. 저서 ‘자본론’을 통해 공산주의 사회 건설을 주장한 칼 마르크스(1818~1883)는 영국 런던 하이게이트 공동묘지에 잠들어 있다. 마르크스는 영면하지 못하고 미라가 된 공산주의의 지도자들을 어떻게 생각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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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장훈 국제문제애널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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